풍몽룡의 동주열국지 3 - 진초시대
풍몽룡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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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열국지 3》권은 중원의 패자 진(晉)나라와 남방의 신흥국가 초나라의 패권 경쟁을 다루고 있다. 진문공 이후 진나라는 제나라를 이어 패자의 지위에 오르게 됐지만 남방의 초나라 역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서 잠깐 살펴봐야 할 점은 과연 《열국지》 소설이 다루는 메인 스토리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열국지》는 《삼국지연의》와는 다르게 춘추전국시대라는 긴 세월을 담고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삼국지》는 세 나라를 뜻하고 《열국지》는 열 개의 나라를 다루고 있는데(실은 열 개 이상의 나라가 나온다.)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삼국지》에 비해 《열국지》가 훨씬 넓고 방대하다. 《삼국지》에서도 엄청난 인물과 사건이 나오는데 《열국지》는 이를 훨씬 압도하고 있으니 배경지식이 없는 분들에게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이런 역사 소설, 특히 나라와 나라가 물고 물리는 전쟁 소설 장르는 핵심 줄거리를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다. 《삼국지》의 경우 전반부는 조조와 원소의 싸움이며 후반부는 위, 촉, 오 삼국의 대립인데 이도 결국은 위나라와 촉나라의 싸움이 메인이다. 그럼 《열국지》는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진(晉)나라와 초나라의 대립을 으뜸으로 꼽을 수 있는데, 이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지금의 번역본이다.

 

진(晉)나라와 초나라는 《열국지》에서 왜 중요한 것일까? 우선 두 나라의 경쟁은 중국 춘추시대를 살피는 데 있어 가장 핵심이기 때문이다. 진문공이 제환공을 이어 패자가 됐을 때 가장 까다롭게 저항했던 세력은 초나라였다. 진(晉)나라와 초나라는 여러 부분에서 이질적인데 지역적으로 구분하자면 진(晉)나라는 북방, 초나라는 남방에 자리 잡고 있다. 또 진(晉)나라는 주나라로 비롯하는 황하문명 세력인데 반해 초나라는 야만적인 나라 즉 오랑캐였다. 학문적으로 살펴보자면 진(晉)나라가 위치한 북방은 주공의 제도를 토대로 선대의 문명을 골자로 하는 유가와 묵가가 발전했다. 반대로 초나라에서는 자유분방한 도가 사상이 주류를 이뤘다. 그렇기에 두 나라의 경쟁은 단순한 패권을 넘어 황하 문명의 이념과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두 나라의 대립에 대해서 자세하게 고찰해보자.

 

먼저 진(晉)나라의 왕족은 주나라의 천자와 동성이었으며 그렇기에 두 나라는 지역적, 혈연적으로도 가까웠다. 그렇기에 진(晉)나라는 주나라의 우월한 문명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으며 성장했다. 주나라의 예악은 이후 공자와 묵적에 의해 각각 유가와 묵가로 발전하게 된다. 여기서 공자의 유가는 주나라의 제도와 질서를 회복하고 무너진 예법을 수호하는 입장을 보이는데 이런 사상적 흐름은 필연적으로 보수주의와 연결된다. 아무튼 중원의 진(晉)나라는 천자국인 주나라를 대신하는 황하문명의 계승자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초나라는 진(晉)나라와 여러모로 대조적이다. 서주시대에는 초나라를 오랑캐로 여길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이런 관념은 춘추시대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초나라는 중국 남쪽의 방대한 국토를 가지고 있었지만 국토의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렇기에 중원의 문명 세력권에 대해 열등감을 가졌다. 국제사회의 노골적인 무시에 칼을 갈았던 초나라는 시대를 거듭하면서 혁혁한 내실을 다지고 나라 전반의 체제를 정비하여 국제사회의 패자 자리를 노리기 시작했다. 이렇다 보니 초나라에서는 위계와 질서를 강조하는 학문보다 자유분방한 분위기의 도가사상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진(晉)나라와 초나라의 대립은 문명과 야만의 대립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많은 역사에서 재현됐던 야만과 문명의 대립. 춘추시대 중원에서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진문공은 성복대전을 통해 초나라를 박살 내고 국제적으로 진나라를 패자에 지위에 올렸다. 그러나 진문공 사후 진나라는 권신과 외세에 의해 내부적으로 혼란스러웠다. 이틈을 타서 초나라는 발전하기 시작했다. 초나라는 목왕 시절부터 중앙집권이 가속화되고 패권전쟁에 다시 들어갔다. 당시 목왕은 이복동생 직의 무함을 받고 세자 자리를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거병을 하여 부왕인 초성왕과 반대세력을 제압하고 보위에 올랐다. 이후 활발한 대외정책을 펼쳐 진나라 수중에 있던 정나라와 채나라 등의 약소국가들을 자신의 세력권에 편입시켰다. 목왕 사후 초나라의 영웅이자 가장 위대한 군주인 장왕이 등극하였다. 장왕은 부군의 탄탄한 유산을 토대로 초나라를 패자의 위치로 세운 군주였다.

