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제1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멜라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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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간 젊은작가상 작품집이 계속 실망스러웠는데 올해는 모든 작품이 다 인상적이고 재밌었다. 오히려 대상 작품이 좀 실망이었는데, 4년 동안 출판사에서 밀어주는 것에 피로를 느끼는지, 퀴어 작가가 대범하게 성적 코드를 드러내는 방식이 좀 질린 건지, 하여간 아쉬웠다.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외국인 노동자가 안전불감증 작업장에서 사망한 충격으로 회사를 그만둔 주호와 서로를 괴롭히는 반 아이들에게 멸망해 가는 지구를 걱정하며 환경 문제를 환기시키려다 오해를 산 희주는 수영 기초 초급반에서 만난다. 그들은 정말 열심히 연습하지만 기초 수준 이하의 실력 때문에 수업의 진행을 방해하다 어느 날 강사의 짜증과 욕설이 섞인 고성 폭격을 받는다. 아무 악의 없이 수영장을 나서다 강사를 걱정하는 주호를 보며 회원들은 단체로 나와 강사교체를 비롯해 그동안 쌓였던 불만을 토해내며 결국 수영장을 개선한다. 노동문제, 환경문제를 대하는 주호와 희주의 태도는 강경하지 않다. 격하게 분노하는 계약직 강사에게도 불안정한 신분이라는 사정이 있었다며 그를 염려한다.

<보편교양>
치열한 입시경쟁 속에서 고등학교 교사 곽은 인문학 수업을 준비한다. 보편적인 교양 수업을 목표로 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수업시간을 채우기 위해 선택했을 뿐 아무도 관심이 없는 중에 특권층의 자녀이자 모범생 은재만 수업을 따라온다. 마르크스의 책으로 교육을 하지만 곽도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어보지 못했다. 게다가 은재 학부모로부터 정치 편향적인 서적을 가르친다는 민원을 받아 난처해 지는데, 은재의 입시 컨설턴트의 도움을 받아 마르크스 교육의 정당성을 입증받아 난관을 극복한다. 은재는 서울대에 진학하고 곽은 공로를 인정받아 다음 학기에도 인문학 수업이 연장된다. 곽이 추구했던 보편적인 교양의 본 취지와는 무색하지만 곽은 결과에 만족하는 듯 보인다.

<파주>
어느 날 윤정은 남자친구 정호에게 군대후임 현철이 찾아와 정호가 군대에서 가혹행위를 일삼았다는 것을 알게된다. 현철은 가혹행위에 대한 증거자료를 제시하며, 일년 동안 매달 백 만원씩 송금하지 않으면 정호의 회사에 과거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한다. 윤정은 그러한 협박을 당하는 남자친구 정호보다 현철에게 마음이 쏠린다. 무덤덤한 현철과 달리 가해자 정호가 오히려 더 격분하고 반성도 하지 않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며 윤정은 자신을 평가하듯 바라보는 학원 수강생들의 고통스러운 시선이 생각난다. 일년 동안 돈을 입금하고 난 뒤에도 윤정의 눈에 정호는 마음이 홀가분해졌을 뿐,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반성하는 기미는 없어보인다. 물론 정호가 성찰하지 않는 것은 윤정의 시선일 뿐이고, 정말 현철이 무엇을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현철은 마지막 모습까지 침울해 보였고, 정호는 현철과 합의 후 활기를 되찾는다. 세상을 가해자와 피해자로 이분하는 사고방식은 경계해야 하지만, 누군가는 잘못을 저지르고 배상을 하면 죄를 씻었다는 착각을 한다.
가해자에게 평생 속죄하고 비참하게 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 가해자들에게 정말 참된 깨달음을 줘야하는데, 돈으로 갚는 합의를 속죄라고 할 수 있을까.
얼마 전에 악당이 행복한 결말을 맞는 장면을 보며 이상하게 가슴이 뭉클해진 적이 있었다. 나라고 악당을 비난할 자격이 있진 않을 것이다. 당하고만 사는 사람은 당해주는 죄를 지은 것이라고 답답해 한 적도 있다. 누군가는 삶의 굴곡 없는 순탄한 삶을 살면서도 우울증에 걸리는 고통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왜 우리의 집단 무의식은 폭력에 무감해지도록 만들까.

