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로 사랑하라, 허나 사랑에 속박되지는 말라.

차라리 그대들 영혼의 기슭 사이엔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의 잔을 채우되 어느 한 편의 잔만을 마시지는 말라.

서로 저희의 빵을 주되, 어느 한 편 빵만을 먹지는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그대들 각자는 고독하게 하라,

비록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외로운 기타 줄들처럼.

 

칼릴지브란, <예언자> 결혼에 대하여 중에서.

 

결혼에 관한, 그리고 결혼한 남녀인 부부에 관한 칼릴지브란의 목소리에서 우리는 어떤 영감을 얻어야 할까요? 자유롭고 독립적인 사랑,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사랑....

 

 

#2.

세상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인간관계는 부부관계다. 부부의 사랑은 따스한 봄빛아래 잉태하고 여름밤의 폭풍우처럼 휘몰아치며, 내장산 애기단풍처럼 세상의 온갖 빛깔로 무르익는다. 서로에 대한 신뢰는 사랑의 발화점을 넘고, 우정과 더불어 인간세상의 오만 속정을 아우르는 것이 부부의 내면성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이상적인 상황이고,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신혼이혼과 황혼이혼이 아니더라도 모범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부부가 과연 얼마나 될지 진정 궁금하다.

 

피한방울 섞이지 않았던 터라 등을 돌리기도 쉽고, 이미 가둔 물고기 같아 세심한 정성이 필요 없을 수도 있는 관계가 부부다. 생업을 위한 외부관계처럼 깍듯한 예의를 차리지 않아도 되고, 사랑의 열정이 식어도 당연시 되는 이상한 관계도 부부다. 사랑이 아니라 정()으로 산다는 유행가 가사 같은 공식이 지배하는 관계도 부부다. 조용필의 노래(정이란 무엇일까)를 들으면서도 그 정이 무엇인지 역시 궁금하다.

 

가정에서 아이들은 부모들을 보고 듣고 자란다. 생물학적 유전뿐만 아니라 부모로부터 비롯되는 사회학적 형질까지도 닮는다고 할 수 있다. 부모는 아이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듯이 부모의 삶의 궤적에서 자식들이 삶도 크게 벗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피로한 삶으로 인해 거칠어진 부모에게서 결이 고운 아이들의 성장을 기대하기도 쉽지 않다.

 

우리의 가정을 둘러싼 현실은 녹록치 않다. 자유롭고 공감하는 사랑을 꿈꾸고 실천하고픈 부부들도 막상 세태의 어려움이 녹아든 공간에서는 속박된 사랑조차도 어렵다. 우리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가정은 심포니오케스트라의 교향악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현악4중주 정도의 화음은 울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가정이 만들어내는 조화로운 화음의 이면에는 사랑, 웃음, 행복, 눈물, 갈등이 숨어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화음의 중심에 엄마, 아빠가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3.

* 부부의 이야기를 나누자

우리 부부는 네 아이를 키우다보니 생각보다 많은 대화를 한다. 아이들의 건강, 학교생활, 공부, 저녁식단문제까지 다양한 분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면서도 부족하지만 부부만이 나눌 수 있는 주제도 가끔씩 이야기하곤 한다. 애들 문제나 가정외부의 문제에 파묻혀 정작 소중한 부부 자신의 문제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늦은 밤 라디오를 켜놓은 거실에서 각각 책을 읽거나 빨래건조대에서 옷가지를 거두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것은 쏠쏠한 재미다.

 

주위의 친구나 선후배, 직장동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드라마에서 보는듯한 사이좋은 부부는 실제로 보기 드물다. 거칠고 힘든 세상이 주는 어려움으로 인해 서로를 살갑게 살피지 못하는 까닭일 것이다. 부부 서로의 얘기를 떠나서 아이들 교육문제, 빈약한 가정경제, 암울한 미래문제까지 겹쳐지면 부부 자신의 이야기는 사막의 모래알처럼 메마르기 십상이다.

