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는 곳으로 오늘의 젊은 작가 16
최진영 지음 / 민음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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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작가이기에 이런 진부한 소재도 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소설이 조금 만 더 길었으면, 전개가 더디 가더라도 좀 더 책의 감정을 가슴에 지고 있었을텐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내게 도둑질을 당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훔친 것은 티켓이나 돈이라기보다 목숨이다. 나는 이미 많은 이의 증오를 뒤집어썼다. - P19

사람들은 나를 보고 아빠를 닮았다고들 했다. 워낙 어렸을때부터 그런 말을 들어서 나는 내가 정말 아빠를 닮은 줄 알았다. 지금 생각은 다르다. 나는 아빠를 닮은 게 아니라 아빠를 닮았다는 말을 듣고 자랐을 뿐이다. 그 말이 나를 아빠처럼 만들었고. - P31

어느 밤 고백 성사라도 하듯 건지가 말했다. 학교에 가지않아도 되고, 아빠도 없고, 모두가 공평하게 불행한 지금이차라리 홀가분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고, 적어도 지금은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고. 만약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서 학교에 다닌다면 이젠 누구에게도 맞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그런 만약 같은 건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다고. - P37

건지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전에 본 적 없는 결연함, 꿈을꾼다는 것. 그 꿈을 나눈다는 것. 건지에게 꿈이란 전에 닿아본 적 없는 새것, 실패해 본 적 없어 재지 않고 있는 그대로 품을 수 있는 첫사랑 같은 것이었다. - P38

나는 그 모든 말이 무서웠다. 학교다닐 때 놈들은 나를 보고 ‘재수 없는 새끼‘라고 했다. 선생에게 혼나고 여자한테 차이고 용돈을 못 받고 반찬을 흘리고 선배가 갈구고 심지어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파리가 날아다니고 아무 이유 없이 짜증이 나도 나 때문이라고 했다. 모든 걸내 탓으로 돌리며 나를 때렸다. 내가 맞아야 하는 이유는 사방에 널려 있었다. 세상은 내가 재수 없는 새끼란 걸 증명하려고 존재했다. 아버지도 그랬다. 모든 게 내 탓이고 엄마 탓이라고 했다. 엄마와 내가 자기 인생을 망쳐 놓는다고, 현실은 반대였다. 아버지가 우리 가족을 망쳐 버렸다. 엄마가 죽고 모든불행을 홀로 감당하게 되자 아버지는 자살해 버렸다. - P70

단은 국경을 넘어 유럽으로 가길 원했다. 그곳에는 생존자를 위한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을 거라고, 그곳에서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내겐 그런 믿음이 천국을 주장하는 종교인의 설교와 다르지 않게 들렸다. - P85

국경을 넘나드는 사람처럼 시간 개념도 널뛰었다. 엊그제가 여름이었는데 벌써 연말이라거나, 추석 지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설날인가, 그렇게 놀라다 보면 어느새 1년이 지나있었다. 월급 들어오는 날짜를 기준으로 한 달을 가늠했다. 정해진 날짜가 되면 통장에서 돈이 우수수 빠져나갔다. 열심히 버는데도 늘 쪼들렸다. 중요한 일을 다음으로 미루거나 대충 처리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가족 여행, 가족사진, 생일 파티, 칭찬과 위로, 오늘은 어땠어? 키가 이만큼이나 컸네, 안아주고 사랑한다 말하는 것, 오늘을 기억하고 내일을 기대하는것,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 잘 자라고 말해 주는 것. - P89

분명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데, 최선이 답은 아니란 생각이 세금 고지서처럼 주기적으로 날아들었다. 삶이 마디마디 단절되어 흘렀다. 직장에서의 나와 아이들앞에서 나와 단을 대할 때의 나와 혼자 있을 때의 내가 징그러울 만큼 달랐다. 나라는 사람이 흐트러진 퍼즐 같았다. 애초의 내가 어땠는지 밑그림은 기억나지 않았고 퍼즐은 흩어진 채 여기저기 떠돌았다. 무언가 미세하게 어긋나고 있어서먼 훗날 완벽하게 분리될 것만 같았다. 나와 내가. 나와 단이. 나와 아이들이. - P90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언제부터 시작된 질문인지 모르겠다.
잘 살 수 있을까. 그 질문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대학 졸업하던 무렵이었다. 불분명한 내일이 두려웠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잘 될 거라는 긍정이 남아 있었다. - P93

