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혁명 : 랄프 왈도 에머슨 - 인간은 내면의 목소리를 믿을 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ㅣ 내면혁명 1
랄프 왈도 에머슨 지음 / 이너스북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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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언론을 지켜보면 독특한 일관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누군가 이것이다 외치면 모두 그렇다라고 반복합니다. 왜,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추적하는 것보다 자극적인 기사로 첫 마디를 장식합니다. 인간은 겉으론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행동하지만 마음속엔 질투, 시기, 욕구, 불만족과 같은 불필요한 감정이 가득합니다. 가혹한 표현은 타인에게 잊히기 힘든 상처를 심어줍니다. 문제는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사회는 극한으로 양분됩니다. 언론과 미디어의 상상은 즉시 현실화됩니다. 세상은 진실여부에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이 하는 말에 대한 당위성이 곧 권력이라 판단합니다. 권력의 달콤함, 우린 직관과는 전혀 다른 곳에서 삶의 정당성을 찾고 있습니다.

 

세상과 다르게 산다는 것은 죽음과 같은 두려움을 가져온다고 합니다. 이는 인간 뇌에 각인된 고립에 대한 공포입니다. 수만 년이 지났지만 세상에 대한 시선은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극이 다양해지고 많아져 자신을 인지하기보단 묻혀가는 쪽을 선택합니다. 고만고만한 생각과 다르지 않은 행동, 누군가 이를 벗어나면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봅니다. 하지만 같은 목소리에 묻혀갈수록 자신을 잃어갑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 자리에 있는지, 무엇이 인생의 목표인지, 삶의 가장 중요한 방향을 결정하지 못합니다. 에머슨은 선망했던 자리를 뛰쳐나가며 타인의 시선을 배제한 채 마음 가득했던 의문을 질문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세상이 자신에게 주입한 가짜 정답을 해체하기 시작합니다.

 

19세기 중반 보스턴 사교장은 타인에게 어떻게 보여야할까를 의식하는 이들로 가득했습니다. 모두 자신의 외모와 위치가 사회적 기준에 얼마나 부합한지 점검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타인의 기준에 부합된 자신을 만들기 위해 상대의 시선에 자신을 묶어두고 있습니다. 에머슨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은 영혼을 죽이는 일이다 하고 단언합니다. 영혼은 한 사람이 자신과 맺는 가장 내밀한 관계입니다. 그 관계가 외부의 시선에 침범당하고 검열당한다면, 영혼은 자신의 본래 형태와 의미를 잃게 됩니다. 타인에 일그러진 영혼을 바라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토록 의식했던 타인이 정작 상대에게 거의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에게 압도적으로 몰두해있습니다. 우리는 실제보다 상상 속에서 고통 받는다는 세네카의 목소리가 뜨겁게 전달됩니다.

 

모난 돌이 정에 맞는다란 속담이 있습니다. 에머슨이 활동했던 뉴잉글랜드 역시 교회의 율법을 따르고 타인과 마찰 없이 지내는 것을 사회의 미덕으로 여겼습니다. 다수의 의견은 항상 옳았고 관습을 벗어나지 않으면 성숙한 인간으로 태도와 인격을 보장 받았습니다. 에머슨은 돌의 모서리를 통해 평준화된 사회현상을 비꼬았습니다. 모서리는 취향이고 신념이고 거절의 용기이고, 불편한 진실을 입 밖으로 내는 양심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세상의 관념에 지배당하면서 모서리는 둥근 모양이 됩니다. 표면은 부드럽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마음의 고민이나 생각 없는 의례적이고 습관적인 행동이 떨림을 벗어나 거래가 되었습니다. 평판이 발생하고 이를 유지하기 위한 위선이 세상을 지배합니다. 마음에 없는 위로, 진심이 아닌 동의, 내키지 않는 호의, 의무감으로 떠맡는 책임, 뭔가 답답하지 않습니까?

