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중반 정도를 본 나는 고려의 통일과 귀주 대첩 독차적인 상감 기법의 고려청자를 보게 되었다. 알아낸 이것을 쓰면 자세히 알아내어보자.

<후삼국과 고려의 통일> 

통일 신라 말 왕권이 약해지자 귀족들은 치열한 왕권 다틈을 별였다.
900년 군인 출신인 견휜은 호족 세력과결탁해 무진주를 점령하고 원산주를 도움으로 하여 후백제를 세운다.
이로써 후 고구려, 후백제, 신라가 경쟁하는 후삼국 시대가 열린다.
이후 후고구려의 궁예는 나라의 이름은 마진, 태봉으로 바꾸며 세력을 키우지만 횡포와 기행으로 인해 백성의 인심을 잃더니 끝내 신하들이 의해 쪽겨 나고 만다.
궁예의 부하였던 왕건이 왕으로 추대되고 왕건은 고려를 건국하고 신라와 후백제를 연달아 무너뜨리며 다시 삼국을 통일한다.


<강감찬 장군의 귀주 대첩>  

고려와 거린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거린은 발해를 멸망시키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중국 대륙에서는 거란과 송이 맞서고 있었다.
거린은 송과 연합해 자신들을 위협해 올 것을 두려워해 세 차레에 걸쳐 고려를 침입한다.
903년 거란의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했을 때는 양규의 활약으로 거란을 물리친다,
그러나 거란은 고려 침략의 야욕을 쉽게 꺾지 않았다.
1018년 거란의 소배압은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지만 고려는 강감찬 장군이 있어서 압록강 흥화진에서 거란군을 크게 이기고 귀주에서 퇴각하는 전의 군대를 모조리 섬멸한다. 이 전투가 바로 귀주대첩이다.
이후 고려는 나성을 쌓고 압록강 어귀에서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아 북방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한다.


<독창적인 상감 기법의 고려청자> 

고려청자의 기법은 중국 송나레엇 전해 진 것이다.
청자는 옥에 귀했던 당시 옥을 흉내 내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고려로 전해지면서 그 빛을 발하게 된다.
특히 배색 청자는 고려 청자 중에서도 으뜸으로 불리며 청자의 본고장 송나라에서도 탐내는 경지가 이른다.
처음 고려 청자가 만들어졌을 대는 표면이 고르지 못하며 비색보다는 녹갈색을 띠는 것이 많았다.
그러나 점차 기술이 발달하며너서 말은 가을 하늘을 연상시키는 투명하고 고운 빛깔을 띠게 되었다.
이후 표면의 음가긍로 무늬를 새긴 뒤 그 안에 백토나 자토로 매우고 굽는 독자적인 상감 기법을 개발한다.


이렇게 해서 고려의 통일과 귀주 대첩 독차적인 상감 기법의 고려청자에 대해서 잘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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