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플라시보 > 우애령의 한계를 보다.
정혜
우애령 지음 / 하늘재 / 2005년 2월
평점 :
품절


여자 정혜는 영화로 먼저 보았었다. 예전부터 무지하게 기다렸었고 그래서 무조건 아주 재밌게 봤다. 물론 정혜의 정적인 면과 그녀의 아픔이 성폭행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았지만 (마치 성폭행의 피해자는 일평생을 불행하게만 살아야 한다는 공식 같아서) 그래도 혼자 사는 여자의 일상을 꽤나 리얼하게 담은 작품이라 보는 내내 감독이 참 애를 많이 썼겠다 싶었었다.

이 책은 영화 여자, 정혜 이벤트에 응모를 해서 받은 책이다. 영화를 재밌게 봤으니 원작도 괜찮겠다 싶어서 응모를 했는데 덜컥 당첨이 된 것이었다. (하긴 응모를 잘 안해서 그렇지 응모하면 당첨은 잘 된다.) 이미 다른 분들의 리뷰를 보고 여자, 정혜가 장편이 아닌 단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읽기 시작하니 너무 짧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일단 영화와 원작은 많이 다르다. 여 주인공의 성격도 조금 다른것 같고 그 외에 배경이나 환경도 조금씩 다르다. 영화는 원작에서 혼자 사는 여자라는것. 아픔을 가진 여자라는것. 그리고 한 남자를 만나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는 점만 빼면 모두 다시 썼다고 할 만큼이나 다르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나는 원작보다는 영화가 더 마음에 든다. 원작은 짧기도 짧을 뿐더러 솔직히 말해서 작가가 혼자 살아보긴 살아 본걸까 싶을 정도로 조금 비현실적인 느낌들이 많았다. 영화와 같은 에피소드라 하더라도 원작에서는 좀 다른 느낌으로 표현이 되어 있었는데 여자 주인공이 스스로 세상과 격리를 시켰다는 느낌 보다는 세상에서 따돌림을 당했다는 느낌이 더 들었다. 사실 혼자 사는 사람들이 세상에 왕따를 당한건 아니다. 그냥 그들은 그들이 세상에 등을 돌리고 있을 뿐이다. 아직 학생이라서 미숙한 또래집단에서 따돌림을 당하는게 아니라면 얼마든지 섞여서 살 수 있다. 하지만 책에서의 여자 정혜는 그렇지 못하다. 세상은 별로 비웃을 일도 없는 그녀를 끊임없이 비웃는다.

여자, 정혜 이외의 단편들은 다 고만고만 하다. 모두 11개의 단편이 있는데 정혜보다 더 나을것도 못할것도 없는 단편들이다. 내가 여기서 우애령의 한계를 보았다면 그건 바로 상황의 설정이다. 주인공들은 거의 다 간호사이다. 거기다 그녀 자신이 전공했던 심리학에 관한 직업들도 상당히 자주 나온다. 나중에는 모두 다른 단편이지만 주인공에 대한 설정들 때문에 서로 동일인물 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단편을 쓰면 주인공들에 대한 설정이 모두 달라야 한다는 법칙 같은건 없지만 그래도 서로 다른 느낌을 주면 좋을텐데 모두들 비슷비슷하니 읽는 내내 헤깔렸다.

원고 매수가 적으니 단편은 좀 쉽게 갈 수 있을꺼라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어쩌면 단편들이 더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단 한편을 쓰는거라면 확실히 장편보다는 빨리 끝이 나겠지만 이렇게 단편집을 내려면 장편보다 훨씬 더 많은 애를 써야 하는게 아닌가 싶다. 하나의 주제를 가진 단편이 아니라면 단편들은 모두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어 읽는 사람에게 전혀 다른 느낌을 주어야 하는데 우애령의 경우 굵직한 부분을 제외하고 디테일한 부분에서 너무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흔적이 보인다. 사실 자신이 가져보지 못한 직업을 주인공에게서 쓰려면 단 며칠이라도 그 직업을 가진 사람을 쫒아다녀 보거나 최소한 인터뷰라도 해 보거나 해야 하는데 그게 좀 귀찮았던 모양인지 그냥 주인공들의 직업을 다 같은걸로 묶어버린것 같다. 하긴 해 보지도 않은 일을 멋대로 상상해서 진짜로 그 직업을 가진 사람이 볼때 말도 안되는 얘기를 적어놓는 것 보단 낫지만 그래도 어쩐지 그 게으름이 싫다.

작가란 으례 가만히 처박혀서 머릿속에서 글만 끄집어 내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게 공상소설이 아닌 다음에야 실제 인간들을 모델로 하고 있다면 나는 발로 뛰는 과정이 분명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여러번 말했지만 나는 작가들에게서 늘 그런 한계를 본다. 재미 있고 없고를 떠나서 오로지 방구석에 앉아 머릿속으로만 빼낸 글들은 이상하게 생기를 잃는다. 하지만 작가가 정말로 돌아다니고 정보를 수집해서 쓴 작품들은 설사 그 사실을 숨긴다 하더라도 그게 글에서 고스란히 표현이 된다. 글을 쓰는건 뻥을 치는게 아니다. 없는 사실과 모르는 사실을 쓰려면 최소한 그럴듯은 해야 한다. 그 그럴듯은 글빨이 아니라 어쩌면 발로 뛰고 정보를 수집하는 노력에서 생기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많은 작가들은 그걸 전혀 생각하지 않는것 같다. 그들이 방안에 앉아서 공상한걸 들으려고 독자들은 책을 사는게 아니다. 공상은 우리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 책에 나온 모든 단편들이 소재는 좋았지만 노력이 부족했다고 본다. 그래서 좀 더 괜찮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그냥 대강 대강 쓴것 같다. 글은 이렇겠지? 가 아니라 이렇다. 여야 한다. 이 확신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작가의 몫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행인 2010-10-17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흠...박완서, 우애령 작가의 글을 무지 좋아하는 행인입니다.
우애령 작가의 다른 책들을 읽어봤지만,
전 작가가 그냥 방에 앉아서 공상하고 감상적으로
이야기 지어내는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어서 좋던데요.
저는 영화도 좋지만 책의 느낌이 더 독특하고 디테일이 강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무엇보다 정혜의 진수는 여인의 심리 디테일인데
대강 쓴 것 같다는 평은 공감되지 않네요. 저는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게다가 단편소설이 짧은 거나 한 단편집 안에 있는 글들의 톤이 일정한게 단점이 아닌 것 같고요.
제가 감동적으로 읽었던 책이라 어떠한 비판이 있을지 호기심에 들어와봤는데 좀...작가의 한계로까지 제목을 붙이는덴 무리가 있군요.
어떤 사람은 같은 글을 읽고 감동 받아 영화화하고 어떤 사람은 대강 썼다하니 역시 감상은 상대적인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