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상황과 이야기 - 에세이와 회고록, 자전적 글쓰기에 관하여
비비언 고닉 지음, 이영아 옮김 / 마농지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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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사람들의 고민들. 글을 읽는 사람들도 한 번쯤 읽어볼 만하다. 글을 쓰는 일은 시간이 지나가는 것마냥 술술 흘러가는 것이 아니니까.

오로지 고인이 된 의사를 추도하려는 목적으로 소환되었지만, 살아 움직이는 존재로서의 자신에 대한 관심 또 한 잃지 않는 자아_바로 여기가 기발한 지점이었다. - P8

작가의 민낯이라는 원료로 만들어지는 서술자는 이야기에 꼭 필요한 존재이다. - P8

사회적 책임과 예술적 책임을 혼동하여 예술적 진리를 저항과 정치적 선전으로 왜곡하고 있다고 비판 - P9

복잡한 감정. 먼저, 그런 감정이 있음을 이해한다. 다음엔, 그 감정을 시인한다. 그리고 이를 통로 삼아 경험으 로 들어간다. 그러고 나면 그 감정이 곧 경험임을 깨닫는다. 이제 그는 쓰기 시작한다. - P9

출세욕의 병적인 성질 - P12

이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서는 적절한 어조의 목소리를 찾아야 했다. 징징거리고, 짜증스럽고, 닦아세우는 목소리로는, 특히 닦아세우는 평소의 목소리로는 부족할 터였다. 그리고 문장 구조의 문제가 있었다. 내가 일 상적으로 사용하는 문장 파편적이고, 불쑥 끼어들고, 뒤엎는 문장 역시 먹히지 않을 테니 바꾸고, 조절하 고, 억눌러야 했다. 그러고 나서 글을 쓰기 시작하자마자, 이야기가 숨통을 열고 스스로 나아가게 하려면 이 사람들과 사건들에서 멀찍이 물러나야 한다는 걸 알았다. 간단히 말해, 내 이야기에 더 자유로운 연상을 허용 해줄 유용한 관점이 필요했다. 내가 오랫동안 보지 못하고 놓쳤던 점은, 나인 동시에 내가 아닌 서술자에게서 만 이런 관점이 나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 P16

독자들은 유기적인 완전체로서의 서술자를 믿음직하게 여긴다. 우리와 여정을 함께하고, 글을 완성시키고, 우 리의 시야를 전보다 넓혀주리라 믿을 수 있는 서술자. - P17

작가가한 조각의 경험을 구조화하기 위해 자신의 불안하고 지루한 자아에서 뽑아내는 서술자 - P18

이 글들은 에세이와 가장 깊은 차원의 관계를 맺은 작가들의 작품이다. 에세이라는 형식 자체 덕분에 작가의 깊숙한 내면으로 과감히 파고들었다. 이 글들은 구색 맞추기 식으로 설명을 이어가거나, 사유와는 무관한 이 미지들을 전개하거나, 서정적인 사색에 빠지거나 하며 지면 위를 방황하지 않는다. - P20

인생이란 ..... 점들의 문제가 아니라 흐름의 문제임을 알고 있었다. 중요한 건 흐름이다 - P21

소설에서는 등장인물들이 모든 일을 떠맡는다. 누군가는 작가의 의향을, 누군가는 반대편의 생각을 전한다.
즉 누군가는 자아의 생각을, 누군가는 대치하는 타자의 생각을 대변한다. 그들 모두에게 발언권을 줌으로써 작가는 역동성을 얻는다. 논픽션 작가는 협업할 사람이 오로지 자기밖에 없다. 그러므로 작가가 움직임을 만 들어내고 역동성을 얻기 위해 찾고 구해야 할 것은 자기 안의 타자이다. 결국, 서술자가 고백이 아닌 이런 종 류의 자기 연구, 즉 움직임과 목적과 극적 긴장을 안겨줄 자기 연구에 몰두할 때 비로소 작품이 구축된다. 여 기서 필요한 요소는 적나라한 자기 폭로이다. 자신이 상황에 일조한 부분 즉 자신의 두려움이나 비겁함이나 자기기만_을 이해해야 역동성이 만들어진다. - P22

