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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
사샤 스타니시치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평점 :
출신-이곳, 넌 이곳에서 왔다

거기 공동묘지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있는 이들이 없었으면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이들
이 모든 게 이렇게 시작되었다
혈통과 출생지가 분류 기준의 특징으로 이용되고
국경선이 새로 정해지고
여러 개의 소국으로 분립된 나라의 메마른 늪에서 국익이 등장한 시대에,
그리고 타민족 배척이 정책 프로그램으로 다시 채택될 가능성이 높은 시대에,
나와 우리 가족의 출신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내겐 진부하고, 참으로 파괴적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사샤는 삶의 곳곳에서 자신의 '출신' 흔적을 발견한다.
자기 조상들이 묻힌 산속 무덤에서도
가끔 소녀가 되고 혼자서만 볼 수 있는 소녀와 대화를 나누는 할머니에게서도
같은 한때를 겪은 나이 많은 이웃 할아버지에게서도
틈만 나면 부둥켜안고 춤을 추던 부모님에게서도
자기보다 어린 사촌의 남편 이름에서도
누가 썼던 건지도 모를 마당에 버려진 낡은 매트리스에서도
심지어 사촌이 낳은 조카에게서도...
온통 출신이었다!

전쟁으로 사라져버린 나라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다른 곳에 둥지를 틀고 그곳 출신이 되어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30년도 채 되지 않는 1992년 보스니아전쟁으로
많은 이가 새로운 국적 취득을 위해 자필 이력서를 써야 했다.
이 이력서가 작가 사샤 스타니시치에게는 추억을 곱씹는 계기가 되었음이다.
자신을 지금껏 문제없었고 앞으로도 문제없을 사람으로 제대로 포장하기 위한 작업이었기에
이력서에 문장 하나를 적을 때마다 갖가지 기억이 소환된다.
이 기억들조차 꼭꼭 씹어보고 문제없을 만한 것들만 선별해 소중히 포장해야 하는 작업
이 과정을 제대로 해내야만 새로운 출신을 따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추억은 홍수 같다.

사샤는 현실 속을 엄청 헤집고 다니는가 싶더니
냉큼 공상을 끌어들인다.
요정들의 노랫소리,
투명한 날개를 가진 머리 셋 달린 용,
그 용에 올라탄 채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할머니,
조부모님의 해후를 지켜보는 자신...
이내 현실 속 자신이 마주한 할머니의 장례식!
소설인지 자서전인지 판타지인지 아니면 내 꿈속인지에 상관없이
나는 사샤의 문장에 취해 계속 끌려다닌다.
아, 안 되겠다!
리뷰를 쓸수록 내 감흥이 훼손될 것 같은 책
2019 독일도서상 수상작 "출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