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월자, 흔들림이 없는 사람, 외압이나 환경에 좌우되지 않고 꿋꿋이 자신을 지키는 사람, 인간은 외부적 조건에 자신을 투영하지만 정작, 스스로를 지키는 것은 정서적 안정감이다. 오히려 그토록 믿었던 외부적 조건이 자신을 불안이나 고통으로 밀어 넣는다.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고 조그만 일에도 분노가 치솟는다면 지금,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해야한다. 하지만 대부분 마음을 억누르거나 회피함으로 이 순간을 모면하거나 피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감정은 해결되지 않은 채 축적된다. 결국 또 다른 갈등과 분리, 불안이 잉태된다. 철학자들은 내면에 침착된 삶의 조건에 집중했다. 묘한 시기와 질투, 나만 이러는 걸까? 니체는 내면에 잠긴 무언가 교묘하게 작동하는 것을 르상티망이라 표현했다.
르상티망은 삶의 운전대를 남의 손에 쥐어 주는 것이다. 자신의 시선을 남에게 묶어 스스로의 선택보다 타인의 선택과 소유를 통해 자신의 하루, 길게는 인생을 결정한다. 르상티망은 분노와 다르다. 터뜨리지 않고 억누른다. 터지지 않으니 축적되어 엉뚱한 곳에서 튀어나온다. 타인에 대한 질투, 세상에 대한 편견, 약자의 기억, 가치의 전도, 정의의 탈을 쓴 복수, 르상티망은 상대를 부정하고 자기를 긍정한다. 문제의 출발점은 언제나 타인이다. 저 사람이 잘못했으므로 내가 옳고, 저 사람이 가졌음으로 내가 빼앗겼고, 저 사람이 악하므로 내가 선하다. 자기가치가 불분명하니 타인을 깎아 스스로를 증명한다. 그래서 비교대상이 무너지면 자신도 무너진다. 자기를 넘어선다는 것은 타인의 행위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타인으로부터 자신에게로 출발점을 옮기는 것이다.‘ 인간은 차라리 무를 의지할지언정,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고는 못견딘다는 니체의 격언은 스스로를 장벽에 가둔 채 세상을 이해하고 있는 인간의 모순을 증명한다.
인간의 모순된 행동은 자기부정에 가깝다. 그 대표적인 상황이 죽음에 대한 생각이다. 인간은 유일하게 자신의 죽음을 아는 존재다. 또한 죽음을 인지하지만 동시에 부정한다. 어니스트 베커는 인간이 하는 거의 모든 일이 죽음의 부정을 떠받치는 정교한 장치라고 말한다. ‘야망은 죽음이 변장한 것이다.’ 더 많이, 더 높이 쌓고 축적하는 충동은 죽음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본능이다. 돈이 쌓이면 죽음에서 멀어진 듯한 기분이 들고, 유명해지면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돈과 명성은 불멸의 부적이다. 중세의 영웅 신화가 대중의 각본이었다면 현대사회는 성공이 공포를 눌러 내린다. 문제는 자신의 불안과 두려움을 타인에 떠넘겨 우리와 저들이라는 경계를 짓는다는 것이다. 충분히 위대하면 사라지지 않는다는 약속, 성공에 대한 환상, 불멸 프로젝트는 자신으로부터의 도피를 통해 완성된다. 그런데, 그 어느 것도 자신을 죽음으로부터 구해줄 수 없다. 앎은 새로운 선택의 길을 열어준다.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언제 자신을 돌아보았는가? 초월자는 도피를 멈추고 공포를 마주한다.
인류는 사회저변에 깔려있는 갈등과 분열, 개인의 혼란과 불안에 대한 심리학적 통찰을 연구해왔다. 심리학 이전에 신학과 철학이 있었고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분석과 해석을 통해 다양한 심리학적 흐름이 이어졌다. 본 책은 이클립스님의 초월자, 스스로를 깨뜨린 자의 이야기다. 니체, 베커, 야스퍼스, 아렌트, 헤세, 켐벨등 자아를 해체하고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을 담은 뛰어난 작품들이 소개되어있다. 왜 당신은 여전히 여기에 머물러있는가? 현대인에게 경종을 울리는 문구지만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움직여야하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누가 짜놓은 순서인지 모르지만, 묵묵히 그 순서를 따라간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다. 선택할 수 있다는 무게 자체를 피하고 있다. 프롬은 인간은 자유가 두려워 복종을 선택한다고 말했다. 자유를 얻는 순간 인간은 불안해진다. 스스로 방향을 정해야하고 결정의 책임을 져야한다. 자유는 책임을 요구한다. 무게를 견디기 힘들 때, 스스로 쇠사슬 속으로 들어간다. 헤세는 데미안과 싯다르타를 통해 알을 깬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과정인가를 사실적으로 표현한다. 알을 깨기 어려운 이유는 알을 깨고 난후의 무력함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무능은 다시 알을 찾게 되고 시스템의 편안함에 안주한다.
왜 철학가들은 자신을 찾으라고 강조하는가? 한국사회는 한때 니체 신드롬에 빠져들었다. 위버멘시, 독일어로 초인을 뜻하는 단어는 한동안 상당한 오해를 일으켰는데, 니체의 위버멘시는 더 나은 인간이 아니라 자금까지와는 다른 종류, 즉 달리기를 멈추고 춤을 추기 시작한 사람이다. 생각과 방향이 완전히 다르다. 위버멘시는 성장이나 자기계발이 지닌 한계를 무참하게 무너뜨린다. 신은 죽었다. 신의 거대한 공백에 국가, 민족, 진보, 돈, 그리고 성장이 들어섰다. 껍데기만 바뀌었을 뿐 구조는 똑같다. 니체의 안주하는 인간의 전형이 현대인의 모습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들은 마지막인간으로 고통도, 갈망도, 의지도 없다. 그저 안락하게 살다 죽는다.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해진 삶에서는 새로운 자기가 점화되지 않는다. 자기해체는 죽음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고 완성이 아닌 동작이다. 인생은 끝없는 구속과 한계 속에서 알을 깨는 과정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다. 고통이 앞에선 누구나 불안하고 두렵다. 하지만 세상을 무너뜨릴 수 있는 사람은 스스로 무너져본 사람들이다. 당신을 묶고 있는 숨은 힘은 무엇인가?
-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