한국에서 그런 일을 하면 무시당하기 십상이고 자기를 하찮게 대하는 사람들에게 화도 많이 나는데 외국에서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무시당하면 그냥 무시하게 된다고, 고생스러워도 우울하지 않고 마음속 당당함을 지킬 수 있다고, 외국에서는 자신의 젊음을 고스란히 느끼고 즐길 수 있는데 한국에만 들어오면 젊음이 짐스러워진다고 했다.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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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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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 작가의 에세이를 보면 나름 성공루트를 밟아온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작가의 글은 왜이렇게 우울해 사람 기분을 심연으로 가라앉게 할까.
시적인 절망이 나를 끌어내렸다. 위로를 받으려 김애란의 글을 읽진 않는다. 그냥 가라앉는 배에서 바다를 등지고 기댄 것처럼, 내 뒤의 불행을 연민하고 내 앞의 불행을 가늠해 보며 바로 닥친 나의 불행도 실감해 보는 것.

소설은 내가 좋아하는 이기호작가의 말처럼 잔인하다. 잔인한 걸 알면서도 자꾸 중독되는게 이런 먹먹한 감정이 계속되면 마치 마라톤 선수의 러너스하이라도 가져다 줄 것이라 착각을 하는건지, 이런 비참함에 같이 서서 불행해지는 감정의 끝이 무엇일지 알기위해 계속해서 달려야겠다.

몇 해전, 추석 때였던가. 술에 취해 오토바이를 몰고 선산에 가다, 중심을 잃고 논두렁에 고꾸라져버렸을 때 —— 작열하는 가을별 아래, 자신을 일제히 내려다보던 친척들의 얼굴을 용대는기억한다. 형의 곤혹, 형수의 경멸, 조카의 무시, 사촌들의냉소, 햇살을 등진 구경꾼들의 눈부신 멸시. - P135

그러니 혈혈단신 상경한 그가, 사람들의 포기와 실망에 익숙해진 그가, 도시의 속도에 여전히 어리둥절해하는 철딱서니 없는 노총각이, 눈 깊은 조선족 여자의 친절에 홀딱 빠져버린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 P137

택시 경력 5년이 넘는 용대는 서울의 괜찮은 식당을 속속들이 알았다. 처음에는 유명해지고 다음에는 천박해져버리는음식점이 아니라, 허름하고 보잘것없지만 맛 하나만은 단정한 그런 집들을 말이다. - P139

도시 곳곳에는 한쪽 손을 번쩍 들어 택시를 잡은 뒤, 술에 취해 아름답고 어그러진 말들을 차비처럼 내려놓고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때론 두서없고 엉뚱한, 어느 때는 철렁하고 알 수 없는 말들을 반짝이는 동전처럼 흘리고 가는 이들이.
......
물론 용대는 알고 있었다. 택시 안에서는 기사도, 손님도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교육받으러 온 사람의 30퍼센트가 한 달 안에 그만두고, 2, 3개월이 되면 절반 이상이 그만두고, 6개월 후에는 한두 사람밖에 안 남는 회사에서, 같은 기사들끼리도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
자기 위치가 초라할수록 풍선처럼 커다랗게 허풍을 떤다는 걸 말이다. - P144

처음에는 안도가 그다음엔 욕심이 찾아왔다. 정착의 느낌을 재생반복하기 위해 자꾸 이것저것을 사들이고 집을 꾸미기 시작했다. 월급날에 대한 확신과 기대는 조금 더 예쁜 것, 조금 더 세련된 것, 조금 더 안전한 것에 대한 관심을 부추겼다. 그러니까 딱 한 뼘만…… 9센티미터 만큼이라도 삶의 질이 향상되길 바랐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 많은 물건 중 내게 딱 맞는 한 뼘‘은 없었다는 거다. 모든 건 늘 반 뼘 모자라거나 한 뼘 초과됐다. 본디 이 세계의 가격은 욕망의 크기와 딱 맞게 매겨지지 않았다는 듯. 아직 젊고, 벌날이 많다는 근거 없는 낙관으로 나는 늘 한 뼘 더 초과되는쪽을 택했다. 그리고 그럴 자격이 있다 생각했다. - P214

