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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 살아남았으므로 사랑하기로 했다
김현 지음 / 원너스미디어 / 2020년 7월
평점 :
전쟁통에 고아가 된 빨갱이 딸의 인생 노래,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쉿! 네가 살 길은 그저 없는 아이처럼 조용히 숨만 쉬는 거야.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배제학당을 졸업하고 경성제대에 들어간 수제였던 아버지는 공산주의 사상에 찌들어 있었다. 그래서 6.25전쟁이 터진 후 가족을 데리고 거침없이 월북했다, 딸 마리아는 남쪽에 남겨둔 채.
졸지에 홀로된 네 살배기 마리아는 그때부터 외할머니와 '이모엄마'의 보호 아래서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불안한 세상, 빨갱이짓을 했던 아버지 때문에 그와 연루된 모든 가족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다. 그나마 고아원에 던져지지 않은 걸 감사히 여겨야 했을 정도로, 사람들은 전쟁 때의 설움과 울분을 빨갱이 가족들에게 수시로 풀곤 했다.
그러나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마리아를 향한 이모엄마의 보호는 오래가지 않았다. 자식을 못 낳는 부인을 핑계로 첩을 여섯이나 들인 이모부 때문에 복잡한 심경이었던 이모엄마는 마리아에게 그 화풀이를 해댔고 끝내 열일곱 살 마리아를 내쫓았다.
마리아는 열일곱 나이에 집도 가족도 없이 혼자 거리를 헤맸고 다행히 여군에 입대한 채로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이후 마리아는 미군 부대에서 일하게 되었고 돈을 조금 모은 후에는 이혼한 이모엄마를 모셔와 함께 살았다. 미군부대에서 받는 급여는 이모엄마가 놀랄 정도로 넉넉했고 두 사람은 과거와는 비할 데 없이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던 중 마리아는 헌병대장으로 부임한 새파랗게 젊은 소위 존을 보스로 맞는다. 책이라곤 플레이보이 잡지만 뒤적일 줄 알던 미군 사이에서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를 든 유일한 청년이었다. 그때까지의 삶에 온통 빨갱이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 이모엄마에 대한 고마움과 원망으로만 뭉친 삶을 살았던 마리아에게 존은 그야말로 하느님이 보내신 구원 같았음이다. 이제 마리아는 존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는데...
살아남았으므로 사랑하기로 했다. 왠지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포기하는 기분이 먼저 느껴지는 마리아의 독백이 아닌가.
일제강점기를 벗어나자마자 터진 한국전쟁에서 이념을 벗어던지지 못한 채 네 살 딸아이를 남겨둔 채 나머지 가족과 함께 월북해버린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글의 처음부터 끝까지 퍼져 있다. 그리고 부모를 대신해 자신을 키워준 차가운 성격의 '이모엄마'에 대한 고마움도 자칫 자신을 진짜 딸처럼 대해주지 않은 원망에 묻힌다.
네 살, 이 나이에 형성되었어야 할 애착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어쩌면 저자는 평생을 고마워하는 마음보단 원망하는 마음을 뼈 속 깊이 새겨버린 것일까. 마리아에게 어떤 이유를 들어서도 돌을 던질 수는 없겠다. 게다가 겉으로 보기에 마리아는 치매에 걸린 이모엄마를 임종 때까지 돌보았으니 애정과 증오는 하나의 덩어리로 뭉친 게 아닌가 싶다.
가족과 떨어져 살가운 마음 갖지 못한 채 삶을 꾸려야 했던 마리아, 먹고살기 위해 여군에 지원하고 마침내 자유와 희망을 꿈꾸며 미국으로 건너간 그녀에게 이제 이념이 아닌 인종에 대한 차별이라는 새로운 시련이 시작된다.
가난과 차별을 경험하고 맞서며 생존의 의지를 불태웠던 그녀의 실화 사연, 김현 작가의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