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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과 추사, 유배를 즐기다 - 조선 최고 지성, 다산과 추사의 알려지지 않은 귀양살이 이야기
석한남 지음 / 시루 / 2017년 8월
평점 :
다산과 추사, 유배를 즐기다

유배를 통해 성장한 두 천재 이야기

다산 정약용.
이가환은 다산이 '귀신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천재였을 뿐 아니라
정조까지도 인정한 공식적으로 당대 최고의 천재라는 평가를 받았다.
고산 윤선도의 증손인 윤두서는 다산 어머니의 할아버지였다.
다산은 권철신(성호학파), 이가환(이익의 증손자), 이서구, 이덕무, 박제가 등과 우정을 맺었다.
다산의 둘째 형 정약전은 신유박해 때 다른 천주교 신도들과 화를 당하고
황사영 사건으로 흑산도로 유배 당한 후 ≪자산어보≫를 남기고 생을 마쳤다.
이렇듯 다산의 학통은 조선 말기 소외받은 지식인의 계보와 일치한다.
당시 비주류 지식인들 사이에서 현실을 보는 눈을 떠가고 있었다고 하겠다.
추사 김정희.
로열패밀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풍족한 집안에서 태어나 풍족하게 살았다.
순조 비 순원왕후의 오빠인 황산 김유근은 추사의 후원자였다.
19세기 시단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던 자하 신위는 추사의 20년 연상의 선배로,
추사는 그에게 시.서.화 부문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추사는 다산과는 직접적 인연은 없지만 다산의 아들 정학연, 정학유와는 교류가 있었다.

다산과 추사는 유배를 떠났다는 공통점은 있으나
유배지에서의 행보는 무척 달랐다고 전해진다.
유배 시절 다산은 배움에는 귀천이나 나이의 차별이 없으며,
독서는 누구에게나 가장 아름다운 일이라 믿었다.
다산이 유배 중 거처를 옮길 때면 제자들이 항시 따라
그의 곁에서 학문의 꽃을 피웠다.
이것은 다산이 18년 유배 기간 동안 무려 500여 권에 달하는 저술을 남기는 토대가 되었다.
유배는 다산 개인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조선 인문학에는 행운이었다고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추사에게 유배는 자신의 행적와 예술을 돌아볼 중요한 계기였으나
동시에 익숙한 풍요함에서 벗어나 고난과 갈등을 겪어야 했던 시기였다.
그는 늘 반찬 투정을 해댔고 잔병치레도 많았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움 없이 살던 그에게 제주에서의 유배생활은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사의 식지 않는 비판의식과 꺾이지 않는 도전정신은 그대로였다.
종종 선후배들의 작품에 날선 비판을 퍼붓는 추사였으니,
천생적으로 비판적이고 도전적인 싸움닭 기질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싶다.
유배지에서조차 계급적 신분주의와 지적 우월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추사.
그의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고 국보급 유물을 낸 인물이지만
더 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져버렸다.

유배 생활에 잘 적응했느냐의 여부에 관계없이
다산과 추사에게 유배는 가문의 몰락도 아니요, 존재의 상실도 아니었다.
제자를 기르고 수많은 책을 저술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만들었으니
그야말로 사상과 예술이 완성된 값진 시간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다산과 추사의 인간적 면모와 진솔한 모습이 왠지 친근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