‘

모두가 정답이라고 말할 때 다르게 말할 수 있는 용기는 자신에 가장 정직한 이들만이 선택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에머슨은 세상의 정답은 정답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익숙함을 옳음이라 착각합니다. 속마음은 분명 다르게 느끼지만 겉으로 타인을 따라가는 것을 선택합니다. 자유는 책임이 뒤따릅니다. 타인을 따라간다는 것은 불편함의 두려움, 실패의 책임을 분가하는 것입니다. 책임을 지기 싫다는 안도감은 자신을 향한 나침반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에머슨은 시종일관 내 안의 직관을 믿으라고 강조합니다. 자신을 믿지 않는 현실은 거짓입니다. 아무리 실상이 빛나고 화려해도 자신의 중심이 없다면 부질없는 허상에 불과합니다. 에머슨의 세계는 철저한 고독안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기꺼이 혼자가 되어야만 비로소 세계가 열립니다.

 

세상을 향한 불편한 진실은 모두 옳다고 하는데서 시작됩니다. SNS는 생각하지 않는 인간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맹목적인 반복을 진실이라 말합니다. 세상은 오랫동안 규칙과 규범을 습관화하며 개인의 자유와 독립을 배제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그 어느 때보다 개인에게 주어진 삶의 자유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타인의 시선에 묶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당신이 원하는 만큼 열려있고 이를 선물로 나타냅니다. 느낌과 체험은 자연이 생명체인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선물입니다. 에머슨은 흔들리지 않는 자아는 주어진 고독을 이해하고 내면화할 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물질이 만개할수록 정신이 산만해지는 것 같습니다. 내 안에 품은 진실을 마주하고 삶을 재해석할 수 있는 통찰이 가득한 시간을 만나길 기대합니다.

 

 

-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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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시장의 돈은 피지컬 AI로 흐른다
정용준 지음 / 메이트북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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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산업지형이 바뀌고 있습니다. 애플, 구글, 아마존등 글로벌 플랫폼을 장악했던 기업들이 주춤하는 사이 AI 제조업체들의 성장이 눈에 띄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특히 엔비디아와 파트너쉽을 이루고 있는 한국기업들이 강하게 재조명 되고 있습니다. 25년 시작된 반도체 레벨 업은 삼성과 SK하이닉스를 세계적 기업으로 올려놓았고 이젠 누구도 넘보기 힘든 해자기업으로 우뚝 서고 있습니다. 불과 1년 사이에 SK하이닉스는 텐버거가 넘는 주가상승을 기록했고 지금도 가장 뜨거운 종목입니다. 반도체 소부장 기업들 역시 엄청난 시세를 분출하며 사상최고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식시장은 시장의 변화를 가장 빠르게 반영합니다. 반도체의 폭발적 성장 뒤엔 AI 생태계에 대한 엄청난 기대가 담겨있습니다.

 

엔비디아 젠슨 황은 AI 생태계를 실질적으로 리드하는 CEO입니다. 그의 횡보는 전 세계 경제계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키는데, 바쁜 젠슨 황이 최근 한국을 자주 방문하고 있습니다. 엔비디아는 이미 쿠다, 옴니버스와 같은 AI플랫폼을 기반으로 차세대 AI 팩토리를 위한 준비를 마쳤고, 이를 가용하기 위한 가장 좋은 시장으로 한국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는 언제나 피지컬 AI시대를 준비하라고 말합니다. 실체적으로 엔비디아의 모든 역량은 피지털 AI를 준비하기 위한 AI팩토리에 맞추어져있습니다. 그가 삼성, sk하이닉스, LG는 물론 두산과 네이버까지 투자나 협업을 서두르고 있는 것을 보면 한국시장을 얼마나 크게 생각하고 있는지 실감합니다.

 

자주 회자되면 언젠간 일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챗GPT가 어떻게 이토록 빠르게 검색엔진 시장을 장악하고 세상을 바꾸어 놓을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AI에이전트, 소버린 AI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은 이미 로봇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견제가 없었더라면 전 세계 로봇시장을 장악했을지도 모릅니다. 한국은 미국의 선택을 톡톡히 받고 있습니다. 피지컬 AI를 준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고 시장 또한 무궁무진합니다. 한국 제조업은 상당기간 글로벌 시장의 디스카운트를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피지컬 AI를 중심으로 제조업이 재평가되면서 갑과 을의 관계가 새롭게 전환되고 있습니다. 플랫폼 기업의 한계가 부각되면서 피지컬 중심의 하드웨어의 중요성이 더욱 높아지고 있습니다.

