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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취향 ㅣ 채석장 시리즈
아를레트 파르주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3월
평점 :
인문 에세이 시리즈 채석장 2번, 아카이브 취향
18세기 고문서 더미에서 건져 올린 민중들의 삶!
문학에 단짠이 있다고 한다면, 문학과 지성사의 인문 에세이 시리즈 채석장의 두 번 째 책 "아카이브 취향"은 '단'이겠다. "정크 스페이스"에서 헤맸던 나는 "무대"에서 약간의 체념을 한 상태로 "아카이브의 취향"을 집어들었고, 이는 성공적 선택이었다. 인문 에세이에서 인문을 뺀 느낌, 사실 인문을 밑바닥에 깔고 있음에도 소설 같고 에세이 같은 부드러운 느낌이다. 이렇게 느끼는 건 어쩌면 앞선 책들 덕분일 수도 있겠다만.
프랑스 파리의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 중 하나로 꼽히는 아스날 도서관 지하 서고에 18세기 각종 형사사건과 관련한 대량의 문서가 보관되어 있다. 바스티유에 수감된 죄수들의 심문 기록, 재판 기록, 각종 고발장, 18세기 경찰이 벽에 뜯어낸 불법 벽보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으니 열어보기 전까진 그저 '뭉치'였을 수도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정보화 시대에 자료를 베끼는 작업이라니, 얼마나 뒤떨어지는 일이냐 싶겠지만 아카이브에서 필사자료를 접한 작업자는 그렇게 자료를 베낌으로써 자료 속 문자들이 만들어내는 거친 흐름과 한편이 되고 싶어진단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 흐름을 벗어나고 싶어지기도 한다니, 친숙함과 거리감 일타쌍피를 원하는 심정이겠다. 자료를 한 조각 한 조각씩 그대로 베껴나가는 수작업 과정은 시간의 한 조각을 길들이는 일이다.
기록물에서는 프랑스 파리 자체가 중요 등장인물이다. 크고 작은 사건들에 반응하는 과밀 도시 파리라는 도시에 몰아닥치는 사건이나 사고들은 그대로 파리의 모습으로 기록된다. 파리가 법규를 지키지 않는 도시, 상부의 명령을 절대 듣지 않는 시끌벅적하고 활기차고 익살스러운 도시였음을 누가 알았으랴. 이는 경찰 문건, 즉 아카이브가 내보인 속살이 아닐 수 없다.
파리를 들여다보던 아카이브 작업자는 드디어 파리 이곳저곳의 군중을 만난다. 구걸하는 사람, 괜히 돌아다니는 사람, 억울한 사람, 남의 것을 훔친 사람, 음란한 짓으로 소동을 일으킨 사람 등등 갖은 모습의 파리 사람들이 치안 문건을 통해 줄줄이 끌려 나온다. 아카이브라는 그물에 걸린 배우들의 진실하기보다 강력한 대사가 드라마를 써내는 것이다. 아카이브 작업자는 여기서 실재의 형상들을 배치하기도 한다. 아카이브가 실재와 언제나 무한히 다양한 방식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결국 파리의 여자들도 만나기에 이른다. 얼마나 다양한 여성들이 존재하는가. 아카이브 작업자가 자료 속에서 만난 어마어마한 진술들 덕분에 여성사를 집필하는 데 무리가 없을 정도이다.
이처럼 아카이브는 담론에 가려져 있던 것들을 엿볼 수 있는 곳, 규범적인 행동이나 정형화된 행동이 파기되면서 다양한 행동들, 의외의 행동들, 그야말로 틀을 벗어나는 행동들이 출현하는 곳인 만큼, 불규칙적 요동으로 선율을 만들어낸다.
아키이브 작업자는 아카이브를 토대로 작업한다. 그러나 욕망의 대상으로는 삼지 않은 채, 아카이브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 허구를 가미하지도 않고, 연구 대상을 보편화하는 시각을 버리고, 당시 상황을 최대한 정밀하게 셍고해 글을 쓰는 것, 자신의 생각을 덧씌우지 않는 것 등 위험 요소를 경계한다. 이로써 완료된 결과물로서의 역사책이 탄생한다. 아카이브에 대한 글을 쓰면서 자신의 아카이브 작업을 아카이브로 남기는 아카이브 작업자의 센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를 주로 연구한 프랑스 역사학자로 파리 형사사건 아카이브를 기반으로 여성, 빈민, 대중 행동 등의 주제를 연구해온 아를레트 파르주. 죽은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가 아닌 살아 있는 존재들 사이의 대화에 참여하기 위해 아카이브가 필요하다는 작가의 말을 곱씹으며 문학과지성사 인문 에세이 시리즈 채석장 두 번째 책 "아카이브 취향"을 덮는다.
리딩투데이 함시도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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