이 에세이는 한 작가가자신의 지혜를 전하기 위해 위기감을 극복해내는 모습을 지켜보는 데 의미와 가치가 있다. 크루스는 서서히 인생에서도 그랬듯-그 지혜에 닿을 수 있었다. 에세이를 거울삼아, 인정하기 두렵고 창피한 일을 마주하는 어려움을 비춤으로써 서서히 더 깊은 통찰로 우리를 이끈다. 그러니까, 누구나 자기 이 해에 도달하기를 꺼린다는 진실 말이다. - P28

미혼이었을 때 나는 결혼을 익사와 동의어로 생각했다. 내 정체성이 사라지고, 사생활을 침범당하고, 내 자야 는 물속으로 가라앉아 버리리라 생각했다. 결혼 후 내 생각이 옳았음을 알았다. 내가 물속에서도 이렇게 잘 살 수 있으리라는 걸 미처 몰랐을 뿐. - P40

우리는 결혼 생활을 더 좋게 만들 수 없고, 그저 극복해낸다. - P40

원하는 것을 위해 옳지 못한 일을 하기로 동의하는 것을 파우스트적 거래라고 한다 - P68

일생의 막바지에 이르면 자기 자신보다 남들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지켜보는 법은 터득하지만, 외로움에 맞서 싸우느라 정작 자기 자신은 지켜보지 않는다. 책을 읽거나 카드를 섞거나 개 를 돌보며 자신을 회피한다. - P76

토머스 핀천Thomas Pynchon, 리처드 파워스Richard Powers, 돈 드릴로Don DeLillo 같은 동시대 소설 가들이 언어에 도취하여 원대하게 수행하고 있는 신화적 추상화 작업으로부터 문학이 허용하는 한 멀찍이 떨 어진 채 서술하는 자아로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럼에도 비평가들은 우리의 유일무이한 삶을 느끼게 하는 힘, 요즘 소설가들은 거의 가지지 못한 이런 힘이 회고록 작가 진실을 말하는 논픽션 서술자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 하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회고록 작가들은 우리 모두가 처한 상황으로 들어와, 우 리가 지금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 P84

여느 평범한 독자라면 누구나 그러하듯, 작품에 접근하는 것은 어떻게 쓰느냐가 아니라 왜 쓰고 있느냐를 아 는 일이었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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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0
오라시오 키로가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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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광기다…

하지만 자기 몸으로 낳은 짐승 같은 자식 넷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사라지자, 부부는 그 모든 운명을 남의 맛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태도는 열등한 존재의 고유한 특성이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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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오색 찬란 실패담 - 만사에 고장이 잦은 뚝딱이의 정신 수양록
정지음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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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광기를 응원했는데, 작가도 나이가 들어 조금 온순해진 것 같다.

사람은 너무나 복잡하여, 죄책감에 짓눌리면서도 그 익숙한 고통에서 안도를 느낄 수 있는 존재였다. - P18

구질구질한 일상이나마 지속하다 보면, 문득 과거의 수치가 미래를 수호하는 방패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 P22

그들은 나 말고도 거의 모든 한국 여자를 미친 사람 취급하고 있었지만, 모든 문장에 논리가 없었다. - P22

나쁜 사람들을 불쌍하단 이유로 용서하게 될까 봐서였다. - P23

그때 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들이, 생각보다 진중하거나 무거운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도덕, 철 학, 법, 사랑, 다정 :.... 심지어 돈까지도 몇 시간의 단잠보다 가벼웠다. - P30

언젠가 내 묘비명에도 누군가를 채찍질하는 말보다는 다독이는 말을 적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 P34

실패에 대한 공포로 더 큰 실패에 직면한 처지인 내가 초라하고 우습다. 그런데 내 꼴이 이렇게 우스워진 이유 는 먼저 삶을 우습게 보았기 때문이다." - P39

