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의 정치사상 세트 (전3권) (반양장) - 전체주의의 기원 + 인간의 조건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나 아렌트 지음, 이진우.박미애.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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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모르 문디,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세계에 대한 사랑 '아모르 문디'를 기본 전제로 삼아 "인간의 조건"을 사유한 한나 아렌트. 이름만 들어봤지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떠한 일을 했는지 전혀 몰랐던 나로서는 '아모르 문디, 한나 아렌트의 정치 사상 세트' 중 "인간의 조건"을 만나면서 생소한 경험을 한 셈이다. '정치철학자'라는 칭호를 거부했다는 그녀지만 아무리 읽어도 그녀의 저서는 정치철학적이다. 이 책을 출간한 한길사에서조차 그녀의 책 상당량은 표면적으로는 정치에 관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보도자료를 구성했는데, 그렇담 나는 뭐지? 나 이렇게 책 읽는 눈이 없는 건가!
쪼개읽기를 통해 중간 정리를 해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어렵다. 더군다나 이 책은 강연들에서 발전한 것이라는데 몇 차례 도돌이표 걸린 듯 되돌아가 읽어도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이 내용들을 강연 한 번으로 듣고 이해한 분들은 정말 머리가 비상하다 싶다.

 

 

 

 

 

 

 

이 책의 가장 명백한 조직 원리는 인간의 조건을 위한 근본적인 세 가지 활동 형식에 관한 현상학적 분석에 있다.

유년기와 청소녀기, 어머니를 통해 유대인의 삶을 이해하였다는 한나 아렌트는 대학에 진학 후 하이데거와 후설과 야스퍼스의 지도를 거치니, 그야말로 거장들과 교류한 셈이다.
그녀는 활동적 삶이라는 개념으로 인간의 세 가지 근본 활동, 즉 노동/작업/행위를 표현한다. 그녀가 본 노동은 인간 신체의 생물학적 과정과 일치하는 활동이기에 노동의 인간적 조건은 삶 자체다. 작업은 인간의 실존에서 비자연적인 부분에 상응하는 활동이며, 각각의 개별적 삶은 그 경계 안에 자리 잡고 있지만, 이 세계 자체는 개별적 삶보다 더 오래 지속되고 이를 초월하는 것으로 여겨지기에 작업의 인간적 조건은 세계성이다. 행위는 사물이나 물질의 매개 없이 인간들 사이에서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 유일한 활동이며 다수성이라는 인간의 조건, 즉 한 인간이 아니라 다수의 인간이 이 지구상에 살고 세계에 거주한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따라서 다수성은 모든 정치적 삶의 필요조건이자 가능조건이라는 의미에서 절대적 조건이다.

이처럼 세 가지 활동과 각각의 조건들은 인간실존의 가장 일반적인 조건, 즉 탄생과 죽음, 탄생성과 사멸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특히 행위는 정치적 활동 그 자체이기 때문에 사멸성이 아닌 탄생성은 정치적 사상의 핵심 범주가 된다. 이것은? 결국 한나 아렌트가 정치에 큰 중심을 두었던 사상가라는 의미 아닌가? 일단 이 책 "인간의 조건"을 읽는 동안 그녀가 정치사상가였냐 아니냐를 논하려던 건 아니니 넘어가기로 한다.

 

 

