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글샘 > 신창원과 지오디와 장정일의 사이에...
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 우리 시대의 인물읽기 1
장정일 외 지음 / 행복한책읽기 / 2001년 11월
평점 :
품절


<나에게 나는 너무나 작아서, 나는 자꾸 나를 떠나가려 하네>

서른이 넘은 남자가 한밤에 혼자 춤을 추는 책상 머리에 붙어있었다는 시라는데...

그는 비굴하지 않아 보인다. 그는 깡패에게 욕을 하며 너 깡패지?하고 정체성을 심어 주기도 하고, 택시 기사와 싸워서 옆자리 아가씨에게 미움을 받기도 하며, 엄청 긴 드라이버 가진 도둑을 보내기도 하고, 감옥에도 간다. 아무튼 지식인인 척 않는 그는 비굴하지 않아 좋다.

그러나 그는 또 마음 약한 사내다. 음식에서 이물질이 나왔다고 따지려다가 그집 아들의 눈을 만나면 아무 말도 못하는 그. 버스를 타고, "막차를 탄 사람은 자리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행복은 언제나 상대적임을 깨닫는 사람이다.

장정일을 읽으면서 왜 신창원을 떠올렸을까? 아버지에 대한, 가부장제의 사회 질서에 대한 거부를 <가장 솔직한 기록>으로 남겼다는 면에서 두 남자는 공통점을 가졌다고 내 머릿속에 비슷한 실루엣을 비쳤는지도 모른다. 심리학에서 <스트레스>를 제대로 풀지 못하면 <범죄>가 되지만, 사회적으로 공인된 방식으로 예술적 방법을 쓰면 <승화>된다는 애매한 용어가 있다. 장정일의 경우 <승화>와 <외설> 사이에서 강금실 변호사까지 동원된 전투가 벌어진 것을 보면, 심리학의 정의는 형사소송법의 정의와 유권해석보다 한끗발 아래인 듯도 하다.

신창원이 남겼다던 그 유명한 일기. 그 때, 살인범 신창원의 범죄는 나쁜 일이지만, 그의 자기 합리화까지 밉지는 않았다. 신창원이 정말 악당이었다면, 그의 티셔츠가 갑자기 불티나게 팔렸을 리는 없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그에게서 가엾은 짐승을 보았던 건지도 모른다. 가부장제의 사회질서가 만들어낸 사회적 범죄. 장정일의 아래 말을 읽으면서 신창원이 떠오른 것은 그런 연유에서라 생각한다.

"짐승은 배울 수 있지만 아무래도 깨달을 수 없고, 인간은 어쩌다 깨달을 수 있지만 결코 배우지는 못한다. 하므로 교육에 관해서는 단 한가지 원칙만 유효하다. 선생은 절대 학생에게 '주입'하지 말고 '암기' 시키지 말아야 한다. 그 배움은 다 쓸데없다. 어떻게 하면 '깨닫게 해 줄 것인가'를 고민하는 게 교육이다." 신과 장의 공통점이 이런 거였다는 게 희한한 줄긋기의 변명이라면 변명이 될 것이다.

장정일은 나보다 4년쯤 먼저 태어난 사람이므로 살아온 연대가 비슷하다면 비슷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삼중당 문고>의 추억과 존재의 근거는 상당히 공감할 수 있다.

그의 글들이 문제시 되어왔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나는 사회적으로 문제시 되었던 그의 글들을 별로 읽은 적도 없고, 영화도 한 편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가 낯설지 않다.

그의 <거짓말>은 장선우 감독의 영화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제목이 <거짓말>인데 왜 그렇게 법원에서 흥분했을까? 본인이 거짓말이라는데... 거짓말을 소설의 언어로 치환하면 <픽션, 또는 허구>가 된다. 소설이란 게 일상 생활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이야기를 통해 대리 만족을 얻는 거라면, 그 픽션은 죄가 없지 않을까? 하긴 조선 시대에 김시습의 금오新화처럼 열여덟 총각과 열여섯 처녀의 사랑이야기가 '새로운 이야기(신화)'로 여겨졌고, 불온시 되었던 것처럼, 또 기생 춘향과 어사의 사랑처럼 이룰 수 없는 이야기가 민간전승 되었던 것처럼, 질서를 중시하는 법 체제는 픽션에 대해서 늘 제대로 처벌의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크게 문제될 것 없는 이야기가 될 수 있듯이, 법은 <유죄>를 판결하지만, 몇몇의 법조인 외의 인생들은 무심히 지나간다. 소설을 쓰면서 제목을 <내게 거짓말을 해봐>라고 까지 했는데도 그걸 외설스럽다며 실형선고 운운하는 이 나라의 수준이 가히 알만하다. 차라리 성춘향에게 정조대를 채울 일이 아닌가. 어차피 소설을 일상 생활에서 일어날 수 없는 대리 만족의 효과로 치부한다면, 굳이 법률적 집행까지 필요했던가... 하는 생각이다.