어쩌면 원래 인생에는 대책이란 것이 아예 없을지도 몰랐다. 없는 대책을 강구하니까 힘든 건 아닐까? 내가 알 기로, 없는 걸 자꾸 내놓으라고 우기는 사람은 깡패였다. 깡패가 되려는 게 아니라면 없는 건 없는 줄로 알고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했다. - P39

그때 나는 무언가를 원하는 마음에서 해방되는 가장 쉬운 방식이 포기임을 배웠다. 어느 시점부터는 결혼이나 내 집 마련, 고급 승용차에 대한 미련도 놓아버렸다. - P50

그러나 나는, 체제의 봉괴를 인정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우리 개개인의 삶은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봉 괴한 것은 체제니까, 개인의 삶이 회복되리란 가능성을 믿어야 지속될 수 있을 것 같다 - P52

친구는 내게 패배주의가 몸에 배어 정신 승리의 영역으로 가버렸다며 혀를 찼지만 사실 그조차도 별 상관없다. - P57

그는 술도 못 마시는 주제에 거짓된 주량으로 허세를 부리는 참된 진상이었다. - P64

그제야 통제 없는 자유는 감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짜 감옥에는 석방이라는 개념이나마 있을 테지만, 울타리가 없는 시간의 감옥에선 안과 밖의 경계가 모호했다. 자유를 쟁취했다 생각했지만 실은 무방비한 자유 가 나를 잡아먹고 있었다. - P68

그들은 분명 나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인격적 결함을 옳고 그르다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어쩌 면 그들 또한 부적절한 양육 환경의 피해자일지도 몰랐다. - P76

지음아, 아빠는 네가 행복하다면 맨날 산에서 도토리를 줍고 놀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네가 맨날 산 에서 도토리나 줍고 놀아도 괜찮기 위해서는, 일단 돈이 많아야 한단다. - P79

또래 찬규둘울 예로 들자면, 보통 둘 중 한 가지 태도를 보인다. 나이듦을 경멸하거나, 두려워하거나. - P85

누군가는 하다못해 사소한 유머까지 검열하며 살아야 하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유머는 바로 그 사소 함 때문에 힘이 세다.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일을 일회성 웃음의 소재로 삼으면, 어느 순간부터는 문제의식을 갖는 것 자체가 우스워진다. 사안의 본질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한 시대를 풍미하는 유머에는 웃음 이상의 힘 이 담기기에, 오히려 유머에 대한 성찰과 자중이 필요하다. - P86

내게 독서란 인간을 배제하는 방식 중에선 가장 인간적인 위로였다. - P97

때로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관계에 대한 이해로 자연스럽게 확장되기도 한다. 내 주변의 온갖 성인들 또한 나 와 같다는 것을 생각하면, 미움과 증오가 단번에 애처로움으로 변하는 순간이 생기기 때문이다. - P99

의외로 누군가와 잘 지내는 데에 꼭 진심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인간관계를 지명하는 요소는 그보다 단순하고 명료했다. 관계와 상황에 맞는 예의, 약간의 미소 정도면 누구와도 충분했다. 이것은 거짓이라기보다 또 다른 차원의 진심이었다. 단지 나에겐 상대에게 진심을 내보이고 싶지 않다는 의사가 최상위의 진심이라 그렇다. - P101