노동
'노동'은 노동의 결과인 완결된 생산품을 지시하지 않는다. 반면 생산품 자체는 한결같이 '작업'이라는 단어에서 도출된다. 원래 노동에 대한 경멸은, 고대에서는 필연성에서 벗어나 열정적으로 자유를 추구하는 노력과 어떤 흔적이나 업적, 기억할 만한 위대한 일을 남기지 않은 모든 수고에 대한 성급한 조바심에서 생겨났다. 이로써 노예가 정당화되었다. 삶의 유지에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직업들은 모두 노예적 본질을 가지기 때문에 노예의 소유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즉, 노동하는 것은 필연성에 의해 노예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모든 전통을 뒤집고 행위와 관조의 전통적 지위뿐만 아니라 활동적 삶 안의 전통적 위계질서를 뒤집으며 모든 가치의 원천인 노동을 예찬하고 전통적으로 이성적 동물이 차지했던 지위로까지 노동하는 동물을 끌어올린 근대는 그러나 노동하는 동물과 호모 파베르, '신체에 의한 노동과 손에 의한 작업', 이 양자를 분명히 구별하는 하나의 단일 이론을 제시하지 못했다. 대신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별을, 그보다 조금 후에 숙련 작업과 비숙련 작업의 구별을 발견하는데, 이 두 구별은 마지막에 모든 활동을 신체노동과 정신노동으로 나눔으로써 열외로 밀려난다. 마지막 구분이 가장 근본적인 구분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작업
육체노동과 구별되는 우리 손의 작업은 무한히 다양한 사물을 제작하며, 이 사물의 총계는 인공세계를 구성한다. 이것들은 대개 사용물건이고 지속성과 가치를 지니며, 전자는 소유의 확립을 위해 로크가 필요로 한 것이고 후자는 애덤 스미스가 교환시장을 위해 필요로 한 것이다. 사용물건은 마르크스가 인간본성의 증거라 믿었던 생산성을 입증한다. 사용물건은 적절히 사용하면 사라지지 않고 세계의 지속성과 견고성을 부여한다. 이런 지속성과 견고성이 없다면 인공세계는 불안정해져서 유한한 운명을 가진 인간의 거처가 되지 못한다. 사람들이 단일 사물을 사용함으로써 지속성이 소모된다. 작업과 노동처럼 사용과 소비가 같지 않더라도 이것들은 중요한 영역에서 서로 중첩되므로, 소모 과정이 사용물건과 소비하는 유기체의 접촉을 통해 발생하는 한, 사용은 소비라는 요소를 포함한다.
호모 파베르는 언제나 자연의 파괴자였고 전 지구의 군주이자 지배자처럼 행동한다. 신은 무에서 창조한다면 인간은 주어진 물질로 창조하니, 즉 신이 창조한 자연을 파괴함으로써만 인공세계가 건설될 수 있다. 호모 파베르의 관점에서 인간은, 도구를 만드는 자(벤자민 프랭클린)다. 노동하는 동물의 노고를 덜고 노동을 기계화하는 이 도구들은 사물세계의 설립을 위해 고안되고 발명되었다.
인간의 삶의 과정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도구를 발명한 생산자 호모 파베르의 인간중심적 공리주의를 칸트는 '모든 인간은 결코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며, 모든 인간존재는 목적 자체다'라고 표현하였다. 인간이 제작자인 한, 그는 모든 것을 도구화하며, 그의 도구화는 모든 사물이 수단으로 전락하다는 것, 즉 내재적이고 독자적인 가치를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행위
모든 유기체 중 오직 인간만이 자신을 타인과 구별할 수 있고 이 차이를 표현할 수 있다. 인간이 존재하는 모든 것과 공유하는 다름과, 살아 있는 모든 것과 공유하는 차이는 인간의 유일성이 된다. 인간의 다원성은 유일한 존재들의 역설적인 다원성이며 말과 행위는 이 유일한 차이를 드러낸다. 말과 행위를 통해 우리는 인간세계에 참여한다. 대부분의 행위는 말의 방식으로 수행되지만 행위와 시작함의 친화성은 말과 시작함의 그것보다 더 강하다. 말 없는 행위는, 행위하는 주체가 없기 때문에 더 이상 행위가 아니다. 행위자는 그가 동시에 말의 화자일 경우에만 행위자일 수 있다.
언어와 행위로 분명히 드러나는 인격은, 그것이 아무리 분명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말로 명료하게 표현할 수 없다. 인간의 행위는 무대 뒤의 보이지 않는 손에 조종되는 인형의 동작과 비슷하며, 인간은 일종의 신의 장난감처럼 여겨진다. 행위와 말의 구체적 내용과 일반적 의미는 예술작품에서 다양한 형태로 물화된다. 행위자는 언제나 행위하는 다른 존재들 사이에서 그리고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그는 단순한 '실행자'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고통받는 자다.

 

 

 

 

 

 


한나 아렌트가 시카고대학교에서 진행한 강연들, '마르크스주의 내에서 전체주의적 요소'에 관한 훨씬 더 방대한 프로젝트에서 나온 결과물들이라 하니 마르크스이론에 대한 일종의 이해 없이는 이 책에 대해 자세히 이해할 수 없다고 스스로를 위안삼아본다. 어쨌든 한나 아렌트는 도외시된 인간 역량들을 되찾고 해명함으로써 정치철학의 전체 전통에 이의를 제기하고자 했으며, 노동자 사회에 대해 현상학적으로 이해하고자 했음이다. 그녀는 사유하고자 하였으며 우리에게 사유하라고 권한다. 일단 사유하는 척하고 넘어간다.
그녀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활동은 세계에서 자신의 적절한 위치를 가리킨다. 활동적 삶의 주요 활동인 노동, 작업, 행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선한 일을 인간행위의 근본적인 가능성 중 하나로 생각해왔는데 어쨌든 선을 사랑하는 자는 결코 고독한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게 그녀의 입장이다.

 

정치의 치명적 중요성을 상기시키고, 우리의 정치적 역량과 그것들이 제공하는 위험과 기회들에 관한 올바른 이해를 상기시키는 것, 인간 탄생성과 시작의 기적을 상기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세운 "인간의 조건". 한 번 읽는 것만으로 그녀의 사상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그냥 바라지 않기로 했다. 재독의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한나 아렌트의 다른 도서들도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좀 더 긍정적으로 힘을 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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