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다는 말은 차마 못했어도 슬로북 Slow Book 3
함정임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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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는 말은 차마 못했어도, 쓰는 수밖에 없었다


안부를 묻고 손을 내밀어 보듬어 안고 다독거리고



 

 



해 질 녘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들었던
범종각의 저녁 종소리,
버지니아 울프 소설 "댈러웨이 부인"에서
런던 사람들에게 시간 감각을 일깨워주던 빅 밴의 종소리,
그리고 반 고흐가 숭배했던 밀레의 그림 <만종>의 세계까지.

작가는 종소리가 들리기 직전,
귀가 솔깃하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뜨거운 느낌이 좋았다고,
마치 댈러웨이 부인의 설렘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고 고백한다.




 

 



 

나는 해운대 달맞이 언덕에 살고 싶었다.
바다가 보이는 그곳, 언덕길을 걸으며 센티해졌다.
그냥 그대로 그 시간이 좋았다.
그래서 그곳에 둥지를 튼 작가가 부러웠다.

이제 와 돌이켜보니 그날의 추억이 좀 퇴색했다.
왠지 사색에 잠겨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넋 놓고 걸었던가 싶어 반성하게 되었다.
이로써 내 추억은 좀먹었다.
그 길을 함꼐 걸었던 이는 제쳐두고 다른 이를 떠올리기도 했다.
이로써 깊이 숨겼다고 생각한 마음이 잠깐 드러나 당황스러웠다.
그 순간의 외도를 지우고 싶어졌다.
이로써 추억이 추억답지 못하게 되었다.

알프스 산자락의 남쪽과 지중해 북쪽이 만나 펼쳐지는 곳,
쪽빛 해안이라 불리는 코트다쥐르에 가서도
내 추억은 여전할까?
잠깐 조바심이 난다.
르누아르, 피카소, 샤갈, 피츠제럴드 등 무수한 예술가들이
절경을 이루는 해안을 거처로 삼고 쓰고, 그리고, 찍으면서
독보적인 예술 이미지를 형성했듯이
문탠 로드라는 별칭을 가진 해운대 달맞이 언덕에도
예술적인 힘이 축적되기를...
그래서 내 추억이 민낯 그대로 간직되기를,
회상할 때마다 저절로 미소가 피어오르기를!



 

 

 



<내가 눈앞에 보고 있는 저 사람은 누구인가>
필명을 고안하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필명을 지어 그 이름으로 불리면
나의 삶이 바뀌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던 듯하다.
연극부에서 주인공을 맡았을 때 기뻤던 것도 그래서였다.
제법 예쁨받고 보호받고 사랑받으며 자랐는데
그런 배경은 소용이 없었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갈증이 정말 강했더랬다.
새로운 삶에 대한 갈망이 왜 그렇게 강했는지는 지금도 의문이지만
새로운 삶,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열망은 여전히 가슴 깊숙이에서 끓고 있는 듯하다.





 

 

 

 



데뷔 28년차 작가!
어마어마한 양의 독서와 고뇌와 사색과 내면 탐구로 쌓은
끝없을 지식과 지혜와 진언이 쏟아질 만하다.
주변에서 소설가 지망생의 치열한 노력과 삶을 15년째 지켜봐온 나로서는
데뷔 28년차라는 무게감이 얼마만큼일지,
취업하기 전부터 꾸준히 쌓은 스펙으로 치자면
그 속에 뭐가 들어 있을지 조금은 짐작 가능하다.
어쩌면 이것도 오만방자일지도 모르지만.

소설가 함정임. 그녀는 이름을 걸고 소설을 쓰기 위해
온갖 삶의 이야깃거리를 찾아 전 세계를 헤매고 다닌다.
수많은 문학작품 속에 파묻힌 채 혹은 우뚝 솟은 채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장소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배경이 되는 곳들을 답사하며
마침내 아름다움을 깨닫는다.
작품 속 주인공이 된다.
벅차오른다.
끝내 쓴다.
운명이다.

작가가 전하는 소설, 소설가, 여행지 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다 보니,
그녀가 전하는 치유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다 보니
내 고해성사가 되어버렸다.
시간이 흐른 후 내 삶도 누군가에게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을지.
혹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괜찮냐고 물으신다면
괜찮다는 말은 차마 못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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