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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돌아갑니다, 풍진동 LP가게
임진평 지음, 고희은 그림 / 다산책방 / 2024년 11월
평점 :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추억과 이를 간직한 기억 때문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우린 기억을 헤집으며 일상을 살아갑니다. 기억은 우리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어디로 튈지 모를 감정을 저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우리의 삶은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우린 어떤 삶을 꿈꾸고 있는 것일까요? 어떤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스스로에 부여한 생의 일기를 써내려가고 싶은 것일까요? 저마다 생각은 다를지라도 어느 날 문득 과거를 되돌아보면 본래 있던 자리를 맴돌고 있었던 건 아니었던지, 오래전 기억의 가장자리에 놓아두었던 무언가가 가슴 깊숙이 들어온 느낌입니다.
LP는 아날로그의 시대를 떠오르게 합니다. LP엔 수많은 사연과 추억 그리고 인연이 담겨있습니다. 어쩌면 꺼내기 어려운 고백이 숨겨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린 LP를 통해 상실과 회복, 고통과 희망을 경험합니다. 그런 면에서 LP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주고 있습니다. 턴테이블과 LP판은 숭고한 의례가 필요합니다. 음악을 위한 특별한 배려와 마음가짐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바늘의 움직임에 맞춰 아련한 추억들이 떠오릅니다. 진한 여운이 과거와 현실을 넘나들면서 우리의 시간을 보듬습니다. 누구나 음악을 좋아하지만 존중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음악은 자신과 타인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의 죽음 후 유일한 생의 낙이었던 동생 정안의 죽음, 정원은 믿기 힘든 현실 앞에서 좌절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판결에서 한없는 무력감을 느낀 정원의 선택은 포기였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앞둔 그의 눈앞에 아버지의 유산 LP가 눈에 들어옵니다. 동생 정안의 말이 떠오릅니다. 의미를 부여하는 건 자신이라고. 그리고 LP에게 새로운 주인을 찾아주기로 결심합니다. 동생의 죽음으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정원 앞에 놓인 6312장의 음반, LP의 생명력은 생에 대한 마지막 책임이었습니다. 그리고 후미진 동네 풍진동에 중고 LP 가게를 오픈합니다, LP에 대한 소고는 정원이 LP에 줄 수 있는 마지막 의무였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빠르게 기적이 일어납니다.
인간은 말할 수 없는 자신만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일상이 다채로운 건 비밀을 간직한 이들의 교집함이 삶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가게의 첫 번째 손님은 중년의 원석입니다. 원석은 타인과는 다른 정원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생애를 반추합니다. 상처 받은 이들은 이해하긴 어렵지만 서로간의 공통점을 공유합니다. 원석은 매일 LP가게로 출근합니다. 카론의 등장은 다소 뜻밖이었습니다. 인기아이돌 카론은 후배의 죽음으로 깊은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상실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은 간혹 가혹한 선택을 강요받습니다. 하지만 우연은 필연을 가장한 듯, 예측할 수 없는 위로와 따뜻한 공기가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 버릴 때도 있습니다.
이상한 LP 가게엔 저마다의 아픈 기억을 가진 이들이 등장합니다. 어린 시절 교통사고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하는 미래, 천재아들을 둔 변호사 다림, 원장, 예분등, 저마다 가슴 아픈 사연들을 안고 살아갑니다. 음악은 그들의 시간을 늘려주며 회상과 회한을 끄집어냅니다. 정원의 LP는 이들을 이어주는 특별한 가교입니다. 아픔은 사랑을 희망합니다. 타인의 배려와 공감은 아픈 이들의 마음에 희망이라는 씨앗을 심어주고 사랑과 믿음을 세워줍니다. 풍진동 LP 가게는 공존의 공간입니다. 음악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다독이며 가족이라는 경험을 새롭게 선물해 주고 있습니다.
누구나 한번쯤은 LP의 긁히는 소리를 경험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한 장의 LP를 선택하기 위해 엄청난 시간을 허비한 적도 있습니다. LP엔 저마다의 소중한 추억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런 추억을 만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시간이 어떤 이에겐 생의 마지막 선물일지도 모르듯이 LP는 생명을 다하는 순간까지 소중한 추억을 기록합니다. 읽는 내내 마음을 숨길 수 없었던 주인공들과의 만남이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게 합니다. 상처받은 마음도, 고단한 삶도 그저 다 흘러갈 뿐이야. 저자가 소개한 음악들을 선물 받으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생을 반추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