지오디라는 그룹이 있다. 그들의 <거짓말>이란 노래가 있는데, 그들의 거짓말은 <반어>의 다른 말이다. 잘가(가지마) 행복해(떠나지마) 나를 잊어줘 잊고 살아가줘(나를 잊지마) 나는 그래 나는 괜찮아(아프잖아) 제발 내걱정은 말고 떠나가(제발, 제발 가지마~~~) 지오디의 음악 향유 계층이 초중딩이기 때문에 <반어 내지는 아이러니>란 제목을 붙일 순 없었으리라. 그냥 <거짓말>로 족하다. 그렇지만 초딩들도 그 거짓말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거짓말, 짐짓 거짓으로 꾸며 속마음과는 반대로 말하는 표현이라는 걸 초딩들도 감으로 안다. 좀 더 나이 든 세대를 위한 신승훈은 <애이불비(哀而不悲) : 슬프지만 슬픈 척하지 않겠다는>란 제목을 직접적으로 쓸 수 있지 않은가.

장정일이 덜떨어진 독자(법원이나 검사도 포함)를 위해서 <거짓말>이라고까지 제목을 붙여 주었건만, 덜떨어진 독자들은 그 음란함에 현혹되어 이 작품들을 포르노라고 말한다. '포르노 그라피'와 '문학 작품'의 사이에는 무엇이 있나? 그야말로, '와'라는 글자가 있을 뿐이지 않을까? 내가 스무 살이던 시절 친구들과 처음 비디오로 본 <엠마뉴엘>은 포르노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영화를 침을 삼켜가며 볼 시간에 술 한잔 더 마시고 잠을 잔다. 영화에 가위를 대고, 작가를 감옥에 보내고 하는 것은 뭔가 잘못된 프로그램이란 생각밖에 할 말이 없다. <거짓말>에 가위를 댈 것이 아니라, <거짓말>과 현실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들, 이 나이 정도면 그 정도 구별이 가능할 것이란 나이를 정해서 상영하고 판매하는 프로그램으로 바꿔줘야 할 것이다.

장정일은 스스로 글 써서 먹고 사는 사람임을 안다. 그는 문학가연 하지 않는다. 직업 작가임을 스스로 안다. 그리고 세상이 원하는 글을 쓴다. 영화가 21세기 한국의 화두가 될 것임을, 우리 코드에 맞는 산업임을 서편제가 나올 때, 아니 그 전부터 벌써 알고 있었던 코가 밝은 사람이다. 그의 글에는 솔직함이 배어있어서 <포스트 모더니즘> 운운하는 다른 작가들과는 뭔가 다른 냄새가 분명히 배어 있다. 다른 작가들이 엮어내는 산문집이 쓰레기 더미에 지나지 않을 때, 그의 수필들은 상당히 명쾌하다. 아마도 그 힘은, 그 글들이 <청탁>받아 쓰지 않고, <투고>를 위해 적은 글들이기 때문에 그 투명한 명징성을 간직하고 있는 거라고 나름대로 추측한다.

그의 글들을 상당히 호의적으로 적고 있는 이 책을 읽어서 그런지, 나의 리뷰도 그에 대해서 옹호하는 쪽으로 적힌 듯 하다. 그렇다고 앞으로 그의 글을 부지런히 읽을 거라든지, 그런 생각은 별로 없다. 솔직히 그의 글들에서 번득이는 예지력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많은 글들은 내 취향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지금으로선 강하기 때문이랄까?

행복한 책읽기에서 '우리 시대의 인물 읽기' 시리즈의 첫 인물로 그를 택한 이유가 이 책엔 잘 드러나 있다. 그만큼 장정일은 괴팍하면서도 우리 시대의 흐름을 잘 짚어낸 문제 작가라고 할 만하단 이유다. 장정일 문학이 거칠면 거친 그대로, 현실과 거리가 크면 큰대로 인정하는 사회로 우리 문화가 성숙하기를 바라기는 아직 시기상조란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내 바람은 계속 한결같은 바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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