은지가 조그맣게 끄덕인 건 이제 그들도 더 이상 어리다고 할수만은 없는 나이가 되어서였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어둑한술집에 죽치고 앉아, 줄담배를 피우며 지적이고 허세 어린 농담을 주고받다 봄 세상이 조금 만만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어느 날 자리에서 눈을 떠보니 시시한 인간이 돼 있던 거다.
아무것도 되지 않은 채.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이 이상이될 수 없을 거란 불안을 안고, 아울러 은지와 서윤은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가진 것 중 가장 빛나는 것을 이제막 잃어버리게 될 참이라는 것을. - P251

하지만 은지는 언제나 그래 온 것처럼 인생을 굴러가게 만드는 건 근심이 아니라 배짱임을 믿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두려움을 깔보는 거라고, 실은 본인도 믿지 않는 주문을 외워가며 말이다. 서윤의 경우,
두려움을 이기는 제일 좋은 방식은 두려움을 경험하는 거라여기는 편이었다. 아니, 그보단 아예 두려움 근처에 가까이가지 않는 편이 상책이라고, 진짜 공포는 그렇게 쉽게 감당할수 있는 게 아니라며 말이다. 사실 서윤이 품고 있는 근원적인 두려움 중 하나는 가난이었다. 서윤은 오랫동안 그것이 제삶 가까이 오지 못하게 흡사 파리 떼를 쫓는 사람처럼 두 팔을 휘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혹 그게 누군가에게는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할지라도, 당장 하지 않으면 안 되고, 할 수 있는 일들을 했다. - P254

"힘든 건 불행이 아니라……… 행복을 기다리는 게 지겨운거였어." - P277

다만 언제였더라. 현대문학 스터디 때 서윤이 "교수님들세대는 가난이 미담처럼 다뤄지는데 우리한테는 비밀과 수치가 돼버린 것 같아" 라고 웅얼대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은지는 그동안 서윤과의 감정도 풀 겸 먼저 이런저런 얘기를 꺼냈다. - P281

그런데 언니, 요즘 저는 하얗게 된 얼굴로 새벽부터 밤까지 학원가를 오가는 아이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해요..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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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선물 -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은희경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15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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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은 이미 이루어 졌거나, 혹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다’

냉소적인 어린아이를 통해 평범한 인간 군상에 신랄한 비판을 퍼붓는 소설인가 싶었는데 마지막 해설의 한 글귀를 보고 마음을 풀었다.

누가 나를 쳐다보면 나는 먼저 나를 두 개의 나로 분리시킨다.
하나의 나는 내 안에 그대로 있고 진짜 나에게서 갈라져나간 다른나로 하여금 내 몸밖으로 나가 내 역할을 하게 한다.
내 몸밖을 나간 다른 나는 남들 앞에 노출되어 마치 나인 듯 행동하고 있지만 진짜 나는 몸속에 남아서 몸밖으로 나간 나를 바라보고 있다. 하나의 나로 하여금 그들이 보고자 하는 나로 행동하게하고 나머지 하나의 나는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때 나는 남에게 보여지는 나와 나 자신이 바라보는 나‘로 분리된다.
물론 그중에서 진짜 나는 보여지는 나가 아니라 바라보는 나이다. 남의 시선으로부터 강요를 당하고 수모를 받는 것은 보여지는나‘ 이므로 바라보는 진짜 나는 상처를 덜 받는다. 이렇게 나를 두개로 분리시킴으로써 나는 사람들의 눈에 노출되지 않고 나 자신으로 그대로 지켜지는 것이다. - P23

누구를 좋아하게 되면 약점이 생기고 어리석어진다는 사실을 알기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애는 결국 내 마음을 끝까지 붙들지못했다. 그런데도 그애에 대한 장군이의 질투심은 같잖게도 꽤 집요한 것이었다. 나와의 관계를 견제하는 부질없는 질투심이기도했지만 반장이 갖추고 있는 조건을 질투하는 열등감이기도 했다. - P52

