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창과 유리창 사이, 무수히 많은 밤이 뛰어올라

무수히 많은 밤이 뛰어올라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서혜영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11월

유리창과 유리창 사이, 무수히 많은 밤이 뛰어올라

믿으니까 보인다. 믿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그 사람하고 언제까지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목소리가 들릴 때 놓치지 말고 다 듣는 게 좋을 거예요.
최종면접에서 떨어져 낙심한 쇼타는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우연히 고층 빌딩에 매달려 유리창을 닦는 사람을 발견한다. 그 후 충동적으로 그 일에 뛰어든 쇼타, 단순히 생계 유지 수단에 불과했던 일이었기에 무기력하고 무의미한 일상은 여전하다.
목숨을 두 줄에 매단 채 위태롭게 빌딩 바깥으로 오르내리며 일하는 와중에 쇼타는 점점 허공에 매달려 일하는 게 익숙해지면서 죽음에 대해 무감각해진다. 실제로 자살도 생각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다. 얼마 전 죽은 선배의 목소리다.

격차는 위와 아래에만 있는 게 아니야. 같은 높이에도 있어.
쇼타는 고층 맨션 유리창을 닦던 중 한 노부인과 눈이 마주친다. 그런데 노부인은 유리창에 자신의 집 호수를 립스틱으로 적어 그를 초대하는 형식을 취한다. 이 초대에 끝내 쇼티가 응하면서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절대 만날 일 없을 것 같던 두 세계, 유리창 바깥의 삶과 유리창 안쪽의 삶이 이어진다.
노부인은 쇼타에게 그가 작업하는 고층 건물들 안쪽의 사람들을 사진으로 찍어 달라고 부탁한다. 이는 자칫 범죄일 수 있지만 쇼타는 기묘한 노부인의 기묘하고도 위험한 제안을 받아들인다. 대학을 졸업한 후 이렇다 할 인간관계도 없이 가족과도 거의 단절된 채 살아가던 쇼타에게 어쩌면 맨션 안에서만 생활하던 노부인은 바깥으로 향하는 출구였을지도 모른다. 노부인에게도 쇼타는 바깥의 빛을 가져다주는 특별한 존재였으리라. 노부인과 쇼타는 서로의 삶 중 일부를 공유하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낸다. 왠일인지 노부인과 함께할 때면 쇼타의 귀에는 죽은 선배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유가 뭘까!

마음을 나눴다고 믿던 존재가 어느 날 연락도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면 어떤 기분일까? 아마 노부인은 쇼타가 가족에게 돌아가길 바란 염원이 뭉친 존재가 아니었을까. 분명 며칠 전까지 그 맨숀에 살았음을 경비원들에게 확인받았음에도 왠지 식스센스가 연상되는 이 마무리. 옮긴이는 50년의 틈, 구조적인 데다 계급적 차이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스물셋의 쇼타와 노부인의 만남이 있었을 거라 짐작했지만 난 그냥 식스센스화라고 믿기로 한다.
제161회 아크타가와상 최종 후보작에 오른 사회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의 의 젊음의 초상 "무수히 많은 밤이 뛰어올라". 경쟁사회에 내몰린 젊은이들의 취업난과 자존감 상실, 단절된 관계며 사회, 격차에 대한 이야기들이 지금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도 스며들어 있겠구나 하며 책장을 덮는다.

리딩투데이 지원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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