 

남녀의 사랑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수렴되지만, 곧 가정이라는 틀 속에서 정()이라는 변주곡으로 연주되고, 결국에는 식구라는 연대감으로 변해간다. 그 과정 속에서 잔잔하게 진행되는 부부의 스토리가 빠진다면 알맹이가 빠진 밤송이와 같을 것이다.

 

부부 자신의 스토리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 가정의 중심을 부부에 두자

가장 훌륭한 부모는 자식을 소년등과시킨 부모가 아니라 자식으로부터 존경받는 부모다. 부모 자식 간의 관계가 돈독한 가정은 부부간의 관계도 좋은 편이다. 가정의 중심을 부부에 두고 있는 가정이라면 부부관계의 중요성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상당수의 가정에서는 그 중심을 부모보다는 아이들에게 두고 있다. 그러다보니 의사결정과정에서 부모보다는 자식의 입장이 중요하게 고려되고 우선시된다. 이러한 가정풍토에서는 부모가 소외될 수밖에 없고 결과적으로는 부부관계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부부관계의 결핍은 가정 내에서의 부모의 역할에도 문제를 일으켜 결국 악순환의 고리를 만든다.

 

인구에 회자되는 노년의 불행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의 부모님들이나 58년 개띠 부모님들의 불편한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 부모의 현재가 아이의 미래에 저당 잡히는 한국적 현실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가정의 무게중심을 부부에 두고 부모와 아이들 문제, 경제적인 문제를 다차원으로 설계해야만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사이좋고 대화가 잘되는 부모아래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존경할만한 자신의 부모를 마주할 확률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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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많은 상황을 마주한다. 세속적 리얼리티는 편하거나 불편하거나, 어렵거나 좌절을 주거나, 간혹 당혹스런 성공을 주거나. 때론 익숙지 않은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지만, 추론과 결론은 쉽지 않다.

 

부딪치는 상황 모두에서 답을 구할 수 있는 것인가?

가능성의 문제를 넘어서 그 해답이 의미 있을 것인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근심을 만들면서 생각하고 있다고 착각하지는 않는가?

 

우리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만들 때가 많다.”(루이 스퀴트네르, 프랑스 시인)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한다고 하는 것의 시점이 과거인 경우는 추억이거나 후회정도일 것이다. 그 시점이 미래인 경우는 기우에 가까운 걱정이거나 추측에 불과한 경우일 것이다. 이는 생각을 만드는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그 주체가 내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시점은 지금 현재이어야 한다.

 

내가 오늘이라는 현재를, 내 상황을 분명하게 집중해서 바라본다는 것이 생각이다.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진지하게 상황을 바라보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명확해진다.

 

비로소 내 생각을 하는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전제는 나의 존재와 내 생각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이 무엇이냐는 우문에 대한 현답은 나 자신이라는 존재이다일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눈을 감으면 온 우주가 눈을 감는 것과 같기 때문이. 11월의 붉은 나뭇잎과 청명한 가을하늘과 사랑하는 가족의 따스한 눈빛도 나라는 존재가 있기에 의미 있는 것이다.

 

나 자신을 존재하게 하는 것은 나의 생각과 오늘이다. 온전히 오늘이라는 현재를 생생하게 살아갈 때, 형식이나 외피가 아닌 실체적으로 존재할 때, 삶의 실존적 의미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삶의 리얼리티가 오늘에 토대를 두고 세상에 관한 인식의 뼈대를 세울 때, 좋은 삶은 시작된다. 좋은 삶은 오늘이 지나더라도 음미해볼 가치가 있는 삶이다.

