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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부는 날이면 그림 속으로 숨는다
허나영 지음 / 비에이블 / 2026년 2월
평점 :

나라는 인식이 흔들거릴 때 불안이 찾아온다. 상대와의 비교, 경쟁 속에 파묻힐 때, 무기력과 공허가 몰려온다. 나는 존재하지 않고 소속되어 있지 않다. 불안, 곧 삶의 공허와 무기이 우울증을 동반한다. 외톨이가 된 느낌이다. 외롭고 두렵다. 나는 누구인가? 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스스로에 얽매여있는가? 삶을 채우기 위해 부단했던 시간들, 나를 붙잡았던 시간과 공간들, 마치 절벽에 서 넘실거리는 파도만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오직 내 마음, 나의 시선이 세상을 바꾼다. 누구도 자신을 알 수 없지만 오직 나만이 나를 이해할 수 있다. 커피 한잔에 담긴 따뜻함, 온정이 마음에 흐를 때 비로소 나를 인식하게 된다.
쉼표가 필요한 시간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까지 알 필요는 없다. 그동안 쉼 없이 달려왔다면 지금 이 순간 나를 내려놓아야한다. 우리의 의지와는 달리 몸과 마음은 생각만큼 견고하지도 완벽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어떤 시절을 기억하는가? 자신에 부여된 삶의 의미를 기억하는가? 무너지는 마음이 자신을 만날 때, 삶의 희망을 엿 볼 수 있다. 수많은 예술가들은 자신의 삶을 화폭에 담아 세상과 공유하기를 원했다. 미술관과 화랑을 찾는 이유도 자신과 닮은 인생을 만나기 위해서다. 위로받고 공존하는 세상, 지금 자신이 서있는 이곳이 세상과의 만남이다. 숨 쉬고 마음을 허락하는 시간과 공간,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투영해본다.
무의식은 무한한 상상을 내재한다. 프로이트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무의식을 이끌고 있다고 말한다. 오래된 기억, 꺼내기 두렵고 마주하기 힘든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벨기에 화가 르네 마그리트는 금지된 복제라는 작품을 통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뒷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감각을 부수고 체계를 무너뜨린다. 마치 지금까지 알던 모든 것들이 자신과는 상관없는 듯한 일탈이다. 오랜 기간 불안에 시달렸던 저자는 무의식에 감춰진 자신의 모습을 마그리트의 작품을 통해 투사한다. 마그리트는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어쩌면 우린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특별한 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아낌없이 보여주고 있다. 초현실주의는 시각적 한계를 뛰어넘는다. 연인ll는 하얀 수건으로 얼굴을 감싼 채 입 맞추는 연인을 나타낸다. 마그리트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현실도피, 사랑의 역설, 의도는 다양하게 해석된다.
눈길을 끄는 건 화려함이 아니다. 간혹 드리워진 그림자가 표현을 압도한다. 수직과 수평구도, 디스토피아 같은 느낌의 건물, 휑한 도시의 풍경을 단순한 색채로 표현한 에드워드 호퍼의 일요일의 이른 아침은 어지러운 마음을 정돈하고 고요하게 존재하고픈 평화로운 모습을 떠올린다. 호퍼는 경제부흥기에 맞서 파편화되어가는 개인의 의식을 밤샘하는 사람들을 통해 나타내고 있다. 호퍼의 그림 속엔 너와 내가 없다. 인물들은 각기 다른 사정과 감정을 내보인다. 역동적인 삶의 흔적 대신 정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뒷골목이 작품의 배경이다. 호퍼의 그림자는 우리의 인생을 닮았다. 가면을 쓴 채 일상에 도전하지만 결국 뒷골목에 지나지 않은 인생, 저자는 이를 자유로운 고독으로 표현한다. 인간에게는 스스로 선택한 자유로운 고독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자발적인 고독은 구속된 삶이 아니다. 오히려 갇힌 세상을 열어젖힐 자유에 가깝다. 작품엔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지만 이를 해석하는 것은 오롯이 독자의 몫이다.
청명한 날씨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단지 하늘이 푸르다는 생각밖엔, 하지만 구름이 몰려오면 세상이 달라진다. 구름은 절대 혼자 오는 법이 없다. 바람과 함께 대기를 움직이며 당신이 하는 고민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거대한 자연 앞에선 인간의 초라함, 본 책은 매일 변하는 날씨를 매개로 저자의 일상과 작품과의 교감을 이야기하고 있다. 인생의 목적이 하나일리 없다. 미술학도를 접고 작품과 함께 하는 삶도 아름답다. 오히려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고 만날 수 없었던 삶의 지혜를 공유할 수 있다. 마음이 흔들거릴 때 미술관을 찾는다. 세상엔 다양한 스토리가 있다는 것을, 운명을 정하는 것은 당신의 선택이라는 것을, 수많은 작품을 통해 위로를 받는다. 세상에 나쁜 날씨란 없다. 서로 다른 종류의 좋은 날씨가 있을 뿐이다. 작가의 조용한 외침을 특별한 작품들과 함께 마음 깊이 간직해본다.
-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