<반려빚>
사람을 숙주로 이용해 먹는 바이러스같은 서일이 등장한다. 이 단편은 또 앞의 단편과 상반된 입장이 등장하는데, 이번엔 당하기만 하는 사람이 주인공이다. 동성 애인 서일을 위해 전세자금대출과 신용대출을 통해 돈까지 빌려준 정현은 서일이 돌연 잠적해 혼자 빚을 갚아 나가고 있다. 그러던 중 서일이 이혼 후에 다시 찾아와 빌린 돈을 위자료로 다 갚을테니 자신의 임시 거처를 제공해 달라는 요구를 하는데, 정현은 또 서일을 받아줄 뻔하지만 정현의 친구 선주가 나타나 서일의 머리채를 잡으면서 상황이 정리된다. 정현은 빌려준 돈은 결국 다 받았지만, 서일과의 일을 통해 자신에겐 로또같은 행운보다는 누군가와 진실된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것이 행운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 쉽게 마음을 주게 되고 또 이용을 당하게 된다. 멀쩡하게 살아가려면 자신을 보호해야 하는 만큼의 공격성을 꼭 갖추어야 하나, 그 공격성이 없는 사람은 결국 정현과 같이 자기합리화를 통해 인생의 의미를 찾아간다….

<혼모노>
신빨이 떨어져가는 무당 문수 옆집에 신애기가 들어온다. 장수할멈은 문수에서 신애기로 옮겨붙었고, 자신의 고객인 정치인 황보까지 문수의 신빨이 다했다는 얘기를 듣고 신애기와 굿판을 벌인다. 배신감에 독기가 찬 문수는 황보의 굿판에 나타나 피튀기는 작두를 타며 할멈을 영접한 신애기를 압도하고, 황보와 그의 가족들은 문수를 우러러 본다. 문수는 진정한 신기를 뿜어내며 자신이 혼모노고 신애기가 니세모노(선무당)라는 것을 입증하듯이.
장수할멈을 영접하진 못했지만 신기보다 더한 기를 인간이 뿜어내며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데 집착하는 현상을 꼬집고 있는데 작가의 필력에 재미까지 있다.

<언캐니 벨리>
언제부턴가 나이가 드니 젊거나 싱싱한 것들을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나의 느낌에 대해 정당한 기분인지, 누려도 되는지를 생각해 보게 됐다.
키가 140정도 되는 택시기사이자 화가이기도 한 화자가 부촌의 어느 집에 몇번 데려다 준 여자가 염산테러를 당했다. 그녀는 어느 노부부의 집에서 돈을 받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수고비를 받는다. 그녀는 그 일이 편하다며 만족했고, 그들의 집에서 약물을 몰래 훔치기도 했다. 어느 날 그곳에 다른 남자 손님을 태워다 주던 중 그 남자손님이 공구통에 약물이 들어간 것을 들키자 당황하고 안절부절 못하며 절대 화자에게 비밀이라며 누설하면 안된다고 신신당부를 하고는 그 집에 들어갔다. 화자가 집을 어슬렁 거리다 노부인을 마주치고, 자신의 집을 방문하는 자들은 자신의 계산법에 따라 조금씩 더 챙겨기는 법이라며 화자에게 택시비 5만원을 건넨다. 그리고 그녀가 염산테러를 당하고 화자는 경찰의 조사를 받지만 특이한 혐의가 없어 조사는 간단히 마친다. 그리고 그 이후 다시 노부인의 집으로 향하는 다른 여인을 택시에 태우게 된다.