 

26년 한국 주식시장은 빠른 순환매가 형성되며 레버리지를 중심으로 극심한 변동폭이 반복되었습니다. 투기자본이 한국 시장을 노리는 이유는 반도체의 폭발적 성장과 시장병목 현상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글로벌 플랫폼 기업들은 헤게머니를 놓치지 않기 위해 천문학적인 자본을 투자하며 AI데이터 센터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젠슨 황이 주장했던 AI 토큰화가 실체화되면서 피지컬 AI 시대가 성큼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선점하는 기업이 결국 모든 것을 차지한다는 이론은 이미 MS 와 애플, 엔비디아를 통해 증명되었습니다. 시장은 미래의 기대를 향해 움직입니다. 제조업이 강한 한국기업의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이유입니다.

 

피지컬 AI 시대가 열리면서 삼성의 반도체, 현대차의 제조업, LG의 가전업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한국 기업들은 마치 피지컬 AI 시대를 미리 준비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피지컬 AI는 현실세계에서 행동하는 로봇입니다. 자율주행, 휴머노이드, 산업용 로봇등, 산업 전분야 활용이 가능하며 제조가 필수적입니다. 보스톤 다이나믹스를 인수한 현대차의 횡보는 자동차 기업이 어떻게 로봇 생산기업으로 변신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자동차와 로봇은 상당부분 같은 경로를 통해 제조가 가능합니다. 현대차는 수직계열읕 통해 아틀라스의 현장투입과 기술이전, 스마트팩토리를 통해 다시 한 번 레벨 업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레인보우로보틱스를 중심으로 로봇시장을 석권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피지컬 AI는 상상이 아닙니다. 이미 빅테크를 중심으로 엄청난 투자자본이 진행되었고 시장은 이를 뜨겁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엔비디아가 폭발시킨 피지컬 AI는 구글, 아마존, 애플등 글로벌 플랫폼 기업들을 긴장시키고 산업지형을 재편하고 있습니다. 왜 미국이 리쇼어링을 서두르고 있을까요? 미 정부는 제조업을 다시 미국으로 재편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시장은 그리 오래 기다려 주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시장이 부각되는 이유는 이미 뛰어난 인프라를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26년 주식은 AI를 중심으로 재편된 시장이라 평가할 수 있습니다. 본 책은 피지컬 AI애 대한 본질과 한국시장의 움직임, 피지컬 AI 밸류체인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시장은 피지컬 AI관련기사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등장합니다. 본 책을 통해 기본적인 내용을 습득한다면 보다 나은 투자기법을 선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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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위대한 부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부터 쟁취된다 - 신 국부론 ㅣ 불후의 명작 1
애덤 스미스 지음 / 에버필링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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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과 공포의 경계는 어디일까? 한국주식시장이 도박판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외신보도가 단지 단일종목 레버리지의 과도한 변동폭 때문일까? 아이러니한 것은 변동폭이 커질수록 돈의 움직임도 빨라진다는 사실이다. 26년 상반기 한국주식시장은 유례없는 움직임을 보였다. 수조원의 자금이 물밀 듯이 들어왔다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투기판은 외국자본이 만들어놓았던 것은 아닐까? 탐욕은 인간의 정당한 욕구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돈을 벌기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패를 사용한다. 주식시장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구도 자본시장에서 도덕을 찾지 않는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 앞서 도덕감정론을 통해 공명정대한 관찰자 이론을 제시했다. 위선이 만연한 구조에서 타인에게 부당한 희생을 강요하는 행위는 결코 도덕적 승인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위선이고 무엇이 정당성일까?