그날도 우물가에서 설거지를 하며 장군이 엄마는 광진테라 아줌마를 상대로 한참 수다를 늘어놓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모의 월남치마를 두고 폭이 좁다, 무늬가 요란하다, 하면서 한바탕 참견을해대더니 이왕 나온 월남 이야기를 얼마 전 월남에서 돌아온 자전거포 작은아들로 자연스럽게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젊은 사람이 안됐어. 다리가 그 지경이 되었으니 시집올 처녀나 있겠어?"
이렇게 동정하는 척하면서 불운을 강조하는 것이 남의 험담에이력이 붙은 장군이 엄마의 요령이다. 거기 비해 성품이 순박한 광진테라 아줌마의 대꾸는 언제나 솔직하다. - P63

"쪼꼬만 게 무슨 비밀이라도 있나? 책가방 좀 봤다고 저 야단이야" 라며 방문을 닫고 들어가버리는 이모의 행동이, 스스로도 떳떳지 않다고 생각한 행동을 현장에서 들켰을 때 어른의 권위를 되찾는 마지막 방법으로 택한 뻔뻔스러움이란 걸 알긴 하면서도 지금까지 성실하게 수행해온 배달부나 자문관의 권위를 잃은 나는 자존심에 작은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불과 오 분도 지나지 않아 그 상처 위에는 억지로 딱지가내려앉았다. 쪼꼬만 게 어쩌구 하면서 꽝 닫고 들어간 바로 그 방문을 황급히 도로 열고 이모가 쏟아질 듯 방에서 뛰쳐나오며 아직까지 상한 자존심에 대한 정리가 끝나지 않아 마루 앞에 그대로 서있는 내 목을 너무나 사랑스럽다는 듯이 꼭 끌어안았던 것이다.
이모는 정말이지 제멋대로 행동했다. 이모의 머릿속에서 세상사람은 언제나 자기를 몹시 좋아하는 사람과 자기를 알아볼 줄 모르는 사람, 두 부류로만 나뉘었다. 또 세상일은 언제나 사랑과 미움 두 가지뿐이었다. 따라서 그런 몇 가지 생각의 틀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이모의 행동에 사려라고는 있을 수 없었다. - P85

그 이야기를 들은 뒤 나는 다시는 엄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더이상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에서 나는 슬픔을느꼈으며 그런 슬픔이 나에게 약점을 만드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엄마에게나 나 자신에게 연민을 느끼기를 원치 않았다. 건드려질 때마다 아픔을 느끼는 상처를 갖는다는 것은 내 삶에 대한 스스로의 조절능력을 상실하는 거였다. 나는 내 상처를 건드리는 사람의 의도대로 반응하면서 살고 싶진 않았다.
교과서가 효심을 고취시킨다는 목적으로 한 단원쯤은 반드시어머니의 사랑을 환기시키고 모든 동시와 동화가 어머니를 아름답고 그리운 존재로 찬미할 때마다 나는 찢어진 치마 사이로 땟국에 전 다리가 내비치던 장터의 미친년을 떠올렸다. 그때 비로소 죄의식이나 공포 같은 강력한 것보다 그리움이나 사랑 따위의 보드라운 것을 이겨내기가 훨씬 힘들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 P158

고달픈 삶을 벗어난들 더 나은 삶이 있다는 확신은 누구에게도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떠난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라기보다 지금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아무 확신도 없지만 더이상 지금 삶에머물러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 때문에 떠나는 이의 발걸음은 가볍다. 그런 떠남을 생각하며 아줌마는 사라진 버스 쪽을 그렇게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는 것이리라. - P164

아이들이란 쉽게 패를 짓고 그것을 공통된 정서로 묶어서 세勢를형성하기를 좋아했으므로 누구를 괴롭힌다는 데 신이 나서 그렇게짓궂은 반복음률을 만들어내 남을 놀리곤 한다. 나는 그런 데에 한번도 끼어본 적이 없다. 아이들 특유의 그런 하찮은 위악성에는 관심이 없었다. - P167

(나는 ‘내 자랑이 아니라‘로 시작되는 노골적인 자랑과 ‘남의 험담 같아서 안됐지만‘으로 시작되는 본격적인 험담에 대해 잘 알고 있다) - P200