"말은 항상 느리죠. 생각에 비하면 언제나 느려요." - P19

미시사를 포함한 세 권의 역사서를 읽고 ‘인간이란 자기가 살지 않은 과거는 뭉뚱그리는 관성이 있다‘라고 메모했다. - P115

냉소는 독이었지만 적당히 쓰면 자기 연민을 경계하는 데에 유용했다. 머그잔에는 노인과 바다」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인간은 파괴될지 언정 패배하지 않는다. - P115

‘밀은 『자유론,에서 개인의 행동이 설사 그 자신의 이익과 상충되 는 듯 보이더라도, 그러할 자유를 보장하는 게 포괄적 공리에 부 합한다고 여겼다‘ 좋은 수업이란 훌륭한 예술품이 그러하듯 내 용과 형식이 일치해야 했다. - P124

딜레탕트 라는 호명의 모욕적 뉘앙스와 단순한 지식에 대한 아도르노의 비 판적 견해와 박사과정 진학에 필요한 시간과 비용을 저울질했고, 모든 사유의 방황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거슬러올라가 은재 와 은재 아버지와 교장과 동료들의 언사에서 사실과 의견을 분리 하였으며, 고전읽기 수업을 포함하여 읽고 쓰고 생각하고 가르치는 삶 전반에서 자신의 패착을 검토했다. 이 세계와 학생들과 부 분적으로는 자기 자신까지 더 정교하게 이해하고 설명하고 변호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결론에 닿았다.
‘나는 『자본론」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수업을 했다.‘ - P140

그건 미워하는 것보다 무서워하는 것 같은데요. 근데......너 무 무서워하다보면 미워지게 되거든요. 무서워하는 거랑 미워하 는 마음이 나중에는 잘 구별이 안 가더라고요. 그게 그거 같고, 굳 이 나눠야 하나 싶기도 하고. - P179

근데 어느 날은 이런 생각이 들 더라고요. 이렇게 넘어가면 나는 다음번에 또 이렇게 넘어가겠 구나. 하는 생각. 앞으로 계속 이렇게 피하기만 한다고 상상하니 까 내 다음이 무서워지고, 내가 무서워지고. 무서워지니까 또 밉 고… 미치게 밉고. 이해 안 되겠지만 그래서 그랬어요. 전역하 고 나서 매일 생각했어요. 목 조르는 생각, 칼로 찌르는 생각. 그 런데 막상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게 없었어요. 그렇게 골라내다 보니 이렇게 시시해진 것도 같고. 그땐 진짜 죽이고 싶었는데. 어 떤 사람한테는 삼 년이 어저께 같아요. 그 생각에 묶여서 시간이 안 가요. - P180

연락이 끊긴 이유를 가장 비참한 방법으로 알게 되었을 때 정 현은 절망했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고 자기가 무얼 잘못했나 자책했으며 이제 앞으로 사람을 어떻게 믿나...... 하고도 생각했 다. 앞으로는 사람을 쉽게 믿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시 간이 흐르면서 정현은 자신에게 그런 선택지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현이 누군가를 믿고 안 믿고는 정현이 향후 만 들어갈 관계에서 전혀 문젯거리가 아니었다. 정현이야말로 그 누 구보다도 신뢰 못 할 인간이었다. 정현은 자신의 신용 점수가 또 래보다 한참이나 낮다는 조회 결과를 자주 들여다봤다. 열심히 빚을 갚아왔고 딱 한 번 연체했을 뿐인데도 여러 군데서 빌릴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빌린 탓인지 신용 점수는 쉽게 높아지지 않았 다. - P211

정현은 자신의 몫으로 남아 있을지도 모를 행운을 그 런 데 쏟아붓고 싶지 않았다. 다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그 사 람에게 아낌없이 다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무런 값을 따지지 않고 셈하지 않고. 상대 또한 그런 사람이었으면 했다. 그런 어리 석은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 P228

