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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
한정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2월
평점 :
<쥴리아나 도쿄>를 읽고 한정현의 소설을 눈여겨 보게 되었고, <소녀 연예인 이보나>를 보며 작가가 왜 이렇게 됐지 싶다가 <마고>를 통해 아주 큰 실망을 하고 결국 산 책이기 때문에 읽어 본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까지, 정말 한정현의 책은 더 이상이 궁금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반드시 피해야 할 책이 되었다.
한정현의 이분법적인 성대결이야말로 진정한 폭력이다. 성폭행만 폭력인가. 세상의 모든 여성들이 성폭력에 쉽게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강간을 위해 태어나는 존재는 아니다. ‘이상하게 여성들은 변화된 점이 꽤나 있는 것도 같은데 남성들은 확실히 변화하는 면이 적은 것 같고요’(376p.) 같은 편견도 서슴없이 드러내는 이 소설에서는 지연, 도영, 춘희, 의선은 물론 설영의 할머니는 공장에서 관리자에게 강간을 당하고 심지어 사격장 강사인 메이까지 선수촌에서 성폭행을 당하고 나온 사람이다.
당하고만 사는 사람들은 순결하다는 논리.
이걸 근거삼아 아주 고약한 행패를 부린다.
여성과 퀴어를 어떻게 해서든 불행으로 몰아가는 것이 한정현의 주특기이며, 세상의 모든 불행이라면 개연성 따위는 무시하고 억지로 여성의 삶에 가져와 배치해 버려야 만족하는 작가이니, 이제 이 정도 고집이 과연 여성의 아픔을 치유하는데 보탬이 되려는 것인지, 남성들의 성인지 감수성을 함양하는 데 도움이 되려는 것인지 스스로 의심해 봐야 하지 않을까.
불행만큼 한정현이 또 하나 집착하는 것이 추리소설 흉내 내기이다. 억지스러운 설정과 개연성 없는 불행에 추리소설까지 따라해 보려고 사건을 역순으로 구성해 버렸는데, 아쉽게도 추리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전개가 없다. 궁금증을 유발해서 사건의 전말을 알고 싶게 해야 하는데, 시간 순서만 꼬아놔서 독자를 혼란하게 하는 것 말고는 잘한 게 아무것도 없다.
알라딘에 중고로 1200원에 팔 수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은 솔직한 게 좋다고 하면서도 정작 솔직한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솔직하게 산다는 건 친구들의 말처럼 무언가를 가졌을 때에야 가능하니 어려운 일이긴 했다. - P11
정확히 말하자면 돈에서 오는 안정감을 갖고 싶었다. - P33
비록 누군가에게 말하진 않았어도 자신이 신바에게 불만을 그렇게 쉽게 가질 수 있었던 건 어쩌면신바가 자신보다 약자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과연 신바가 정교수에 헤테로 남성이라면 자신이 과연 곧장 그런 불만을 행동으로 드러낼 수 있었을까 설영은 스스로에게 궁금했다. - P56
그런데 말이에요, 그 산 위에서조차 약한 사람들은 그렇게 늘 아무렇게나 건드려도 된다는 식의 취급을 당했어요 - P74
신바는 확실히 일상 전시 자아와 본연의 자아가 따로 있는 사람이었다. - P79
"세츠에 상, 저는 일본에 환상을 가진 사람들이 싫어요. 외적으로 잔잔하고 평온한 사람들이 얼마나 잔인한 일을저질렀는지……… 물론 좋은 사람 많지요. 그런데 저는 가끔은… 평온할 수 있는 사람들이 갖는 면죄부 같은 게 아닌가 싶게 느껴집니다, 이 나라에서요. 그러니까, 그저 누군가의 몹쓸 짓을 못 본 척하는 데 그 평온함을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 말이에요. " - P82
뭔가 보수적인 것을 넘어서는 답답함에대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대구라는 지명을 가져오곤 했는데 그 역시 어딘지 혐오인 줄 모르는 혐오 같은 느낌이었다. 설영은 이날 자신이 이야기에서 겉돌고 있다고 느꼈다. - P93
설영은 남자가 사용한 그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피해자들끼리 서로 물어뜯게 하는 것, 권력의 최상위층이 가장 잘하는 방식이었다. 자신들은 조금도 나서지 않은 채약한 자들끼리 치고받게 해서 결국 한쪽은 죽고 한쪽은 자신에게 영원히 종속되게 만드는 가스라이팅, - P134
사람들은 자신이 혐오하는 대상을 혐오하는 존재에게 뒤집어씌운다. - P169
"연정아, 우리 업계가 그런 말을 하잖아. 성형은 원본이없어지는 거라고. 그래서 더 예민한 거라고. 근데 나는 자주생각했어. 아니, 요즘 더 자주 생각하게 됐어. 원본이라는게 사람들에게 대체 뭘까, 하고." - P182
그들은 여자들을 마릴린 먼로에 비교하면서 여자들조차 마릴린 먼로를 비난하게 만들었다. 권력자가 만들어낸, 권력 없는 사람들끼리 물어뜯는 구조, 연정이 느끼기엔 그랬다. - P184
상담실장의 어머니는 부도가 난 병원의 시술 기계를 중고로 빼돌리는 업자에게서 넘겨받아 무허가 시술을 한 셈이었다. 하지만 단속에 걸렸을 때 그 업자가 한 말은 이거였다. "나는 반성 안 해. 얼굴 뜯어고치려고 한 여자들인데, 이게 무슨 죽을병 걸린 사람을 내가 속인 거야? 어디 사람죽었어?" 마음을 죽였겠죠, 연정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외모와 정신이 분리되어 있다는 건, 적어도 성형외과의로서는합의해주기가 힘든 말이었다. - P253
하지만 어느 날 신문에 씌어져 있던 ‘성괴‘라는 단어를 보면서 연정은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연정이 보기에여성들의 외모에 신경 쓰는 건 오히려 남성들 같았다. 텔레비전 예능에서 범죄를 저지르려던 사람이 여자의 얼굴을보고 도망친다는 말도 안 되는 개그를 웃어넘길 수 없던 것도 그 이유였다. - P260
"네, 그런데 다시 만난 윤설영 씨는……… 서로 사랑했던, 그리고 이지연 씨가 너무 괴로워했던 마지막 8개월의 기억이 없는 채였어요. 아무리 좋은 의도라지만 굳이 그 아픈기억을 말해줘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는 거예요.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게 가끔은 얼마나 힘든지 잘 아니까요." - P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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