할머니는 이모에게 무언가를 허락할 때 활짝 웃으며 "이 시간 이후는 그렇게 해라, 어때 맘에 드니? 좋지?" 라고명명백백하게 말하지 않고 꼭 절대 마음이 바뀔 리 없는 사람의 완강한 표정을 그대로 유지한 채 "니 마음대로 해라" 라거나 "반대는않겠다"는 식의 미필적 고의 혹은 비판적 지지의 형식으로 표현하곤 한다. - P262

사랑이 아무리 집요해도 그것이 스러진 뒤에는 그 자리에 오는다른 사랑에 의해 완전히 배척당한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장소가가지는 배타적인 속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랑, 새로운 사랑은 언제나 가능한 것이다.
운명적이었다고 생각해온 사랑이 흔한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때 사람들은 당연히 사랑에 대한 냉소를 갖게 된다. 그렇다면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사랑에 빠지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얼마든지 다시 사랑에 빠지며, 자기 삶을 바라볼 수 있는 거리유지의 감각과 신랄함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집착 없이 그 사랑에 열중할 수가있다. 사랑은 냉소에 의해 불붙여지며 그 냉소의 원인이 된 배신에의해 완성된다.
삶도 마찬가지다. 냉소적인 사람은 삶에 성실하다. 삶에 집착하는 사람일수록 언제나 자기 삶에 불평을 품으며 불성실하다. 나는그것을 광진테라 아저씨 박광진씨를 통해서 알았다. - P275

대부분의 어른들은 모험심이 부족하다. 진정한 자기의 삶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찾아보려 하기보다는 그냥 지금의 삶을 벗어날수 없는 자기의 삶이라고 믿고 견디는 쪽을 택한다. 특히 여자의경우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배후에는 ‘팔자소관‘이라는 체념관이 강하게 작용한다. 불합리함에도 불구하고 그 체념은 여자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우연히 닥쳐온 불행을 이겨내지 않고 받아들이도록 만듦으로써 더 많은 불행을 번식시키기 때문이다. - P301

한참 동안 혜자 이모는 진흙땅 위에 무릎을 꺾고 엎어져 소리죽여 운다. "현석아" 하면서 현석 오빠의 어깨를 끌어다 함께 우는데 솥단지며 곤로며 화장품이 어지럽게 널려진 진흙땅에 엎어져 우는 그들의 모습은 비참하기는 하지만 한편 상처입은 영혼들처럼 순결해 보이는 점도 있다. - P325

세상에 기적이란 없다. 그러나 우연은 많다. 아니 세상의 중요한 일은 공교롭게도 모두 우연이 해결한다. - P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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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이승우 지음 / 민음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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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 윗 세대의 감수성은 이렇게 감정이 주체할 수 없도록 벅차오르게 만드는걸까.


이 감정을 또 받아들이기 망설여져 두번 읽긴 힘들것 같은 생각이 들정도로 먹먹한 소설.

이승우 작가 소설은 나같이 평소 기독교에대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도 독서에는 전혀 무관할 수 있다는 점이 놀랍다.

연희에게 일어난 일은 그가 라면을 먹지 않았어도 일어났을 일이다. 그가 라면을 먹은 사건과 연희의 사건 사이에는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다. 그러니까 그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라면을 먹지 않았는데도 그 사건이 일어났다면 그는 자기가 행한 다른 어떤 일을 끄집어내어 그 사건의 원인으로 상정하고 자책했을 것이다. 무엇이든 끌어냈을 것이다. 자신에게 죄의식을 덧씌우기 위해 무엇이든 찾아냈을 것이다. 만들어 내기라도 했을 것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죄의식이었으니까. 죄의식을 느끼지 않으면 죄의식이 느껴져서 괴로웠을 테니까.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자신을 견딜 수 없었을 테니까. 차라리 죄의식을 만들어 자기를 괴롭히는 것이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자기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며 괴로워하는것보다 나았을 테니까. 그는 죄의식을 피하기 위해 죄의식을 필요로 했다. - P41