 

애덤 스미스, 이름만으로 경제학을 상징한다. 이후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며 난립했지만 스미스의 경제학 원론을 뛰어넘지 못했다. 스미스는 자본시장과 인간관계를 꿰뚫어본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인간 이기심의 정당성을 인정했다. 하지만 도덕 감정론을 통해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도 제시했다. 스미스는 인간사회를 유지하는 힘을 시장이나 경쟁이 아닌 공감이라고 보았다. 도덕 감정론은 타인의 시선을 내면화하며 스스로를 평가하는 공정한 관찰자를 말한다. 이를 통해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는 것이다. 다분히 주체적이다. 하지만 스미스가 자본시장에 도덕을 앞세웠던 이유는 자본시장이 확산될수록 누가 가장 먼저 피해를 보게 될지 예측했기 때문이다. 중상주의가 활개 하던 시대. 누구보다 먼저 자본주의 시대를 예견하고 이를 통합했던 스미스의 통찰력은 오히려 21세기에 더욱 강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인간본성은 250년 동안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250년이 아니라 태초 이래 변한 것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공포를 두려워하고 항시 불안하며 죄책감과 수치심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옭아매며 손실을 회피하는 신념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본주의는 인간의 심리를 가장 농밀하고 세밀하게 드러낸다. 자본주의는 누구에게도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스미스는 사회구조, 특히 금융이나 경제를 통한 사회적 이해관계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이해했다. 빵집 주인은 선의나 자비를 위해 빵을 제공하지 않는다. 빵집 주인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새벽에 일어나 밀가루를 반죽하고 빵을 굽는다. 이익주체가 선의를 포장한다면 시장은 이익주체에 의해 좌우되며 혼란에 빠질 것이다. 많은 사람은 선의라는 포장으로 자신의 이익을 숨긴다. 스미스의 해법은 상공주의와 맥을 같이 한다. 당시 봉건영주들의 자비보다 상공업자들의 정당한 교환이 인간을 예속에서 해방시킨다고 보았다.

 

교환은 시장거래의 핵심이다. 교환이 가능한 물건이어야 정당한 가격을 치룰 수 있다. 또한 상호이득이 전제되어야 한다. 강요된 호의나 희생은 오히려 피해자를 양산한다. 스미스의 덕 감정론은 개인에 한정되어있다. 사회는 개인을 구속할 수 없다. 거래가 곧 관계다. 거래를 원활하게 유지하기 위해 상대의 이기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스미스는 교환의 바탕에 깔린 이기심을 인간 본성에 내재된 중력과도 같은 보편적 법칙으로 보았다. 자비는 변덕이 심하고 일회적이다. 또한 개인의 성격이나 감정에 의해 쉽게 변한다. 하지만 이기심은 항구적이다. 이기심이란 본성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서로의 결핍을 메워줄 수 있는지, 가장 솔직하게 답변한다.

 

노동과 노력, 사회구조를 상징하는 단어다. 대부분 노력한 만큼 보상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시장은 당신의 노동이나 노력보다 당신이 내 놓은 것이 지금 이 자리에서 누군가에게 필요한가, 아닌가로 판단된다. 사람을 가격으로 환산하는 시대다. 시대가 변화하면서 노동의 가치도 변화했다. 지금 자신의 생각과 하는 일이 가치를 전달 할 수 없다면 자기만족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경제적의미의 성장은 제로에 가깝다. 스미스는 오히려 이런 구조가 훨씬 평등하다고 강조했다.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스미스의 의도대로만 확장된 것은 아니었다. 자본은 물과 같다. 이익이 있는 곳으로 흐른다. 분업을 통한 기회균등은 새로운 악습을 탄생시켰고 노동 가치를 폄훼했다. 거대기업의 등장과 1인가구의 확산은 노동 가치를 재정의하며 독점시대가 열린 것이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시장경제 이론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보수경제학자들에 의해 시장을 완화하는 특별한 처방책으로 이용되었다. 하지만 스미스 이후 인류는 수많은 부침을 겪었다. 대부분 무분별한 인간의 탐욕이 원인이었다. 거래가 복잡해지고 규모가 커질수록 예기치 않았던 사건들이 발생한다. 문제는 빵집의 파산으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금융위기는 전 세계적 위기로 확산되고 있다.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와 좋은 궁합을 유지한다. 하지만 그림자 또한 만만치 않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거대한 흑막으로 자본시장을 움직인다. 하지만 그가 바라보았던 자본주의는 인류를 거대한 문명으로 이끌었다. 인류는 자본주의와 함께 흘러가고 있다. 간혹 파괴적인 행동을 자행하지만 여전히 자본주의를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인간사회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구조는 이미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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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이 바꾼 지구의 역사 - 식물과 동물, 그리고 진화의 위대한 로맨스
라일리 블랙 지음, 조정남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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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기오모르파, 수십 억년전의 고대생물이 21세기 바닷가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2마이크로미터도 되지 않는 조그만 다세포조류는 햇빛에너지를 이용해 유기분자를 재조립하여 생존을 유지해왔다. 방기오모르파의 나이는 16억년이다. 당시엔 지금 바닷가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거친 파도와 모래, 암석이 전부였다. 물고기는 물론 조개, 그 흔한 식물등, 눈에 띄는 생물은 어디에도 없었다. 산은 민둥산이었고 생명체는 바다에만 존재했다. 놀라운 것은 최초의 단세포부터 방기오모르파와 같은 다세포 홍조류가 출현하기까지 20억년이 필요했는데 방기오므로파와 최초인간 사이의 시간은 12억년 정도라는 사실이다. 방기오모르파를 포함한 초기 다세포생물들은 향후 지구 생명체의 증식, 진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며 지구생태계를 바꿔나갔다.

