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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소녀 혹은 키스 ㅣ 사계절 1318 문고 109
최상희 지음 / 사계절 / 2017년 3월
평점 :
바다, 소녀 혹은 키스
방주 / 잘 자요, 너구리 / 한밤의 미스터 고양이 / 굿
바이, 지나 / 아이슬란드 / 무나의 노래 / 수영장 / 고백
여덟 편의 단편에는 예기치 못한 사고와 사건의 파장으로 고통받는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방주>
돌풍에 떨어진 간판에 머리를 맞아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엄마.
그 사고로 언제 어디서 불상사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강박이 생긴 아빠는
만약을 대비해 방주를 만들어 아들과 함께 대피 훈련도 한다.
세상의 모든 위험에서 아들을 보호해 주리라 믿은 완벽한 은신처,
방주를 지은 아빠의 무모함은 지하 감옥과도 같은 방공호에
오히려 그들 스스로를 유폐한 셈이다.
그러나 방공호 안에 처음 들인 소녀 앞에서
소년은 굳건한 방주처럼 견고하게 숨겨둔 두려움과 슬픔이 툭 하고 비어져 나오는 것을 느낀다.
<잘 자요, 너구리>
교통사고로 십 년 동안 의식을 잃었다 스물다섯 살 아저씨 나이로 깨어난 ‘나’.
그 앞에 가정 형편 때문에 발레를 포기한 소녀가 나타난다.
소녀는 대뜸 너구리를 조심하라는 말을 건네며 나에게 접근한다.
마침 연락되는 친구라곤 한 명밖에 없는 나는
매일 밤 스트레칭으로 하루를 마감하는 소녀에게 남 몰래 인사를 건넨다.
의식 없는 채로 잃어버린 10년과
의식이 또렷해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10년을 교감하는
나와 소녀의 이야기가 잔잔하게 펼쳐진다.
<아이슬란드>
열대 섬나라의 이국적 유전자를 가진 전학생 소녀 오란디는
어릴 때 엄마를 잃고 아빠 또한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나
친척 집에 맡겨진 소공녀 같은 존재이다.
시험에서 일등을 한 소녀는 반 아이들에게
순식간에 동정의 아이콘에서 증오의 대상으로 바뀐다.
동정의 대상일 때도 증오의 대상일 때도 소녀는 여전히 꼿꼿하고 품위 있다.
나는 철저하게 소녀를 외면하려 하지만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그 후 교통사고로 몇 차례의 수술을 받으며 병원에 누워 있는 나에게 소녀가 찾아온다.
소녀는 날마다 비슷한 시간에 와서 소년 옆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다 간다.
소년은 소녀가 불러 주는 자장가를 들으며 소녀를 생각한다.
지금까지 세 편 모두에 소녀가 등장했듯 나머지 작품들에도 소녀가 등장한다.
소녀들은 모두 당당하고 단호하다.
소년들이 머뭇거릴 때는 먼저 다가서는 과감함도 선보인다.
소설들을 읽는 내내 기분이 묘했는데,
이걸 정말 설레는 첫사랑의 맛이라고 소개한 출판사의 소개글에 무척 공감한다.
소년들은 소녀를 만나 소중한 존재에 눈을 뜬다.
평범하고 고독한 존재들의 특별한 사랑 이야기도 있고
세상의 중심에 서서 지키고자 했던 것들을 되찾고 마침내 행복해지는 이들도 등장한다.
사랑하는 이에게 향하는 마음을
숨이 되어 다가가는 것으로도, 고양이가 되어 다가가는 것으로도 표현한
엇갈린 마음 이야기를 다룬 <한밤의 미스터 고양이>는 애잔하다.
평범하다 못해 늘 아이들에게 밟히고 차이는 찌질한 네 소년의
순수하고 건강한 성적 판타지가 담긴 <굿바이, 지나>는 웃픈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디스토피아 같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 <무나의 노래>는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인 세계를 통해 '상실'을 말하고 상처를 건드란다.
호텔 숙소에서 일하며 두 팔이 없는 동생을 씩씩하게 돌보는 소녀 이야기 <수영장>.
동정이나 연민 따위가 그녀에게 다가설 여지란 없다.
<고백>은 한 문장 한 문장 그리움과 설렘, 서글픔이 동시에 묻어나는 이야기다.
'무수히 빛나는 해파리들이 둥둥 떠다니는 기분'을 선사하고
주위가 너무도 환해져서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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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도 예쁜 작가님 사인이 담긴 책.
선물 받은 지 한참 지났는데 이제야 읽었다.
최상희 작가님 책은 처음 접했는데, 문장이 참 담백하고 예쁘다.
상처와 치유에 관한 개성 듬뿍 담긴 이야기들을 담은
≪바다, 소녀 혹은 키스≫는 2016년 대산창작기금을 받은 책.
전작 ≪델 문도≫는 사계절문학상을 받은 책으로
청소년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받았다.
세상 어딘가에서 일어날 법한
마법 같은 인생 여행을 담은 단편집 ≪델 문도≫를 얼른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