우연하지 않고 막연하지도 않은 동기를 숨기기 위해 우연과 막연을 전면에 내세운다고 할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우리는보기 싫은 물건은 우연히‘ 손이 닿지 않는 깊숙한 곳에 숨기고, 만나기 싫은 사람과의 약속은 우연히 잊어버린다. 박 중위를 그 자리에 앉게 한 것은 왼쪽 창가에 앉은 사람이 그의 마음속에 불러일으킨, 그 자신이 아직 의식하지 못하거나 의식하지 못한 척하는 어떤정서, 추억이거나 기대 혹은 욕망일 수 있다. 왼쪽에 앉은 사람에게서 감지한 어떤 요소가 그의 과거나 미래와 연결된 어떤 줄을 흔들었고 그는 그 줄에 걸려 넘어졌다는 식이다. - P46

예컨대 자기가 정말로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라 무료한 한 때를 견디기 위해 가벼운 파트너를 필요로 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그 자신도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모를 필요가 있거나모르는 게 유리하기 때문에 모르기로 작정했다고 가정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토끼를 잡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하는 호랑이의 프로 근성 같은 것과는 상관없다는 말인가. 아니, 자기 자신조차 감쪽같이 속여서 진심으로 간절하게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그 복잡한 암시와 조작이야 말로 토끼를 잡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하는 호랑이의 진면목인지 모를 일이었다. - P65

후는 형제가 어떤 판단을했는지 그 판단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수 없었는데, 그것은 형제가 어떤 해석을 했는지 알 수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자기가 어떤 의사를 가지고 있는지, 아니, 어떤 의사를 가지고 있기는 한 건지 분명하게 알지 못했기 때문에 형제의 해석을 판가름할 능력이 없었다. 후는 그 순간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선택을 해야 하는 부담으로부터 달아났다. 선택은 그의 권리였지만 책무이기도 했다. 그는 책무를 다하지 않은 죄책감을 권리를 포기한 희생과 맞바꿈으로써 자신의 무고함을 확보하려고 했다. 자연스러운 양도가 이루어졌다. 어쩔 수 없이 선택의 권리와 책무가 형제에게 떠넘겨졌고, 형제는 그 권리와 책무를 양도하지 않았다. - P102

암논은 자기 사랑을 어떤 것이든 요구할 수 있는 권리증처럼 내민다. 사랑한다. 그러니까 나와 자자. 사랑한다는 것이 그에게는 모든것을 할 수 있고 무엇이나 용납되는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간주된다. 그렇기 때문에 억지스럽고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하면서도 그 요구가 억지스럽고 어처구니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간주된 그의 사랑이 상대에게는 폭력일 수 있다는 사실을인지하지 못한다. 아름답고 순결한 다말은 이 폭력의 희생자이다.
그녀는 자기를 욕되게 하지 말라며 이복 오빠를 뿌리친다. 그리고상식과 이치를 앞세워서 설득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나에게는 치욕이고 당신에게는 어리석음이다.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다. 지금 이러지 말고 아버지인 왕에게 말해서 나를 원한다고 하라. 아마 왕은당신의 청을 들어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당신의 차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말은 논리적이다. 그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논리에 맞는 생각은 사랑 이전이나 이후의 것이다. 논리에 맞게 생각하고 논리에 따라 말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하지 않거나 이제 더 이상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 P106

말하자면 압살롬은, 암논이 사랑한 것처럼 다말을 사랑했던 것이 아닐까. 암논이 사랑한 것처럼 사랑했지만, 암논이 행한 것처럼 행할 수는 없었던 것이 아닐까. 암논이 사랑한 것처럼 사랑했음에도 암논이 행한 것처럼 행할수 없었기 때문에 암논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 P110

신분을 증명하는 일은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이었다. 믿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증명할 수 있지만 믿지 않으려고하는 사람에게는 누구도 증명할 수 없는 것이 신분이었다. 장은 그것을 잘 알았다. 장은 칼자루를 쥔 자였다. 그는 언제든 칼끝을 겨누거나 거둘 수 있었다. 믿어 주거나 믿어 주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것에도 연연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 앞에서 그의 칼끝은 무안하고 무색했다. - P140