이처럼 불공정해 보이는 인과는 낯설지 않다. 능력주의 를 기반으로 하는 현대사회의 메커니즘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신분이나 계급, 인종이나 성별과 무관하게 오로지 개인의 능력 만을 평가 준거로 삼겠다는 능력주의는 언뜻 계층 간의 자유로운 이동을 가능케 하는, 차별로부터 거리를 둔 공평한 체제로 보인 다. 그러나, 노력한 자가 그 대가로 능력을 얻고 이를 인정받아 차 등적으로 대우받게 된다는 이 접근법은 노력한다고 해서 누구나 능력을 갖출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전제를 은폐한다. 편향적으 로 축적된 부와 권력이 세습되므로 동등한 출발선에서 시작하기 어려우며 (유전 등 인간이 인위적으로 개입할 수 없는 요소를 제외 하여도) 누구나 노력하여 재능을 얻고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하 는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지 않은 환경에서 노력은 능력과 직결되 지 않는다. 부모의 소득수준이 자녀의 능력으로 둔갑하기도 하는 세태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 P287

문수에게 큰 재수굿을 의뢰한 대단지 아파트의 입주민 대표와 주민들은 아 파트 재건축 승인이 가져다줄 부가 수익을 기대한다. 이들이 욕 망하는 대상은 각기 다르게 보이지만 모두 자본에 엮여 있다. 자 본주의는 끊임없이 자본을 추구하게 하고, 불안감과 모욕감을 적 절히 활용하여 이를 개인적인 욕망으로 착각하게 한다. 자본에 대한 욕망은 획득한 자본보다 더 큰 자본(궁극적으로는 자본의 무 한 증식)을 목표로 하기에 본질적으로 충족될 수 없음에도, 자본 주의는 이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갈망으로 보이도록 가장한다.
나아가 자본주의는 노력해도 결코 원하는 만큼 얻을 수 없다 는 불가능성을 가리기 위해. 뺏고-빼앗기는 관계 안에서만 이 욕망을 사유하게 만들어 시선을 돌린다. 주어졌다 사라졌거나 혹은 주어지지않은 자본(또는 자본을 창출할 수 있는 수단)을 "빼앗긴"(259쪽) 것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한정된 재화를 애초에 공평하게 누릴 수 없으므로 경쟁은 불가피하다‘고 믿게 하며. 원 하는 대상이 주어지지않을 때도 지배 이데올로기를 의심하기보 다 그것을 누리는 구체적인 인물을 대신 원망하게 한다. - P288

내게 배려란 주로 상대편 사정이 급할 때 베풀어지는 것이었다. - P300

이 도시에 정착한 뒤부터 키가 자라지 않았다. 그 사실 자체는 견딜 만했다. 문제는 시선이었다. 노골적인 익명의 시선. 정수리 에서 발아래로 움직이는 눈동자.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 은밀한 혐오. 지난 십여 년 동안 나는 견뎠다. 나카스 거리에 서 있던 순 간을 떠올리면, 못 견딜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견디는 건 옳은가. 익숙해지는 건 필연인가. 나는 아직 답을 몰랐다. - P308

나는 불쾌한 기분 탓에 얼굴이 굳었다. 그 일이 편하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무방비 상태로 타인의 시선을 받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 P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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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쓰게 될 것
최진영 지음 / 안온북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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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소설을 자주 쓰던 최진영 작가의 장르소설과 순수문학이 다양하게 담겨있다. <인간의 쓸모>에서 완전하게 태어나는 갤럭시존의 아랫단계 타운존의 안나가 인간다운 노고존을 찾아 나서는 것을 보며 완전함은 인간과는 거리가 먼 개념인 것을 보여주는데, 디스토피아적인 <쓰게될 것>보다는 재밌었다.