 

20억년이란 시간은 박테리아에게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초기 시아노박테리아는 생식을 통해 생존과 증식을 유지했지만 분해되지 않은 시아노박테리아가 세포 안에서 살아남으면서 숙주세포와 함께 분열이 가능하게 되었다. 둘의 공생은 서로의 유전자를 공유하며 세포분열을 통해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하게 되었다. 서로 다른 진화적 경로가 합쳐져 하이브리드 생명체가 만들어진 것이다 시아노박테리아는 광합성을 하는 세포 안에서 양분을 제공하는 엽록체가 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세포들은 혐기성 광합성방식을 통해 생존을 유지했다. 그런데 복제하는 과정에 돌연변이가 발생하면서 새로운 방식의 광합성 방식이 탄생하게 되었다. 바닷물속의 산소를 이용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유기체는 빠르게 증식했고 바다는 산소로 가득하게 되었다. 바다를 탈출한 산소는 메탄이 가득했던 지구를 바꿔가기 시작했다. 산소분자의 탄생은 우연과 행운이 겹쳐지면서 지구의 미래를 결정하게 되었다. 산소 농도의 증가는 기존 생명체의 멸종을 앞당겼다. 지구는 멸종과 생성이라는 거대한 경계를 넘나들며 수십억 년을 유지해오고 있다.

 

인류문명, 특히 근대사를 변혁시킨 것은 화석연료다. 중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지구 지하엔 엄청난 화석연료가 묻혀있다. 정치, 경제적 문제를 일으키는 주 원인을 제공하지만 인류에게 명과 암을 가져온 극명한 물건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35억 년 전, 최초 식물과 동물이 탄생했던 데본기를 지나 미시시피기가 도래하면서 지구 생태계는 엄청난 변화에 직면한다. 이제 해조류은 모래언덕을 넘어 웅덩이에 안착하고 진화를 거듭하며 리그닌이란 세포를 새롭게 만들어 부피를 키우게 된다. 광합성이 세상을 바꾼 것이다. 이런 단계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시간이 흐른 과정의 결과다. 산소를 폭발적으로 증가시킨 것은 초기식물의 죽음과 함께 시작되었다. 식물은 탄소로 이루어져있다. 광합성은 태양에너지를 이용해 이산화탄소를 산소와 탄소로 분해하는데 탄소는 식물의 신체 일부가 되고 산소는 대기로 방출되었다. 초기 이끼식물과 해조류는 탄소를 함유한 채 모래층에 묻혔고 퇴적물과 암석이 되었다. 대기 중 산소는 엄청나게 증가했다. 이제 식물은 모래를 벗어나 땅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산소가 증가하면서 동물은 부피를 키워야했다. 2미터가 넘는 절지동물이 20미터가 넘는 시릴라리아가 빽빽한 숲을 돌아다니며 60센티미터의 거대한 잠자리와 함께 생존하고 있었다. 리그닌은 식물이 높이 자랄 수 있도록 세포벽을 단단히 만들었고 뿌리에서 빨아들인 물을 높은 곳까지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관목은 아니었다. 가발을 쓴 것처럼 거대한 덩치에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시갈라리아는 석탄기를 거대한 숲의 시대로 만들었다. 식물왕국은 거대한 곤충과, 양서류, 식물로 가득했다. 하지만 페름기 말, 지구는 거대한 멸종을 겪게 된다. 식물왕국은 지구 암석에 영구적인 표시를 남기며 엄청난 석탄층이 되었다. 3억 7천만 년 전의 석탄층은 현재 지구인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빠르게 증가하는 기후변화와 대기오염의 주 원인으로 밝혀지면서 탄소시대의 종말을 앞당기고 있는 것이다. 인류는 지구를 벗어난 적도 벗어날 수 도 없었다. 단지 환경을 이용할 방법을 찾기 위해 수많은 시도를 병행했으며 이는 진화적 이점과도 맥을 같이한다.