아내는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다르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능력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다 헤아릴 수있는 것처럼 판단하고 평가하고 비판하는 건 옳지 않다고 답했다. 한정효는 전능자의 권력 사용에 의문을 제기했지만 아내는 전능자의 권력 사용에 대한 사람의 판단 능력에 이의를 제기했다. 한정효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듣지 않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했고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듣지 않았다. 하나님이 그렇게 독실하고헌신적인 사람을 이런 병에 걸리게 할 수 있는가, 거기에서 무슨 뜻을 찾으란 말인가, 하고 미친 사람처럼 소리만 질러 댔다.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아내의 무반응과 침묵은 도에 지나치게 항변하는그를 무안하게 했다. 그때는 명쾌하게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는 눈앞에 보이지 않는 신을 원망의 표적으로 삼음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징벌을 피하고 있었다. - P180

의로운 사람이 당하는 고통은 불의한 사람이 누리는 행복만큼 이해할 수 없는 문제이다. 인간은 질문한다. 이성이 대답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질문은 이성 너머, 신에게로 향한다. 신의 대답은 그러나 언제나 흡족하지 않다. 그 대답을 듣는 인간이 이성 너머를 사유할 수 없기 때문이고, 그 대답이 이성 너머를 사유할 수 없는 인간을 통해 전달되기 때문이다. 한정효의 아내는 신의 대답에 흡족하게 수긍하는매우 드문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녀가 이성 너머를 사유할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녀는 다만 인간이 이성 네머를 사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뿐이다. 그녀는 말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다른 일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겪는 고난 역시 우리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나님은 우리 이성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다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라고, 우리의 옳음을 주장하기 위해 하나님이 옳지 않다고 말하면 안 된다고, 알기 쉽고 다루기 쉽고 우리의 좁은 머리에 갇히는 하나님은하나님일 수 없다고,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라고, 그래서 믿는 거라고, 우리는 어떤 상황이든 왜냐고 묻지말고 네라고 대답해야 한다고. - P182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려면 위에 있는 것을 밟을 수밖에 없다고, 밟지 않고 오를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그는스스로를 합리화했다. - P193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어. 궁금한 것을 궁금해하지 않았던(않으려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 같은 심정이었거든. 불러내지는 죄책감, 감정의 혼란, 양심의 가책, 행동의 제약…… 그런 성가신 것들과 대면하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동기 말이야. 자신의 비겁함을 똑바로 대면하지 않을 때만 군인은 용감해질 수 있는 거지. 그러니까 용감한 군인이 되기 위해서는 비겁해야 하고, 비겁함을 의식하지 않아야 하는 거지. 나는 또 다시 비겁해지고 싶지 않았으므로 지금이야말로 비겁해져야 한다고 설득했어. 신념을 지키기 위해 신념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제넘은 충고를 다 했어. - P217

요약하면 이렇다. 처음에는 그녀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했지만 점차 찾아다니는 일 자체가 의미 있어졌다. 처음에는 그녀를 찾아내는 것이 그에게 내려진 계명과 같았지만 점차 그녀를 찾아다니는 것(찾아다닌다는 명분)이 그의 삶이 되었다. 계명일 때는 그 일을 이루는 데 자기 삶을 써야 했지만, 삶이 되자 그 일이 그의 삶을 누비는 재료가되었다. 그 미묘한, 그러나 현저한 차이를 후는 오랫동안 인식하지못했다. - P238

후는 원장의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틀리지 않은 말을하는 원장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다른 문제였다. 말의 내용은 옳지만 말하는 행동은 옳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 있다. 어떤 옳은 말은 말해지는 순간, 말해졌기 때문에 옳지 않은 것이된다. 어떤 옳은 말은 옳음을 유지하기 위해 말해지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만 말해지지 않으면 그 말이 옳다는 걸 이해할 길이 없기 때문에 그 말이 옳다는 걸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말을 하는, 옳지 않은 방법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옳지 않은 행동을 통해서만 옳음이 증명된다는 것,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옳지 않음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 옳지 않은 실천을 통해서만 그 옳음을 이해시킬수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누군가의 옳지 않은 실천이 옳은 말 때문에 용납되기도 하고 누군가의 옳은 말이 옳지 않은 실천 때문에 의심스러워지기도 한다. 후는 원장을 의심했다. 무엇보다 그녀가 그런 말을 하는 동기를 추측할 수 없었다. 후는 당신 말이 옳다고도 하지 않고 당신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도 하지 않았다. - P255