<썸머의 마술과학>에서 아빠는 사기를 당해 가정의 불화를 일으켰고 두 딸 봄과 여름 중 맏딸 봄은 잘먹고 잘살아보려 했을 뿐이라는 아빠를 맹비난한다. <디너코스>에서 오석진은 정년까지 버티지 못하고 명예퇴직한 이후 주식으로 퇴직금을 탕진하지만 아내 김선영은 출판사를 그만두고 도배 기능사를 취득해 현장을 다니며 하루하루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간다. 오석진의 생일에 모인 딸들은 바리스타로 취직을 하려는 오석진에게 남 밑에서 일하는 것이 자존심 상하지 않냐고 묻는다. 하지만 김선영에겐 현장일이 엄마의 품위에 맞지 않는 일인지 따지지 않는다. 어쨌든 그들은 부모의 실버인생을 위한 축배를 든다.
가족들에게 외면당하는 가장의 처량한 현실을 안타까워해야 하는지, 제 구실을 못하는 가장들을 비난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그들에게 이해와 공감은 없다는 것과 자신의 입장만 고수한다는 점이 불통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유진>과 <차고 뜨거운>은 화자는 자신의 모순을 깨닫고 스스로와 화해하는 과정을 그리는 것 같다.
최유진은 친구 공미에게 대학생 때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알았던 매니저 이유진의 부고를 듣는다. 이유진은 품위있고 고상했으며 아르바이트생들을 리드하는 리더쉽이 있었다. 어느 날 이유진이 반지하방에서 사는 것을 알게 된 아르바이트생들은 더이상 이유진을 따르지 않았고 그녀의 품위있는 척하는 행동이나 비싼 향수 취향에 대해 비아냥대기 시작했다. 속물적인 집단의 일원이 되어야 했던 최유진은 결국 더 이상 그 공간을 버티지 못하고 레스토랑을 그만둔다. 당시 최유진은 이유진이 어른답게 자신을 무시하는 아르바이트생들을 지도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최유진은 자신의 조카를 보며 자신의 어른스러움에 대해 생각해 본다.
<차고 뜨거운>의 화자의 가정은 불화로 가득했다. 아빠는 항상 나를 무시하고, 엄마는 나를 원망하고, 오빠는 하는 일 없이 인정받는 그런 가족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고, 화목한 이모네를 부러워하다 미워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다 딸 태양이를 낳았는데 엄마는 자신에겐 보이지도 않던 지극정성과 사랑을 손녀에게, 내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쏟아붓고 육아에 참견한다. 손녀를 보다 허리를 삐끗한 엄마는 병원에서도 나의 속을 긁는 소리만 하는 사이 이모 내외가 병문안을 오는데 여전히 화목한 두 부부를 바라본다. 내가 아는 모습과 다른 자신의 어린 모습을 기억하는 이모 내외를 보며 가족에게 더이상 얽메이지 않겠다는, 세상에 보여지는 자신의 모습에 집착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

다채로운 장르의 단편이 묶여 있는데 주제가 소통의 지난함을 보여주는 것 같다. 계급이 분리된 미래에서든, 가족간의 이해가 부족한 현재의 삶에서든.

이를테면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이나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 이해하며 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의 영화 를 보면서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을 실감했을 뿐. 나는 그 정도의 속도로 내 인생이 흘러가길 바랐다. - P24

나는 불편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들의 대화가 유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쟤 남자친구 서울대 다니잖아‘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이 눈짓으로 가리키는 사람을 힐끔 바라봤으니까. 그렇게 예쁜가 생각했으니까. 그 연애 가 오래 갈까 의문을 가졌다가 서초동에 산다는 말을 듣고 이상하게 이해가 됐으며 말도 안 되는 박탈감을 느 꼈으니까. 그들의 관심사인 명문대와 강남과 명품 등에서 나는 엄청 멀리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들의 대화는 나의 껍질을 자꾸 벗겨냈다. 모른 척하고 싶어서 아주 깊은 곳에 숨겨둔 나의 근성을 끄집어냈다. 나는 그런 대화 속에 있고 싶지 않았다. - P29

내 말은, 친구가 꼭 필요한 건 아니지만 굳이 피할 필요도 없다는 거지. 너 여기서는 잘 지내잖아. 그럼 우리는 뭐야? 친구 아니야? - P30

근데 너 인도 갈 거라며. 거기서도 그렇게 물을 거야? 왜 이런 데서 살아요, 왜 이렇게 살아요, 묻고 다닐 거야? - P34

이유진은 우리를 크게 혼내야 했다. 돈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멍청한 것을 그만두라고 가르쳐야 했다. 그런 다 음 우리의 분위기를 예전으로 되돌려놓아야 했다. 이유진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태고, 그래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유진은 우리 중 가장 어른이니까. 이런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는 이유진이 정말 미웠다. - P35

