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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호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10월
평점 :
제0호, 결코 발행되지 않을 신문의 배후에 도사린 거대한 미스터리
교통사고에 관한 기사를 쓸 때, 그 기사를 기자의 입맛에 맞게 조작하는 방법은?
목격자의 증언이나 행인의 말이나 여론의 대변자가 될 만한 사람의 논평을 기사에 끼워넣으면 된다.
그러한 진술들은 일단 인용이 되면 사실로 바뀐다.
이때 기자가 자기와 의견이 같은 사람에게만 발언권을 주었으리라는 의심을 피하려면?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주장을 실으면 된다.
서로 다른 의견들을 같이 보여주어야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건을 보도한 것이 된다는 것.
대신 표 나지 않게 하는 게 기술이다.
1992년 싸구려 글쟁이로 변변찮은 직장을 전전하는 나는
창간을 앞둔 신문사 <도마니>의 부름을 받는다.
나는 내일이라는 뜻의 <도마니> 신문사 주필의 대필 작가로서,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내일이 없는, 끝내 창간되지 않을 신문 [제0호]의 제작 과정에 투입된다.
편집부에서 벌어지는 제작 과정의 역사를 기록하는 게 나의 임무.
시메이 주필은 신문이 창간되지 않아 일자리를 잃게 되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폭로할 내용을 세세히 담아두길 바라고 나는 그와 비밀을 공유한다.
<도마니>에서 함꼐 일하게 된 여섯 명의 기자에게
나는 일종의 고문 역할로 신분을 위장하고 창간 예비 판 {제0호]를 위해 일한다.
하지만 연이은 편집 회의에서 그들은 진실보다는 특종에 갈증을 느끼는 대중을 위한
자극적인 기사 작성법 논의에 매달린다.
제목만 바꾼 채 재탕하는 뉴스거리 등 [제0호]가 준비한 기획물은
엉터리 저널리즘의 표본이라 할 만한 것들이었는데...
뉴스들이 신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신문이 뉴스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뉴스를 만들어야 하고, 행간에서 뉴스가 튀어 나오게 하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신문사 창간과 제작 과정에 자금을 대는 이는 세력가 비메르카테.
그는 큰 신문을 이끄는 엘리트의 세계를 장악하고 거물들의 비밀을 움켜쥐고 있다가
적절한 순간에 자신의 영향력을 입증하고자 신문사를 창간하려는 것이었다.
즉, 거물들을 궁지로 몰아넣고자 하는 협박용 언론이 그 목적이었던 것이다.
무지몽매한 대중을 어떻게 속이고 휘두를지를 논의하는 편집 회의.
그러던 어느 날, 무솔리니가 두 명이었을 가능성이라든지, 교황, 정치가, 테러리스트,
매춘, 은행, 마피아, CIA 등에 얽힌 약 100여 가지의 사건을 조사하고 다니던 기자 브라가도초가
등에 칼을 맞고 살해된 채 발견된다.
비메르카테는 신문사 창간을 없던 일로 하겠다고 나서고
주필 역시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 나에게 맡겼던 일을 없던 일로 정리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시, 또 한 사람이 자취를 감추는데...
내일이 없는 내일 도마니.
그 창간 준비 과정과 편집회의, 사건 나열 등에 집착하면서
움베르트 에코는 과연 하고자 하는 말을 다 했을까?
특종을 강요받는 저널리스트, 그 취재 과정에서 희생양이 되고 마는 대중.
그 사이를 작가는 애정과 연대로 메우려 한다.
언론과 권력에 대한 풍자로 가득한 이 책은
처음에는 페이지를 빨리 넘기기 힘들고
중간에는 페이지를 휙휙 넘기기 힘들며
마지막까지 머리를 싸매게 만든다.
(아마 여유 없이 읽어서가 아닐까 싶지만)
유령작가의 시선으로 담아내는 황색 저널리즘을 다룬
움베르트 에코의 마지막 소설 ≪제0호≫.
공정성을 잃은 보도와 단말마의 포르노적 정보 공세에
사람들이 속았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스캔들, 범죄, 거짓, 폭력... 가짜 뉴스는 오늘도 내일도 당신을 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