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도 하늘길
한승원 지음 / 문이당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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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도 정약전의 유배지엔 돌담의 흔적만이 외롭게 늘어서있다. 야트막한 산자락을 사이에 두고 길게 늘어선 돌 자락, 그는 16년간의 유배생활을 이곳에서 마친다. 그토록 가고 싶은 고향을 등진 채, 사랑하는 아우 약용을 보지 못한 채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다. 여전히 숨 쉬는 돌 자락이 약전의 외로움과 고독, 한 인간으로서의 고뇌를 한 것 안고 있는 것 같다. 당대의 사대부 가문으로서,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었던 병조좌랑으로서, 정조의 총애를 한껏 받았던 총명한 신하로 조선의 미래를 이끌 것 같았던 그가 무엇 때문에 이토록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을까?

 

인간의 유한하다. 나는 새를 떨어뜨린다는 권세도 한갓 구름과 같다. 생의 유한함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성리학의 대가 이익과 권철신의 제자로 이름을 날리던 약전에 만인의 평등에 대한 천주학은 그야말로 혁명적인 목소리였을 것이다. 인과 예를 숭상하는 조선의 기풍은 위로부터의 인과 예였지 결코 균형을 추구하지 않았다. 하지만 천문은 무엇인가? 성리학의 천이 곧 천주학의 천이 아니던가? 천에 대한 해석이 한 인간의 삶을 바꾼다면 학문이 추구하는 목적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마음을 숨기면서 자신의 내면에 가득한 의심덩어리를 해결하지 못한 채 살아가야한다는 것은 학문을 숭상하는 선비로서의 책임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의심은 곧 멸족을 의미하기도 한 세상이었다.

 

벽파의 세상이다. 황사영 사건의 주모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고 약용과 약전 형제는 강진과 흑산도로 두 번째 귀양을 가게 되었다. 형제는 애달픈 삶을 토로하면서 서로의 안부를 다짐한다.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살아서 다시 만나야 한다. 천주를 거부한 것은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이 우선이었고 미래를 위한 포석이었다. 하지만 시커먼 바다를 눈앞에 둔 약전은 거대한 파고 앞에서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자신의 처지에 깊은 한숨과 끝없는 걱정을 토로한다. 어지럽고 혼미한 세상, 차라리 학문을 알지 못했다면, 이토록 모진 삶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진 않았을 텐데, 어두운 흑산도의 밤은 끝없는 소용돌이로 그를 몰아세운다.

 

흑산도는 고도절벽이다. 얽히고설킨 사람들로 이루어진 흑산도엔 마음 둘 곳이 없다. 아전들의 감시는 갈수록 교묘해지고 이를 틈타 시대에 편승하려는 아부꾼들의 계략이 약전의 목을 짓누른다. 시대는 무엇을 요구하는 것일까? 무지 랭이 같은 백성들은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출세에 눈 먼 그들에 약전은 어떤 사람으로 보였을까? 흑산도는 고립된 공간이다. 들어오기도 쉽지 않고 나가기는 더욱 어렵다. 약전은 폐쇄된 공간 안에서 삶의 절규를 체험한다. 끝없는 번뇌와 의심, 언제 올지 모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삶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깨닫게 한다. 우린 삶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또한 누군가 추구해야할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시대가 만들고 상황이 삶을 이끌어갈 뿐이다. 약전의 삶은 한정된 시공간에 갇힌 우리의 삶과 다르지 않다.

 

흑산도 하늘길은 한승원님의 2005년도 작품이다. 저자는 다산과 형제들을 통해 삶의 무상함을 꺼내든다. 권력도 권세도 한낱 구름과 같다면 왜 그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학문은 배워 무엇에 쓰려는 것일까? 타인위에 군림하려는 사대부적 욕망은 결국 허황된 욕심에 불과하다. 돌고 돌다보니 그 자리라는 말은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이 자신에 있음을 뜻한다. 약전은 바다를 통해 절규의 삶을 포용의 삶으로 바꾼다. 암흑과도 같은 흑산도 바다가 생명을 품은 어머니의 모습으로 변한 것이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나의 처지가 바뀐 것인가? 자유에 대한 박탈은 삶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인간은 존재론적 의미를 되짚어볼 때 자신의 모습을 반추한다. 처절한 삶의 고뇌와 욕망 그리고 끈적끈적한 삶의 모습이 가득한 흑산도 하늘길, 과거의 모습이 눈앞에 투영된다. 약전의 삶은 우리의 삶이다. 그리고 저자가 넘고 싶은 잔혹한 일상의 단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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