어릴 때 어른스러워 보이려고 애쓴 적이 있다. 그땐 어렸으니까 어른스러운 척을 할 수도 있었다. 어른이 된 지금에도 어른스러워 보이려고 애쓸 때가 있다. 나는 여전히 어른스러운 제 뭔지 잘 모르고, 모르니까 긴장했 다. 긴장할 때 나는 좀더 이나를 신경 쓸 수 있었다. - P37

마흔 살의 이유진과 마흔 살의 내가 대화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 P37

일상에서 만나는 타인에게는 기대하기 힘든, 상대를 깔보지 않는 높은 교양과 섬세한 배려를 한 달에 두 번은 체험할 수 있으니까. - P39

타운존의 두드러지는 특징은 비교와 평가다. 그것이 있어 타운존 인간들은 행복하고 불행하다. 따돌리고 협력 한다. 승배하고 험오한다. 목표를 세우고 자살한다. 타운존에 사는 이상 누군가보다 부족한 인간이 되지 않을 수 없다 - P78

증강현실을 이용하여 모와 버나드는 매일 데이트했다. 파티를 열고 여행을 떠났다. 물론 다투기도 했다. 권태 를 예방하고 애정을 복돋우기 위한 갈등이었다. 버나드는 적당한 순간에 모를 실망시켰고 언쟁을 유발했다.
그리고 반드시 감동을 줬으며 같은 일로 다시 실망시키지 않았다. - P81

회사에서 부장이 아무도 웃지 않는 징그러운 농담을 던지거나 납득할 수 없는 고집으로 아이템 진행을 복잡하 게 만들 때면 오나영은 아빠를 떠올렸다. 우리 아빠도 회사 다닐 때는 누군가에게 끔찍한 존재였겠지? 생각하 면 서글프면서도 화가 났다. - P99

오석진과 30년간 부부로 살면서 김영선이 터득한 정신 건강 증진 방법 중 하나였다. ‘그나마 다행‘ 부터 찾아 내기. - P100

퇴직하던 당시 김영선은 자조적으로 자기를 다 쓴 사람‘이라고 칭했다. 그에 비하면 요즘 김영선은 ‘되살아난 사람‘에 가까웠다. - P101

형제자매가 있어야 욕심도 배우고 경쟁하면서 남들보다 빨리 클 수 있어. 서로 위할 줄도 알고 나이 들어 외롭 지도 않고. 당장 키우기 힘들다고 하나만 낳으면 자기만 알고 못쓴다. 커서 사회생활도 제대로 못해. 나중에 형제 없다고 부모 원망할 거야. 두고 봐라. 부모 죽으면 얘 혼자 남는 거 아니냐. 얼마나 불쌍하겠니. - P114

불행을 모으면서 안심하는 사람. 엄마가 원래 그런 사람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런 사람이 되어버렸 다. 엄마는 내가 불행해야 안심할 것이다. - P114

아픈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네가 아픈 건 모두 네 맛이라는 그 말들. 그들은 어쩐지 뿌듯해하는 것처럼 보였 다. 그리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자신은 절대 아프지도 병들지도 않을 거라고. 나는 지쳐 있었다. 소리를 지르 거나 울 힘도 없을 만큼 고통에 파묻혀 있었다. 그들에게 다가가아픈 사람들 천지인 이곳에서 제발 말조심하 라고 발을 구르며 경고하고 싶었지만, 사지가 고통에 묶여 꼼짝할 수도 없었다. 그때 나는 잠시 지옥에 서 있 었다. 인간들의 지옥. 그들의 말은 나의 자책과 다르지 않았다. 내 잘못을 찾는 방법으로 무엇을 얻고 싶었던 거지? 아프다는 이유로 잘못 산 사람이 될 순 없었다. - P134