 

당신의 오늘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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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의 아이들이 12년 생고생한 보람인 대입수능이 끝났다. 때마침 어떻게 알았는지 한파도 수능일을 잊지도 않고 찾아왔다. 배고픈 각설이도 아닌데. 전국의 유명사찰엔 수능수험생을 둔 부모들이 손이 닳도록 자식의 대박수능을 기원했다. 경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 아이만은 시험점수가 잘 나오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남의 학교 교문에 엿도 붙이고, 차가운 교문 아래서 온종일 기도를 드린 부모도 있었다. 마지막 종이 울리고 난 뒤의 풍경은 그야말로 마음이 뭉클해지고 왠지 짠해지고,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그런 감동어린 그림이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지 않아 아니나 다를까 출제기관이 여론의 뭇매를 맞는다. 변별력이 떨어진 물수능이라는 이유 때문에.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은 여러 입으로 여러 다른 얘기들을 쏟아놓는다. 학부모 입장에서 보면 그들의 말도 변별력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시험이 끝나면 주체인 수험생에 대한 위안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시원찮은 점수와 시험제도에 관한 불만만 남는다.

 

그렇다, 이 나라에서는 분별력과 변별력을 갖추기가 쉽지가 않다. 칼자루를 쥔 사람들은 분별을 모르고, 그들이 만들어낸 제도는 변별을 모른다. 어찌되었건 부모들은 이러한 풍토 하에서도(어쩌면 이런 풍토 때문에) 자식의 상위권대학 입학을 위해 온힘을 쏟아 붓는다. 그야말로 불확실성이 확실히 지배하는 한국 사회만이 만들어내는 병적인 열정이다. 내일을 모르고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누구든지 과잉된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의 진학문제에 관한한 부모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내 아이는 소중하니까.

 

 

#2.

서울 강남과 전남 무안에 거주하는 부모의 마음은 같다. 슬하에 자식이 몇 명이든지 모두 상위권대학에 진학해서 남보란 듯이 좋은 직장에 다니는 게 부모의 희망이다. 많은 부모들이 이러한 희망고문으로 인해 자식들에 미래에 대해 올인하고 있다. 부모들의 기대는 늘 아이들이 생각하는 그 이상이다. 이 격차를 메우기 위해 부모들은 아이들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교육투자를 결정한다. 이러한 결정을 행동편향이라고 한다.

 

행동편향은 똑같은 결과가 나오더라도 가만있는 것보다 행동하는 게 낫다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믿음 때문에 부모는 아이들의 능력이상으로 학습을 강요하고 그 대가로 불확실한 보랏빛 미래를 제시한다. 하지만 부모들의 행동편향에 의해 강요된 학습은 아이들보다는 부모를 위한 면피용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주식시장의 브로커의 반복된 투자나 정부의 변화무쌍한 교육정책도 이러한 행동편향의 일환이다. 증권브로커의 무책임한 투자유혹에 의해 누군가는 패가망신을 당할 수 있다. 특정 정권에 의한 교육정책의 잦은 변경과 사교육에 경도된 일부 부모들의 강요로 인해 아이들은 시들고 멍들어간다. 종국적으로 이러한 행동은 가정의 행복을 깨뜨리고, 근본이 흐트러진 사회는 조정능력을 상실 할 가능성이 크다.

 

 

#3.

부모가 고학력자이고, 현재의 직업이 안정적일수록 아이들에게 더 많은 노력을 요구한다고 한다. 아이들이 부모 이상의 성취를 이뤄서 무한경쟁사회에서 잘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럴 것이다. 교육정책을 담당하는 정부부처의 공무원도, 교육시스템을 토론하는 대학교수도, 소위 잘나간다는 변호사나 의사도 집에서는 부모로서 역할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 밖에서는 자기주도학습의 타당성을 주장하고, 성적에 목매는 교육현실을 지탄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부모로서 자식이 탁월한 성적과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소망스런 꿈이 되어버린 현실에서는 이상적인 이야기는 늘 남의 입장일 뿐이.