 

한때 지구가 정원이었을 때, 대기는 어떤 분자를 분출하고 있었으며 땅위의 생명체는 식물과 어떤 연결을 맺고 있었을까? 450억년이란 시간은 태양계를 중심으로 한 지구라는 행성을 통해 생명의 신비를 선물해주었다. 어떤 우연히 있었던 현존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생성되지는 않았다. 생명은 그 오래된 역사만큼 숙성기간이 필요했다. 식물도 예외는 아니다. 바다를 헤매던 단세포에서 다세포로 생존과 번식을 거듭했던 수십억 년의 시간은 생명체의 역사에 아주 중요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햇빛을 얻은 유기분자들이 재조립되어 다세포 조류가 탄생했고, 지구의 역사를 바꾸었다. 본 책은 식물의 역사를 통해 바라 본 지구의 역사다. 생명체는 지구환경을 변화시켜 기후, 침식과 같은 다양한 현상에 영향을 미쳐왔다. 식물은 지구역사를 더 획기적으로 변환시켰다.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식물의 모습에서 지구를 떠나지 않으려는 생명의 단단함이 느껴진다. 거대한 시간의 흐름 앞에선 인간은 어떤 모습으로 지구를 인지하고 있을까? 식물이 그 답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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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을 포기할 때 삶은 가벼워진다 ㅣ 서양철학전집 하이엔드 고전 1
미셸 에켐 드 몽테뉴 지음 / 클래시카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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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아는가? 이 무거운 질문에 몽테뉴의 모든 철학과 사상 그리고 인생이 담겨있다. SNS는 무엇을 알고 있을까? 모두 자신이 정답이라며 같은 말을 반복한다. 그들의 주장에 내면의 생각이 담겨있을까? 표면적이고 현상적 이론에 파묻힌 사고가 깊은 울림을 전달할 수는 없다. 그들은 철저히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기준을 벗어나지 않는다. 누군가의 생각을 벗어난 언어가 이토록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회는 다양성을 배제한다. 몽테뉴는 확신에 찬 사회가 얼마나 잔인하고 파괴적인지를 직접 목격했다. 어제까지 웃음을 나누던 이웃이 사회적 기준에 의해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두려움은 공포를 넘어서 인간의 의미와 목적을 상실한다. 삶에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는 잠적했다. 모든 이들이 비난했지만 어쩌면 가장 어려운 선택을 한 것이다.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이것이 진실인가?