 

문명과 야만의 대결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일반적으로 생각해볼 때 문명과 야만의 승패는 문명의 압승일 것이라고 판단하는데, 적어도 기원전 중원에서는 어느 한쪽의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전통적인 강국 진(晉)나라는 호락하지 않았고 초나라의 기세 역시 쉽게 꺾이지 않았다. 이런 호각지세의 상황 속에서 초장왕이 문명국인 진나라를 굴복시키고 패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첫 번째로 '열등감'을 꼽을 수 있다. 초나라는 이전부터 실력이 있는 국가였지만 중원의 나라들로부터 무시 아닌 무시를 당했다. 무시를 당하게 되면 사람은 크게 두 가지 패턴으로 행동한다. 첫 번째 분노만 하는 경우, 두 번째 분노를 느낌과 동시에 무시당한 상황을 개선하고자 노력하는 경우. 대다수의 사람은 첫 번째인데 반해 초나라의 군주들, 특히 장왕은 두 번째 부류였다. 격렬한 열등감은 발전의 기폭이 되었고 초나라는 야만을 탈피하고 문명의 세력권에 진입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던 것이다.

 

두 번째는 뭐니 뭐니 해도 실력이다. 문명과 야만의 싸움에서 야만이 몰락하는 경우는 문명에 비해 절대적으로 세가 약했기 때문이다. 로마에서 일어났던 스파르타쿠스 검투사 반란은 문명과 야만의 격돌 서양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반란이 실패한 것은 결국 힘과 세력, 물자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반면 초나라는 중원 남쪽의 드넓은 영토와 풍부한 자원이 있었다. 그렇기에 로마의 검투사들과 다르게 실패를 하더라도 훗날을 기약할 수 있었고 손실을 회복할 여유도 있었다.

 

세 번째로 난세에 있어서 야만에 대한 고찰이다. 일반적인 치세에서는 기득권의 문화가 유용하지만 난세에 있어서는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다. 난세에는 기존의 방식이 아닌 혁신적이고 융통성이 있는 국가들이 두각이 드러나는데, 초나라의 야만성 역시 이러한 예에 속한다. 진과 초의 전쟁 이후에도 중원은 농경문화민족과 유목문화민족이 끊임없이 반목했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시대를 발전했다. 농경민은 유목민에 비해 세련된 문화를 가졌고 유목인은 농경민이 결여된 진취적인 기상을 불어 넣었다. 초나라의 역할은 붕괴하는 주나라 중심 문명에 물리적 충격을 가하여 중원 대륙에 역동성을 불어 넣고 발전의 기폭을 앞당겼다.

 

그럼 두 나라의 경쟁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야만을 상징했던 초나라의 영토가 중원 문화권에 편입되었다. 이는 중화문화의 확장과 더불어 초나라가 가진 야만성의 상실을 의미한다. 기존의 중화문명에 초나라가 편입된 결과, 중원의 패권은 초나라보다 훨씬 낙후된 나라들까지도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다. '야만국이었던 초나라도 패자의 자리에 오르는데 우리라고 못할 것은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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