 

대학교수인 아버지가 사교육비에 500만원을 쓴다는 얘기, 강요된 학습과 성적지상주의에 빠진 부모로 인해 아이가 성적표를 조작했다는 얘기는 흔한 뉴스거리다. 일부 아이들은 자신을 학원으로 과외학습으로 내모는 부모들을 독친(毒親)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자신의 핸드폰에는 부모를 악마, 마귀, 대왕문어, 대왕오징어 등으로 저장해놓는 아이들도 있다고 한다. 이 모두가 부모의 욕심에서 비롯된 불편한 사회현상이다. 우리 부모들의 욕망 때문에 아이들이 힘들어하지 않게끔 절제할 수는 없는 것일까?

 

세상을, 인생을 잘 살아가게 하는 참된 원동력은 무엇일까? 독친으로 표현된 부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대학과 사회적 지위, 과시 가능한 경제력일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정답도 없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인생관과 가치관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대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을 경쟁사회라는 무한궤도의 쳇바퀴로 만드는 것은 바람직해보이지는 않는다. 부모의 바람대로 아이들이 성장하더라도 과연 그들이 행복할 수 있을까? 자신들의 선택권이 제한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성취가 가져다주는 만족감이 얼마나 있을까? 오히려 도구적 삶을 살게 하고 유희적 삶을 알려주지 못한 부모들을 책망하지는 않을까?

 

부모들의 삶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인생도 불확실한 하루하루의 연속일 것이다. 스스로가 모종의 불안감 속에서 책임져야할 선택을 하고 그에 걸맞은 결과에 만족하는 삶이 오히려 소망하는 삶이 아닐까? 불안하더라도 아이들이 자신의 미래를 계획하고 스스로의 행동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도록 지켜봐줄 수는 없을까?

 

 

#4.

아이들은 학원수업과 삼각 김, 컵라면이 주는 차가운 현실보다는 따뜻한 저녁식탁과 화기애애한 대화가 오가는 거실이 그리울 것이다. 자신들의 소소한 이야기를 들어주고 사랑스런 미소를 보여주는 부모를 기대할 것이다. 공부나 성적보다는 오늘이라는 하루의 삶과 순간의 행복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그런 부모를 바랄 것이다. 자신들이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주인정신을 가질 있게 하는 조언자로서의 부모를 고대할 것이다. 성적표에 눈을 맞추기보다는 자신의 꿈 이야기를 들어주고 어깨를 두드려주는 인생의 선배로서 부모를 원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부모들은 과연 그러한가? 그들의 바람을 알고(혹은 알기위해 노력하고) 있을까? 등산복패션처럼 획일화된 우리 부모들 세대의 속류화된 선택의 과오를 아이들에게 대물림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삶의 다양성이 결핍된 사회가 주는 속 좁은 직업에 관한 관념화의 오류를 아이들에게 물려주는 게 타당한 것일까? 성공한 수능이 아니더라도, 원하는 대학이 아니더라도 인생이 망하거나 세상이 지 않는다는 단순한 진실을 왜 외면하려는 것일까?

 

부모는 아이들의 선택을 존중해주고, 아이들이 바라는 바를 믿고 기다려주는 존재가 되면 안 되는 것일까? 부모들의 신뢰를 통해 아이들은 다양한 경험에 대한 용기를 갖고 세상의 불확실성을 보다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수능실패와 대학진학의 실패가 인생의 실패가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진실이다. 이 진실을 아직 경험치가 부족한 아이들이 알 수 있을 때 아이들의 세상은 훨씬 넓어져갈 것이다.

 

우리 부모들이 학원으로 과외교실로 아이들을 이끌기보다는 이러한 평범한 사실을 아이들과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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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14층 아파트 옥상위에서 멍한 눈으로 잿빛하늘을 바라보며 서있다. 다른 누군가는 한강대교 중간에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또 다른 누군가는 고등학교 5층 옥상위에서 텅 빈 운동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러한 장면에서 얼마든지 긍정적인 마무리로 스토리를 구성할 수 있지만, 우리 사회는 이러한 장면을 비극으로 만들고야 마는 어두운 면이 있다.