잠시 정신이 명료해질 때면 ‘지나친 쾌락 추구는 결국 자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이 너무 옳아 슬프다는 이유로 다시 술에 손을 대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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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내가 죽으면 장례식에 누가 와줄까 (개정판)
김상현 지음 / 필름(Feelm)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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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시대 최악의 정신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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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오렌지와 빵칼
청예 지음 / 허블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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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과 욕구를 억압하며 살아가는 영아가 의문의 뇌 시술을 통해 욕망을 분출하며 자유를 찾지만 통제가 되지 않는다. 시술은 자신이 청혼을 거절한 남자친구 수원과 막돼먹은 어린이집 원생의 약간 독특한 정신세계를 가진 엄마에게 권유를 받았는데, 그 둘 모두 시술을 경험한 자들이었다. 영아는 시술 덕에 본인은 모순으로 가득차 있고 영아에게 의식적 선택을 강요하면서도 올바른 삶을 사는 줄 아는 착각과 허영에 가득찬 친구 은주에게 통쾌한 복수를 날린다. 한편 영아에게 시술을 권유했던 그 둘은 호주에서 만나 불륜을 저지른 사이였고, 그 사이에 태어난 아이가 영아의 어린이집 골칫거리였던 바로 그 원생이었다는 걸 알게된다. 영아는 남자친구에게 사실을 확인하고 빵칼로 남자친구의 목을 그어 버리려 하지만 무딘 빵칼은 남자친구의 목에 자국만 남길 뿐이었고, 남자친구는 해방된 영아를 바라본다.

전달하려는 메세지가 노골적이긴 하지만 유쾌하고 통렬해 적극 추천하고 싶다. 억압받고 사는 주변의 모든 이에게.

자유가 우릴 추하게 만든다. - P6

기사, 동참, 이모티콘. 컵라면보다 빠르게 해결 가능한 이 선의를 창조해 낸 것은 어쩌면 나의 마음이 아니라 네이버페이 시스템일지도 모른다. - P8

눈 감고 휴대전화를 덮으면 닿지 않을 타인의 불행에까지 도움을 주려 하는 여자를 어찌 피로하게 여긴다는 말이지? 어떻게 그런 괘씸한 생각이 가능하지? 근데 왜 나는 그 불순한 마음을 자꾸만 혀로 할짝대는 것이지? - P10

오늘보다 내일이 나아진다는 믿음으로 우리는 살아간다. 하지만 제법 많은 인간이 과거를 동경하게끔 설계되 었다는 걸 은주와 수원은 알고 있을까. - P10

우리는 폐지와 트로피 사이에서도 중용을 찾기보다는 둘 중 하나만을 치열하게 욕망하며 살아간다.
나는 더이상 불행한 쪽으로 치우치고 싶지 않았다. - P10

어설픈 위로는 안 받느니만 못하지만 살다 보면 필요없는 일들을 서로 용인해야 할 때가 있다. 나 또한 원장과 동일한 표정으로, 덩 빈 감정을 나눠주었다. 돌아서면 금방 휘발될 이 웃음은 너무 가벼웠다. - P17

하지만 지나치게 비싼 게 패착이었다. SNS 계정이라도 만들어 홍보해 보라고 조언할까 싶었지만, 서울과 가 까운 신도시라는 특징이 전부인 하나동까지 빵을 먹으러 올 소비자는 없겠지. 점입가경으로, 여자는 손님들어 게 살갑지 않았으며 갈수록 불친절하게 굴었다. 결국 나루터는 파리들의 비행 코스로 전락했다. - P20

얼마 전에 나루터 취재 차 방문했거든요. 하나동에 몇 없는 친환경 베이커리를 신문에 담고 싶다면서요. 기사 는 멋지게 실어줬지만 정작 입에 넣을 걸 고를 때에는 자기가 쓴 글보다 통장 잔고를 우선시한 사람이죠. 일할 때는 거짓말을 해도 퇴근하면 정직해지는 겁니다." - P20

"혼자서 입안에 저질 재료를 넣는 회생은 감수해도, 남들에게 도둑질로 비난받는 일은 절대로 감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산다는 거예요. 똑똑한 사람들은 겁이 많거든요."

"그건 그냥 도덕적이라는 뜻 아닌가요?"