사람은 자기를 지배하는 사람이 누구보다 강하고 탁월하기를 원한다. 그다지 강하지 않은 상대에게부림을 받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지만 누구나 두려워하는사람에게 부림을 받는 것은 우쭐하고 자랑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운동 경기에서 자기를 이긴 상대가 모든 사람을 이기고 최강자가 되기를 바라는 심리와 무관하지 않다. 나를 이긴 상대가 누군가에게 지면 기분이 언짢아지는데 그것은 내가 충분히 강하지 않은 상대에게 졌다는 사실이 무참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이기는 것이 가장 좋지만, 그러지 못할 바에는 누구도 이길 수 없는 강한 자에게 지기를 바란다. 나를 지배하는 자가 나를 지배할 만큼 강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지배받지 않는 것이 제일 좋지만 (이것은 확실하지 않다. 지배할 조건을 갖추지 못했거나 그럴 만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한 사람이 누군가의 지배조차 받지 못할 때,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해서 아무도 그 사람을 지배하려고 선택하지 않을 때, 소외감을 느끼거나 불안정한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는 의견이 있다. 그렇다면 지배받지 않는 것이 제일 좋다고 단정해서 말하긴 어렵다. 그렇긴 해도, 어쨌든) 불가피하게 지배받아야 한다면, 나를 지배하는 자가 당당하고 강할수록, 심지어잔인할수록 나를 만족시킨다고 할 수 있다. 이 당당하고 강하고 잔인한 지배자가 아주 가끔 아주 작은 친밀감을 표시하거나 아주 사소한 친절을 베풀 때 우리는 황송하고 고마워서 어쩔 줄 몰라 한다.
지배 방법이 엄할수록 이 효과는 크게 나타난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이 황송함과 고마움은, 그의 친밀감과 친절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의 당당함과 강함, 심지어 잔인함을 향한 것이다. - P263

연희가 꿈 이야기를 하며 괴로움을 털어놓았을 때 후가 충격을 받은 것은 연희의 고통에 대한 새삼스러운 깨달음이나 공감 때문이 아니라(그것이 아주 없었다는 뜻은 아니지만) 자기의 은밀한 쾌락이 발각되고 통박되었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가 모르길 바랐고, 모를 줄 알았다. 심지어 그는 그 자신도모르길 바랐고, 모를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는 그의 쾌락을 똑바로 보게 했다. 그는 치욕과 충격의 구렁텅이로 떨어졌고 죄의식에 사로잡혔다. 쾌락은 그에게 죄였다. 그는 그녀를 볼 수 없었다. 그러니까어떤 의미에서 그는 연희에게 쫓겨난 것이 아니라 연희로부터 달아난 것이었다. - P301

그는 마침내,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어쩔 수 없다는 듯, 거듭되는 제안을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포즈를 취하며, 의지가 아니라 숙명이라는 식으로, 당연하고 불가피하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선택을했다. - P317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다."라는 여행기 저자의 문장이야말로 가장 정확한 진술이라는 생각이들었다. 그 생각은 다른 많은 생각들을 거느리고 떠올랐다. 정확한 내막을 알아낼 수 없는 일이 있고, 정확한 내막을 알아내는 것이 적절하지 않거나 무의미한 경우가 있고, 정확한 내막을 알아낼 수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이 있고,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다고 말해야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 있다. 그는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다고썼고, 그것은 어느 쪽인가의 진실을 대변할 것이다. 그러자 다시금강영호가 초소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그가 언급한 1970년대 초는 초소가 세워진 시기라는 데 생각이 미쳤고, 그러자 뜻밖에 그가 초소에 대해 아주 잘 알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초소에 대해 아주 잘 알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않았다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그것에 대해 아무 언급도 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그것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역설적인 증거일 수 있다는 생각이 뒤따랐다. - P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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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수염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1월
평점 :
절판


프랑스소설......
지루하지도않고 흥미진진하지도 않고...
이 세상이 원래 내가만든 착시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해본 사람이라면 가볍게 공감할 만한 소설. 아주 지독한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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