 

경제적인 문제로 일가족이 운명을 달리하고, 취업을 비관한 취업준비생이 세상을 달리하고, 성적문제 때문에 괴로워하던 학생이 꽃다운 생명을 버리는 안타까운 사연은 하루도 빠짐없이 뉴스거리가 된다. 어떤 문제의 심각성이 이들에게 절망을 주었을까? 개인적인 문제를 넘어서 우리사회의 어떤 측면이 이들에게 그토록 비극적인 선택을 하도록 했을까?

 

개인에게 선택이라는 단어는 지나치게 매혹적이다. 특히나 자유라는 말과 더불어 사용될 때는 이상한 마력을 발회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유로운 개인의 선택이 매력적인 경우는 그 영역이 정당한 개인의 영역이고 그 개인에게 선택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경우에 한정된다. 다시 말하면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의 영역에서나 개인이 책임질 수 없는 영역에서의 강요된 개인의 선택은 이미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유형의 선택은 선택이 아닌 강요이고 억압된 자유라고 할 수 있다.

 

재앙사회에 가까운 우리사회는 언제부턴가 개인의 영역과 국가의 영역, 사회의 영역이 혼란스럽게 존재한다. 원론적인 측면에서는 어떨지는 모르지만, 개인의 영역이 확대되는 것이 마냥 바람직하지만은 않다. 이를 기화로 국가나 사회는 이 영역의 문제를 극히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사회안전망과 교육시스템과 경제적인 구조, 국가의 미래가 절대 개인적인 문제일수는 없다. 하지만 무책임한 우리사회는 부실한 사회안전망으로 인한 개인의 상실, 철학 없는 교육시스템으로 인한 아이들의 절규, 거미줄 같은 경제구조 속에서의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개인의 영역으로 분류한다.

 

일례로 한 달에 사교육비 400만원을 들여 공부시키는 강남의 아이와 방과 후 학습마저도 듣기 어려운 아이의 경쟁이 과연 정당한가? 많은 이들이 침묵 속에서 부당하게 생각하는 그 부정의가 우리사회의 경쟁의 룰이 된지는 오래전의 이야기다. 정당한 과정과 공정경쟁의 룰은 도외시하고 오로지 결과만을 생각하는 승자독식의 사회는 도구가 부족한 개인들에게는 절망의 다른 이름이다. 국가나 사회가 책임져야할 영역에서 많은 개인들은 자신의 것이 아닌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선택으로 인해 절망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다.

 

좌절하고 패배의 늪에 허덕이는 이들을 위로해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걸그룹의 현란한 몸동작에 환호하고 잔혹한 살인범에 공분하기도 하지만, 칼끝에 서 있는 개인들을 감싸주거나 위안을 주기위해 노력한 적은 별로 없다. 내가 혹은 당신이 이미 그 칼끝에 서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퇴로 없이 절벽 끝에 서있는 처연한 눈동자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 절망감을 가슴으로 안아주지 못할 때 우리는 인간의 영역에서 벗어난 존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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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네 살배기 막내가 아빠에게 묻는다.

아빠, 태윤이는 정말 싫어, 오늘도 친구들을 괴롭혔어

아빠가 답한다.

왜 친구들하고 사이좋게 지내지 않고, 너도 괴롭혔어

막내는 얼굴을 찌푸리고 한마디 더한다.

아니, 그게 아니고”(아빠는 왜, 내가 태윤이를 싫어하는 느낌을 알려고 하지 않을까?)

 

2인 셋째가 아빠에게 이야기한다.

아빠, 나 내일 학교에 안가면 안 될까?”

아빠가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 학교에 안가면 머할려고?, 집에서 혼자 놀게

셋째는 한숨을 쉬고 한마디 더한다.

아니, 그게 아니고”(아빠는 왜, 왜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지에 관한 내 감정을 읽어내지 못할까?)

 

2인 큰딸이 아빠에게 말한다.