"겁이 있어야 도덕을 지키죠." - P21

고맙다는 말만큼 무고한 거짓이 또 있을까. - P24

그러나 은주는 주장했다. 창작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는 예술의 창의성을 호도하는 일이니 작가는 영구적 으로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11년 전의 죄를 광장에 효시하여 죽을 때까지 대대손손 온 사람들이 보게 만들어 붓을 다시 들지 못하게끔 해야 하는데 감히 그림을 포기하지 않고 돈까지 버니 얼마나 괘씸한가? 이렇듯 은주 의 주장에는 명백한 근거가 존재했고, 그래서 거침이 없었다. - P25

얕은 안쓰러움 속에는 영악한 흥미가 숨어 있었다. - P27

양극단 사이, 나의 세계에는 두 영역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 같은 흐릿한 요소들이 선명한 것들보다 더 많았다. 반면에 은주는 세상을 보다 명쾌한 시야로 인식하기에 오직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만 존재하기를 바랐다. 그녀는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는, 혹은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어떠한 분류가 자기 세상에 머물 권리를 박탈시켰다. - P28

아무리 봐도 입방체로 존재하는 타인이 스스로가 다면체 생물임을 표현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을 때. - P28

25마트도 같은 맥락이었다. 돈은 없지만 다양한 식자재를 구입하고 싶다는 사람들의 소박한 욕망은 비난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바닥에 눌어붙은 통장 잔고를 위해 그들이 열심히 지켜온 갖가지 선택지들이 병렬로 연결되고, ‘25마트 상품‘ 이라는 저질 제품으로 수렴하는 순간 최종적으로는 ‘무책임한 선택‘만 남는다. - P32

내가 왜 이 남자를 만났을까. 그가 착해서였다. 착한 사람을 거절하는 건 나쁜 자의 몫이고 손가락질받는 일이 니까. 그럼 왜 5년이나 견딘 걸까. 오래된 연인은 존재만으로도 나의 안정적인 인간관계를 증명하는 수단이 됐다. 이 남자가 나를 사랑하는 동안 나는 이 남자를 도구로 이용했을지도 모른다. - P36

여자의 가게는 오늘도 손님이 없었다. 여자의 얼굴에는 마땅히 있어야 할 어둠도 없었다. 이 여자에게도 뭔가 가 결여됐다. 혹은 넘쳤거나. - P49

타인의 괴로운 삶을 관음하는 건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 P52

고역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삶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의 삶은 그것들과 완전히 동떨어져 안전하다는 기쁨이, 내 삶은 구질구질한 자들보다 곱절은 더 찬란하다는 안도가, 더러운 것들을 발로 짓뭉갤 때 느껴지는 짜릿함 이 폭죽처럼 터졌다. - P52

Schadenfreude. 남의 불행을 보면서 느끼는 행복.

샤덴 프로이데+는 새로운 기쁨이었다. 그들의 불행에 나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으니 일말의 책임 또한 없 었다. 그러니 그들의 불행은, 내게도 내 몫의 자유가 있다는 증명이었다. - P52

성인 인증과 실명 인증, 갖가지 인증의 망을 뚫고 나서야 남에게 인정받지 못한 쾌락에 젖어 사는 신세계인의 대열이 보였다. 그들은 방광의 숙명을 받아들인 유목민처럼 양지의 검열을 피하며 끊임없이 중심지를 옮겨 다 냈다. 이들은 뿌리가 없었기에 어떤 이방인도 배척하지 않았다. IP를 감춘 나를 동족으로 맞이했고, 인간이 상 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자료들을 선물로 보여주었다.
그 모든 자료에는 죽음을 폭력으로 재현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추악한 쾌락은 오래전부터 이 땅에 존재했던 것이다. - P55

타성에 젖은 눈으로 할인율과 원 플러스 원을 탐색하는 그들의 식탁은 저급하고 불량한 먹거리로 채워질 테지 만 통장 잔고만큼은 절약의 가호를 받아 성실히 자라겠지. 살뜰히 저축한 돈이 미래에 드높은 아파트 요람으 로 다시 태어나리라. 콘크리트빛 성취를 위해 그들은 기꺼이 현재의 이로움을 포기했다.
그렇다면 과거, 정의감에 도취하고자 도덕적 소비를 한 나의 마음이 오히려 쾌락과 가까웠던 것일까.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정신적 만족만을 위해 선택한 것들은 단발성 기쁨이었을 뿐, 미래의 연속적 행복을 스스로 박 탈하는 어리석음이었나. - P56

