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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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 작가의 에세이를 보면 나름 성공루트를 밟아온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작가의 글은 왜이렇게 우울해 사람 기분을 심연으로 가라앉게 할까.
시적인 절망이 나를 끌어내렸다. 위로를 받으려 김애란의 글을 읽진 않는다. 그냥 가라앉는 배에서 바다를 등지고 기댄 것처럼, 내 뒤의 불행을 연민하고 내 앞의 불행을 가늠해 보며 바로 닥친 나의 불행도 실감해 보는 것.

소설은 내가 좋아하는 이기호작가의 말처럼 잔인하다. 잔인한 걸 알면서도 자꾸 중독되는게 이런 먹먹한 감정이 계속되면 마치 마라톤 선수의 러너스하이라도 가져다 줄 것이라 착각을 하는건지, 이런 비참함에 같이 서서 불행해지는 감정의 끝이 무엇일지 알기위해 계속해서 달려야겠다.

몇 해전, 추석 때였던가. 술에 취해 오토바이를 몰고 선산에 가다, 중심을 잃고 논두렁에 고꾸라져버렸을 때 —— 작열하는 가을별 아래, 자신을 일제히 내려다보던 친척들의 얼굴을 용대는기억한다. 형의 곤혹, 형수의 경멸, 조카의 무시, 사촌들의냉소, 햇살을 등진 구경꾼들의 눈부신 멸시. - P135

그러니 혈혈단신 상경한 그가, 사람들의 포기와 실망에 익숙해진 그가, 도시의 속도에 여전히 어리둥절해하는 철딱서니 없는 노총각이, 눈 깊은 조선족 여자의 친절에 홀딱 빠져버린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 P137

택시 경력 5년이 넘는 용대는 서울의 괜찮은 식당을 속속들이 알았다. 처음에는 유명해지고 다음에는 천박해져버리는음식점이 아니라, 허름하고 보잘것없지만 맛 하나만은 단정한 그런 집들을 말이다. - P139

도시 곳곳에는 한쪽 손을 번쩍 들어 택시를 잡은 뒤, 술에 취해 아름답고 어그러진 말들을 차비처럼 내려놓고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때론 두서없고 엉뚱한, 어느 때는 철렁하고 알 수 없는 말들을 반짝이는 동전처럼 흘리고 가는 이들이.
......
물론 용대는 알고 있었다. 택시 안에서는 기사도, 손님도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교육받으러 온 사람의 30퍼센트가 한 달 안에 그만두고, 2, 3개월이 되면 절반 이상이 그만두고, 6개월 후에는 한두 사람밖에 안 남는 회사에서, 같은 기사들끼리도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
자기 위치가 초라할수록 풍선처럼 커다랗게 허풍을 떤다는 걸 말이다. - P144

처음에는 안도가 그다음엔 욕심이 찾아왔다. 정착의 느낌을 재생반복하기 위해 자꾸 이것저것을 사들이고 집을 꾸미기 시작했다. 월급날에 대한 확신과 기대는 조금 더 예쁜 것, 조금 더 세련된 것, 조금 더 안전한 것에 대한 관심을 부추겼다. 그러니까 딱 한 뼘만…… 9센티미터 만큼이라도 삶의 질이 향상되길 바랐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 많은 물건 중 내게 딱 맞는 한 뼘‘은 없었다는 거다. 모든 건 늘 반 뼘 모자라거나 한 뼘 초과됐다. 본디 이 세계의 가격은 욕망의 크기와 딱 맞게 매겨지지 않았다는 듯. 아직 젊고, 벌날이 많다는 근거 없는 낙관으로 나는 늘 한 뼘 더 초과되는쪽을 택했다. 그리고 그럴 자격이 있다 생각했다. - P214

은지가 조그맣게 끄덕인 건 이제 그들도 더 이상 어리다고 할수만은 없는 나이가 되어서였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어둑한술집에 죽치고 앉아, 줄담배를 피우며 지적이고 허세 어린 농담을 주고받다 봄 세상이 조금 만만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어느 날 자리에서 눈을 떠보니 시시한 인간이 돼 있던 거다.
아무것도 되지 않은 채.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이 이상이될 수 없을 거란 불안을 안고, 아울러 은지와 서윤은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가진 것 중 가장 빛나는 것을 이제막 잃어버리게 될 참이라는 것을. - P251

하지만 은지는 언제나 그래 온 것처럼 인생을 굴러가게 만드는 건 근심이 아니라 배짱임을 믿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두려움을 깔보는 거라고, 실은 본인도 믿지 않는 주문을 외워가며 말이다. 서윤의 경우,
두려움을 이기는 제일 좋은 방식은 두려움을 경험하는 거라여기는 편이었다. 아니, 그보단 아예 두려움 근처에 가까이가지 않는 편이 상책이라고, 진짜 공포는 그렇게 쉽게 감당할수 있는 게 아니라며 말이다. 사실 서윤이 품고 있는 근원적인 두려움 중 하나는 가난이었다. 서윤은 오랫동안 그것이 제삶 가까이 오지 못하게 흡사 파리 떼를 쫓는 사람처럼 두 팔을 휘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혹 그게 누군가에게는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할지라도, 당장 하지 않으면 안 되고, 할 수 있는 일들을 했다. - P254

"힘든 건 불행이 아니라……… 행복을 기다리는 게 지겨운거였어." - P277

다만 언제였더라. 현대문학 스터디 때 서윤이 "교수님들세대는 가난이 미담처럼 다뤄지는데 우리한테는 비밀과 수치가 돼버린 것 같아" 라고 웅얼대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은지는 그동안 서윤과의 감정도 풀 겸 먼저 이런저런 얘기를 꺼냈다. - P281

그런데 언니, 요즘 저는 하얗게 된 얼굴로 새벽부터 밤까지 학원가를 오가는 아이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해요..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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