아빠, 오늘 친구 보영이랑 싸웠어. 아침마다 내가 기다리는데도 미안하다는 소리를 한마디도 안하잖아

아빠는 무심하게 대답한다.

, 제일 친한 친구라면서 사이좋게 지내지 않고

큰딸이 한마디 더한다.

집에 올 때 보영이가 나한테 사과했는데...”

아빠가 대답한다.

너도 사과해, 그래야 사이가 더 좋아지지

큰딸은 그게 아니라는 듯고개를 내저으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아빠는 왜, 상식적인 선에서만 이해하려 하고, 내 말속에 숨어있는 내 감정을 알아듣지 못할까?)

 

 

#2.

윗글은 평범한 가정에서 볼 수 있는 보통 수준의 대화내용이다. 우리 집에서도 가끔 이런 상황을 목격한다. 아이들은 아빠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고, 아빠는 아이들이 말하는 무엇을 놓치고 듣지 못했을까? 네 살배기, 2 큰아들, 2 큰딸이 왜 대화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을까?

 

아이들과 대화할 때 부모들은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경향이 있다. 더 큰 문제는 듣는 내용마저도 부모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분명 아이는 자신이 전달하고픈 이야기를 자신의 감정과 더불어 표현했는데, 부모들은 그 이야기도 감정도 모두 놓치고 만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아이는 부모가 자신의 얘기를 들을 능력이 안 된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마음을 몰라준다고 판단할 것이다. 아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면 부모는 아이의 속마음을 알 수가 없게 되고, 부모 또한 불소통의 상황 속에서 아이의 태도에 불만을 갖게 된다. 이러한 불편한 관계는 바람직한 부모와 자녀관계 형성에 분명 장애가 될 수밖에 없다. 자칫하면 치유하기 힘든 악순환의 고리를 갖게 된.

 

현재 부모가 가진 기준과 가치는 하루아침의 결과물이 아니다. 청소년기를 거쳐 성인이 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개선 내지 변경된 것이기 때문에 그 기준은 아이에게는 가혹할 수 있다. 부모인 우리 자신도 어려운 것이 인생살이고 관계의 문제다. 하물며 아직 성장단계에 있고 세상을 알아가는 아이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불통이 습관화된 사이에서는 서로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갖기가 쉽지 않. 부모와 아이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불필요한 감정소모와 부정적인 선입견으로 인해 작은 화가 큰 분노를 낳는다. 가장 소중한 관계인 가족들 간에 이러한 바람직하지 못한 관계형성을 막을 방법은 없을까?

 

전문가들은 지적하기를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듣는 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시작이고 끝이라고 한다. 즉 잘 듣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어떻게 아이들의 이야기를 잘 들을 수 있을까?

 

아이들의 이야기를 잘 듣고 그 속뜻과 감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될 터인데 쉽지가 않다. 그 이유는 이야기하는 아이들에게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듣고 있는 부모에게 문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잘 듣기위해서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잘 못 듣는 부모의 오류를 시정하는 일일 것이다.

 

 

#3.

* 평범한 부모 - 부모도 특별한 존재는 아니다

우리는 부모로서 특별한 사람이기를 원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도, 특정한 부모도 특별한 사람은 아니다. 모두가 평범한 감정을 가진 보통(?) 인간이다. 누구나 작은 일에 속상해하고, 소소한 분노 때문에 일상이 흔들리고, 과거의 후회로 인해 현재가 발목 잡히는 그런 하루를 지낸다. 네 명의 아이들 둔 부모라고 해서 특별한 인격과 더 단단한 감정을 가질 수도 가질 필요도 없다.

 

부모들 스스로가 특별한 존재가 아닌 평범한 감정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아이들의 이야기를 편하게 들을 수 있다. 특별한 존재가 되려는 순간 스스로가 만든 틀에 구속당할 수밖에 없고, 그 틀의 시각으로 타인의 말을 재단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그런 부모의 시각에 불편해하고, 상황은 어려워진다.