 

1572년 파리는 위그노(개신교)와 카톨릭간의 갈등이 폭발해 종교전쟁이 발발했다. 어제의 이웃이 적이 되어 서로를 무참하게 살해했다. 그들은 종교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짐승이라 불렀고 신은 자신의 편이라 믿었다. 학살은 죄가 아니었다. 종교학살의 바라보았던 몽테뉴는 도대체 믿음이 무엇 이길래 인간이 이토록 잔인해질 수 있는지, 너무도 당황스러웠고 절망했다. 몽테뉴는 사회의 기준의 침착했다. ‘나’라는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16세기 보르도는 신이 지배하는 시대였고 나의 정체성은 곧 신에 의해 규정되었다. 절대적 기준은 정체성을 확립시킨다. 결국 자신의 확신을 지키기 위해 살인을 서슴지 않는다. 그런데 자신이 목숨보다 소중하게 지켜왔던 확신이 절대적이란 믿음은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당시 몽테뉴의 생각은 너무도 위험했다.

 

몽테뉴는 현실에서 떠났다. 하지만 탑에 들어선 후 더욱 강하게 자신에 침착한다. 우울과 불안으로 날뛰는 감정을 마주하며 자신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그는 신의 말, 세상의 시선, 타인의 의견이 아닌 흔들리는 한 인간의 감각과 감정, 행동을 들여다보며 일상을 글로 적었다. ‘여기서 내가 그리려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짧은 어구와 함께 몽테뉴 세계가 시작되었다. 세상은 정의와 공정이란 개념을 심어놓았다. 누구에게나 적용되어야하는 도덕적이자 정치적 언어다. 개념은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이들에게 작용되며 예외는 인정되지 않는다. 그런데 개념이 오용되면 본래 목적이 상실된다. 삶의 편리함을 위해 만들어 놓은 수많은 개념들은 편리성을 위해서가 아닌 개인의 삶을 규정하고 구속하기 위해 존재한다.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정의와 공정을 누군가는 당연하다는 듯이 선을 긋는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진리도 진실도 아니다. 모든 것이 불분명한데 왜 인정해야하는가?

 

몽테뉴는 자신을 관찰하면서 인간의 감각과 감정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깨닫는다. 스스로의 나약함을 인정하지 못한 채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결핍에 찬 욕구를 내뱉는 것과 같다. 결함투성이 감정을 배제한 채 타인을 의식한다. 불안을 감추기 위해 스스로 잣대를 들이댄다. 가슴 깊은 곳에 감추어진 불안과 두려움이 자신을 가렸던 고유한 무늬다. 결함을 숨기려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 에세는 실수투성이이자 결함이 가득한 인생의 모습을 담은 몽테뉴의 삶의 과정을 수록한 수필이다. 그는 누군가에게 강요하지도 이렇게 살아라 라고 주문하지 않았다. 수상록에 기록된 수많은 쪽지와 메모는 삶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미완성이라는 몽테뉴의 생각을 가감 없이 전달한다. 몽테뉴는 철저히 자신을 발가벗긴다. ‘인간은 놀라울 만큼 헛되고, 변덕스럽고, 흔들리는 존재’라는 표현은 그만의 해방선언이다. 그는 인간존재의 본질에 가장 가깝게 다가간 인물이었다.

 

우린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특별한 사회적 기준을 맞추기 위해 불필요한 희생을 강요당하고 의지와는 상관없는 소비문화에 길들여져 있지 않는가? 안타까운 것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떤 삶의 방향을 가고 있는지 거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타인의 시선이 두렵다. 차라리 눈감고 발을 디디는 쪽을 선택한다. 자신을 잃어가는 시대의 초상은 16세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시스템 안에서의 자유, 타인을 구속하지 않는 독립, 세상을 벗어나가 어려운 구조, 하지만 결국 인생은 홀로서기가 가능할 때 시작된다. 몽테뉴는 세상이 주는 메시지에 귀를 닫았다. 오만과 의심, 자기 확신이 가득한 세상에 굳이 자유로운 영혼이 상처받을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채우려 발버둥 칠수록 나만 부서질 뿐이다. 헛된 욕망이 주는 메시지는 자신을 포기하는데서 가져온 얕은 만족에 불과하다. 권위와 권력, 부와 명에가 세상을 뒤흔들고 있다. ‘가장 높은 왕좌에 앉아도 결국 자신의 엉덩이 위일 뿐이다’란 묵직한 울림이 가장 필요한 시기다. 인생은 진짜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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