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는 곳으로 오늘의 젊은 작가 16
최진영 지음 / 민음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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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작가이기에 이런 진부한 소재도 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소설이 조금 만 더 길었으면, 전개가 더디 가더라도 좀 더 책의 감정을 가슴에 지고 있었을텐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내게 도둑질을 당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훔친 것은 티켓이나 돈이라기보다 목숨이다. 나는 이미 많은 이의 증오를 뒤집어썼다. - P19

사람들은 나를 보고 아빠를 닮았다고들 했다. 워낙 어렸을때부터 그런 말을 들어서 나는 내가 정말 아빠를 닮은 줄 알았다. 지금 생각은 다르다. 나는 아빠를 닮은 게 아니라 아빠를 닮았다는 말을 듣고 자랐을 뿐이다. 그 말이 나를 아빠처럼 만들었고. - P31

어느 밤 고백 성사라도 하듯 건지가 말했다. 학교에 가지않아도 되고, 아빠도 없고, 모두가 공평하게 불행한 지금이차라리 홀가분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고, 적어도 지금은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고. 만약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서 학교에 다닌다면 이젠 누구에게도 맞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그런 만약 같은 건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다고. - P37

건지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전에 본 적 없는 결연함, 꿈을꾼다는 것. 그 꿈을 나눈다는 것. 건지에게 꿈이란 전에 닿아본 적 없는 새것, 실패해 본 적 없어 재지 않고 있는 그대로 품을 수 있는 첫사랑 같은 것이었다. - P38

나는 그 모든 말이 무서웠다. 학교다닐 때 놈들은 나를 보고 ‘재수 없는 새끼‘라고 했다. 선생에게 혼나고 여자한테 차이고 용돈을 못 받고 반찬을 흘리고 선배가 갈구고 심지어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파리가 날아다니고 아무 이유 없이 짜증이 나도 나 때문이라고 했다. 모든 걸내 탓으로 돌리며 나를 때렸다. 내가 맞아야 하는 이유는 사방에 널려 있었다. 세상은 내가 재수 없는 새끼란 걸 증명하려고 존재했다. 아버지도 그랬다. 모든 게 내 탓이고 엄마 탓이라고 했다. 엄마와 내가 자기 인생을 망쳐 놓는다고, 현실은 반대였다. 아버지가 우리 가족을 망쳐 버렸다. 엄마가 죽고 모든불행을 홀로 감당하게 되자 아버지는 자살해 버렸다. - P70

단은 국경을 넘어 유럽으로 가길 원했다. 그곳에는 생존자를 위한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을 거라고, 그곳에서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내겐 그런 믿음이 천국을 주장하는 종교인의 설교와 다르지 않게 들렸다. - P85

국경을 넘나드는 사람처럼 시간 개념도 널뛰었다. 엊그제가 여름이었는데 벌써 연말이라거나, 추석 지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설날인가, 그렇게 놀라다 보면 어느새 1년이 지나있었다. 월급 들어오는 날짜를 기준으로 한 달을 가늠했다. 정해진 날짜가 되면 통장에서 돈이 우수수 빠져나갔다. 열심히 버는데도 늘 쪼들렸다. 중요한 일을 다음으로 미루거나 대충 처리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가족 여행, 가족사진, 생일 파티, 칭찬과 위로, 오늘은 어땠어? 키가 이만큼이나 컸네, 안아주고 사랑한다 말하는 것, 오늘을 기억하고 내일을 기대하는것,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 잘 자라고 말해 주는 것. - P89

분명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데, 최선이 답은 아니란 생각이 세금 고지서처럼 주기적으로 날아들었다. 삶이 마디마디 단절되어 흘렀다. 직장에서의 나와 아이들앞에서 나와 단을 대할 때의 나와 혼자 있을 때의 내가 징그러울 만큼 달랐다. 나라는 사람이 흐트러진 퍼즐 같았다. 애초의 내가 어땠는지 밑그림은 기억나지 않았고 퍼즐은 흩어진 채 여기저기 떠돌았다. 무언가 미세하게 어긋나고 있어서먼 훗날 완벽하게 분리될 것만 같았다. 나와 내가. 나와 단이. 나와 아이들이. - P90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언제부터 시작된 질문인지 모르겠다.
잘 살 수 있을까. 그 질문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대학 졸업하던 무렵이었다. 불분명한 내일이 두려웠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잘 될 거라는 긍정이 남아 있었다. - P93

한국에서 그런 일을 하면 무시당하기 십상이고 자기를 하찮게 대하는 사람들에게 화도 많이 나는데 외국에서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무시당하면 그냥 무시하게 된다고, 고생스러워도 우울하지 않고 마음속 당당함을 지킬 수 있다고, 외국에서는 자신의 젊음을 고스란히 느끼고 즐길 수 있는데 한국에만 들어오면 젊음이 짐스러워진다고 했다.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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