 

* 상황에 대한 이해 - 세상사에 정답은 없다

매사에 정답을 구하려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나름 치밀해 보일 수는 있지만 사고의 유연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정답이 없는 문제나 상황이 얼마나 많은가? 최소한 두 갈래 길에서도 선택의 문제는 존재하고 후회가 남을 수도 있다. 부모들의 세상과 아이들의 세상은 다르지 않다. 부모와 아이들 사이에는 다양한 상황과 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

 

부모들도 스스로도 아이들도 특정 상황에서 정답을 구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 다만 좀 더 유연하게 상황을 바라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오히려 교과서적인 정답을 요구하는 서투른 시각을 경계하여야 한다. 아이들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고 부모는 이들의 가능성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즉 상투적 시각으로 아이들을 바라봐서는 안 될 것이다.

 

* 판단하지 말 것 - 특정한 기준에 얽매이지 말자

아는 만큼 보이고 보고 싶은 것만 보인다. 듣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열려있는 만큼 들리고 듣고 싶은 것만 들릴 것이다. 부모들의 경험과 지식도 제한적이다. 결국에는 내가 구성한 틀에 내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만 들을 수밖에 없다.

 

스스로 만든 기준에 얽매이다보면 내 방식으로 상대방을 판단하려고 할 것이다. 상대방을 내 기준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곧 상대방과 상대방의 의도를 부정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이야기에 특정한 기준을 내세우지도, 그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때 진정한 소통이 시작된다. 아이들도 자신의 이야기가 잘 전달되고 생생하게 살아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진정성을 드러내기도 쉬울 것이고, 부모 입장에서 아이를 이해하기도 쉬울 것이다.

 

* 일관성에서 탈피 - 아이마다 상황마다 다른 눈빛이 필요하다

부모가 아이들을 대할 때 일관성을 유지하라는 조언을 많이 받는다. 따라서 많은 부모들이 각각의 아이들이나 그 상황에 상관없이 일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열 손가락을 깨물면 특별히 더 아픈 손가락이 있듯이 아이들에 대한 부모의 애정과 관심에도 차별과 가식이 있을 수 있다.

 

매순간 일관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부모 스스로도 아이들에게도 솔직하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아이마다, 상황마다 다르게 행동하고 다르게 말하는 부모의 모습이 아이들에게는 좀 더 자연스럽다. 부모들만큼이나 아이들도 부모들의 행동에서 진정성과 가식을 구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들이 평범한 감정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서로가 인정하고, 자신의 틀로 아이들을 판단하지 않고, 아이마다 상황마다 다르게 들을 수 있을 때 부모와 아이들 의 관계는 그 전보다 훨씬 따뜻해지고 자연스러워질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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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odytone 2015-04-04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청, 어렵지만 관계의 핵심이죠..
제 경우에는 아이의 감정보다 아이가 처한 상황, 그리고 문제에 초점을 맞출 때 100% 실패하더라고요. 아이가 ˝엄마가 지금 내 말을 잘 이해 못한 것 같은데,˝ 라는 말의 뜻이, ˝엄마가 지금 내 감정이 뭔지 잘 모르는 것 같은데,˝라는 걸 이제서야 조금씩 깨닫고 있어요. ㅠ.ㅠ
감정 받아주고, 수용해주는 게 정말 어렵더라는... 특히 부정적인 감정일 때 말이죠.

지성파파 2015-04-07 22:50   좋아요 0 | URL
듣는게 어렵기도 하지만, 정답이 없기때문에 아이들과의 관계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서로의 눈높이에 맞는 대화가 되어야 하는데, 부모가 아이의 눈높이에 맟추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아이가 부정적인 감정상황일때에는 오히려 문제에 집중하기보다는 눈빛과 침묵으로 부모가 알아차리고 있음을 표현하면 좋을 듯 합니다. 부모라 할지라도 엄연히 타인으로서 상대방의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기란...오히려 부모의 욕심이 아닐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