그래서 엄마는 영혼을 믿어?
두 손으로 핸들을 잡고 구부정한 자세로 한동안 정면만 바라보던 엄마가 혼잣말처럼 대답했다. 그건 사람이 믿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야.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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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달의 바다 - 제12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문학동네 플레이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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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는 자식도 버리고 미국에서 우주비행사라며 가족들에게 사기를 치고 외노자로 살아가는 망나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설은 역시 단편적인 결말에 사연을 만들어 인생을 살아가는 한 인간을 풍요롭고 다채롭게 서술해 보여준다. 누구나 비난만 받을 이유는 없다. 실패라는 결말은 없고 과정으로 이어지는 경로일 뿐이니까.

과연 이 일로 무엇을 증명하고자 하는가, 에 대한 의문을 갖기 시작하면 그때부턴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 게 돼요. 방법은 그저 단순해지는 것뿐이죠. 삶을 최소화시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정확히 분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는 수밖에 없어요. - P72

인생에 끝내 실패란 없어요. 실패를 통과해서 어디로든 가긴 가죠. - P76

"왜 할머니한테 가짜 편지를 쓴 거야?"
고모는 미소를 지었다.
"즐거움을 위해서. 만약에 우리가 원치 않는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라면, 그런 작은 위안도 누리지 못 할 이유는 없잖니."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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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상황과 이야기 - 에세이와 회고록, 자전적 글쓰기에 관하여
비비언 고닉 지음, 이영아 옮김 / 마농지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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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사람들의 고민들. 글을 읽는 사람들도 한 번쯤 읽어볼 만하다. 글을 쓰는 일은 시간이 지나가는 것마냥 술술 흘러가는 것이 아니니까.

오로지 고인이 된 의사를 추도하려는 목적으로 소환되었지만, 살아 움직이는 존재로서의 자신에 대한 관심 또 한 잃지 않는 자아_바로 여기가 기발한 지점이었다. - P8

작가의 민낯이라는 원료로 만들어지는 서술자는 이야기에 꼭 필요한 존재이다. - P8

사회적 책임과 예술적 책임을 혼동하여 예술적 진리를 저항과 정치적 선전으로 왜곡하고 있다고 비판 - P9

복잡한 감정. 먼저, 그런 감정이 있음을 이해한다. 다음엔, 그 감정을 시인한다. 그리고 이를 통로 삼아 경험으 로 들어간다. 그러고 나면 그 감정이 곧 경험임을 깨닫는다. 이제 그는 쓰기 시작한다. - P9

출세욕의 병적인 성질 - P12

이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서는 적절한 어조의 목소리를 찾아야 했다. 징징거리고, 짜증스럽고, 닦아세우는 목소리로는, 특히 닦아세우는 평소의 목소리로는 부족할 터였다. 그리고 문장 구조의 문제가 있었다. 내가 일 상적으로 사용하는 문장 파편적이고, 불쑥 끼어들고, 뒤엎는 문장 역시 먹히지 않을 테니 바꾸고, 조절하 고, 억눌러야 했다. 그러고 나서 글을 쓰기 시작하자마자, 이야기가 숨통을 열고 스스로 나아가게 하려면 이 사람들과 사건들에서 멀찍이 물러나야 한다는 걸 알았다. 간단히 말해, 내 이야기에 더 자유로운 연상을 허용 해줄 유용한 관점이 필요했다. 내가 오랫동안 보지 못하고 놓쳤던 점은, 나인 동시에 내가 아닌 서술자에게서 만 이런 관점이 나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 P16

독자들은 유기적인 완전체로서의 서술자를 믿음직하게 여긴다. 우리와 여정을 함께하고, 글을 완성시키고, 우 리의 시야를 전보다 넓혀주리라 믿을 수 있는 서술자. - P17