세계를 위한 일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의 지조는 공공의 것이었다. 반면 내 팔뚝을 스치며 지나가는 저 무 수한 개미 떼의 행복은 지극히 사적이었다. 자본주의 사회가 독려하는 능동적 소비의 정점은 저들의 살 자체 였다.
25마트에 들어찬 소비사회의 먼지들을 보라.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 소비한 높은 확률로 죄악이 됨에도 저들 이야말로 먼 미래의 승자고, 나보다 잘살 인간들이었다. 정신적 쾌락이 우월하다는 믿음에 따라 움직인 나의 미래란 수원과 결혼하여 구질구질한 삶을 사는 것이고
공공을 위하는 만족, 그것이 희생시키는 사적인 행복이야말로 도덕이라는 쾌락이 가진 양면이었다. - P56

평등 안에 불평등이 숨어 있다*는 조지 오웰의 함의는 틀리지 않았다. - P57

네가 환경오염에 계속 일조한다면 이제 눌러줄 수 없어. 조회 수도 안 올려줄 거야. 난 너를 위해서 얼마든지 유치해질 수 있어. - P58

그래서 나는 쉬운 선택지를 택했다. 관계가 불편해지는 것보다 일상에 모순을 더하는 일이 쉬웠다.
같은 정당이라면 아무리 멍청한 소리를 해도 지지하는 정치인을 머저리다 욕할 필요가 없다. 친구가 장사하 면, 아무리 바보 같은 물건이라도 좋다고 홍보해 주는 사람을 거짓말쟁이다 욕한 필요도 없다. 사람은 다 그렇 게 살고 있다. 사람다움의 본질은 때때로 얄팍하다.
하지만 사과 씨를 심은 곳에서 오렌지 나무가 자라면 그것만큼 황당한 일이 없듯이, 기대로 쌓은 관계가 틀어질 때, 그때는 괘씸함에 배신감까지 추가되어 되돌릴 수 없는 적이 태어난다. 멍청한 소리까지 지지해 줬던 동료 정치인이 돌아설 때 가장 큰 적이 되고, 바보 같은 물건을 홍보해 줬던 친구가 돌아서면 가장 곤란한 민원인이 되는 것처럼. 나 또한 은주에게 그런 적이 되어주기로 했다. - P59

미치지 않았고 정신이 명징했지만, 모두가 나를 미친 여자로 정의할 가능성이 컸다. - P62

은주는 아직 몰랐다. 사랑만 봐서는 사랑을 모른다는 점을. 진정으로 사랑을 논하고 싶다면 은주는 지금 여기 에 있는 나를 조금이라도 더 봐야 마땅했다. 구정물이 존재해야만 호숫물이 맑다는 걸 알게 되듯 혐오가 이 세 상에서 맡은 역할은 절대 소멸하지 않는다. 그녀의 사랑은 더러운 것들을 비난하면서 완성되니까. - P64

통제와 해방은 짝꿍이라 함께 있을 때 더 빛나거든요. 뭐든지 균형이 존재해야만 극단으로도 치달아 볼 수도 있지요. - P75

여자는 완벽한 균형을 완성했다. 선함과 악함을 동시에 전시하여 어느 쪽으로도 인생을 내던지지 않았다. 배 먹과 도덕의 중앙에서 줄타기하는 인간은 흔치 않은데, 스스로를 통제하고 동시에 해방을 누린다는 이율배반 적인 상태를 완성했다. 그건 아무도 모르는 자유의 왕국이었다. 정문과 후문이 하나의 원통처럼 이어져 있어 입구와 출구가 불분명하나, 따지고 보면 입출구를 나눌 필요가 애초부터 없었다. - P76

때로는 억압이 존엄을 지킨다.
기압에 의해 몸의 형태를 유지하는 지상의 모든 생명체들처럼.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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