작가가한 조각의 경험을 구조화하기 위해 자신의 불안하고 지루한 자아에서 뽑아내는 서술자 - P18

이 글들은 에세이와 가장 깊은 차원의 관계를 맺은 작가들의 작품이다. 에세이라는 형식 자체 덕분에 작가의 깊숙한 내면으로 과감히 파고들었다. 이 글들은 구색 맞추기 식으로 설명을 이어가거나, 사유와는 무관한 이 미지들을 전개하거나, 서정적인 사색에 빠지거나 하며 지면 위를 방황하지 않는다. - P20

인생이란 ..... 점들의 문제가 아니라 흐름의 문제임을 알고 있었다. 중요한 건 흐름이다 - P21

소설에서는 등장인물들이 모든 일을 떠맡는다. 누군가는 작가의 의향을, 누군가는 반대편의 생각을 전한다.
즉 누군가는 자아의 생각을, 누군가는 대치하는 타자의 생각을 대변한다. 그들 모두에게 발언권을 줌으로써 작가는 역동성을 얻는다. 논픽션 작가는 협업할 사람이 오로지 자기밖에 없다. 그러므로 작가가 움직임을 만 들어내고 역동성을 얻기 위해 찾고 구해야 할 것은 자기 안의 타자이다. 결국, 서술자가 고백이 아닌 이런 종 류의 자기 연구, 즉 움직임과 목적과 극적 긴장을 안겨줄 자기 연구에 몰두할 때 비로소 작품이 구축된다. 여 기서 필요한 요소는 적나라한 자기 폭로이다. 자신이 상황에 일조한 부분 즉 자신의 두려움이나 비겁함이나 자기기만_을 이해해야 역동성이 만들어진다. - P22

이 에세이는 한 작가가자신의 지혜를 전하기 위해 위기감을 극복해내는 모습을 지켜보는 데 의미와 가치가 있다. 크루스는 서서히 인생에서도 그랬듯-그 지혜에 닿을 수 있었다. 에세이를 거울삼아, 인정하기 두렵고 창피한 일을 마주하는 어려움을 비춤으로써 서서히 더 깊은 통찰로 우리를 이끈다. 그러니까, 누구나 자기 이 해에 도달하기를 꺼린다는 진실 말이다. - P28

미혼이었을 때 나는 결혼을 익사와 동의어로 생각했다. 내 정체성이 사라지고, 사생활을 침범당하고, 내 자야 는 물속으로 가라앉아 버리리라 생각했다. 결혼 후 내 생각이 옳았음을 알았다. 내가 물속에서도 이렇게 잘 살 수 있으리라는 걸 미처 몰랐을 뿐. - P40

우리는 결혼 생활을 더 좋게 만들 수 없고, 그저 극복해낸다. - P40

원하는 것을 위해 옳지 못한 일을 하기로 동의하는 것을 파우스트적 거래라고 한다 - P68

일생의 막바지에 이르면 자기 자신보다 남들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지켜보는 법은 터득하지만, 외로움에 맞서 싸우느라 정작 자기 자신은 지켜보지 않는다. 책을 읽거나 카드를 섞거나 개 를 돌보며 자신을 회피한다. - P76

토머스 핀천Thomas Pynchon, 리처드 파워스Richard Powers, 돈 드릴로Don DeLillo 같은 동시대 소설 가들이 언어에 도취하여 원대하게 수행하고 있는 신화적 추상화 작업으로부터 문학이 허용하는 한 멀찍이 떨 어진 채 서술하는 자아로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럼에도 비평가들은 우리의 유일무이한 삶을 느끼게 하는 힘, 요즘 소설가들은 거의 가지지 못한 이런 힘이 회고록 작가 진실을 말하는 논픽션 서술자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 하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회고록 작가들은 우리 모두가 처한 상황으로 들어와, 우 리가 지금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 P84

여느 평범한 독자라면 누구나 그러하듯, 작품에 접근하는 것은 어떻게 쓰느냐가 아니라 왜 쓰고 있느냐를 아 는 일이었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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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0
오라시오 키로가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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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광기다…

하지만 자기 몸으로 낳은 짐승 같은 자식 넷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사라지자, 부부는 그 모든 운명을 남의 맛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태도는 열등한 존재의 고유한 특성이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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