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0, 토요일

 

무거운 외투는 금요일 오후 6시에 걸어두었다

직립의 일상은 수평으로 풍화되고, 나는

헐거워진 파자마 속으로 해체된다

 

하루를 살기 위해 날카로워지지 않아도 되는

삶의 경계를 놓아버린 시간. 빠져드는 꿈조차 뭉툭해진다

달콤한 무장해제, 흐트러짐은 또 하나의 법칙이다

 

늦잠은 관성의 영역을 넓히고 향기로운 발효를 거친다

지난밤의 잔상은 이기심 가득한 기호의 세계에 쌓여있다

뿌리를 내려 생목(生木)이 된 나는, 상투적 식탁에 대한

해명을 요구받지 않는다.

 

멀리, 햇살을 쥐고 흔드는 가로수 따라

느릿느릿 초보운전자와 아이의 웃음이 동승하고 있다

흑백 화소가 점점이 살아나, 살빛 풍경을 채운다

 

오늘은 더 이상 빚어낼게 없다. 나 밖에

 

------------------------------------------

'불금"이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처음 들은 나는 '불곰'을 잘못 발음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아해했지만, 곧 맥락이 주는 의미를 이해했다. 어찌되었건 피곤한 일주일을 마감하는 금요일은 직장인과 학생들에게 커다란 안식으로 다가온다. 하여, 금요일 저녁은 하염없이 풀어지고, 흐트러지고 늘어진다. 한권의 책과, 여러잔의 술과, 침묵이 편한 가족과 친구, 세상의 모든 편안함과 더불어 금요일의 밤은 깊어간다.

 

토요일 아침, 알람은 출근길과 등굣길을 알려주지 않는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놀이터에서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나즈막히 들려오는 라디오의 음악소리만이 존재감을 확인하는 시간. 더 이상 긴장할 필요가 없고, 무언가를 예비하지 않아도 되는 비움의 시간. 토요일이다.

 

여행이 준비되었다면 모자를, 계획한 여행이 없다면 커피잔과 라디오 볼륨을 친구로 삼자. 진정한 아점(아침과 점심식사의 준말), (좀 아는척하자면) 브런치를 즐기고 멀리 창밖을 바라보자. 파자마 차림으로 아이들과 오목과 장기를 두고, 온 종일 그들과 부대끼며 꽉 차게 하루를 보내자.

 

여행길에서도 목적지만 바라보지 말고 지나가는 낯선 풍경을 제대로 바라보자. 푸른 녹음이 우거지고 짙어지고, 아이들의 눈빛이 살아나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것이다. 감미로운 음악과 아이들의 재잘거림은 천상의 화음이다. 이 보다 달콤할 수는 없다.

 

토요일을 맘껏 즐시기라. 오롯이 나와 가족을 위해 토요일 하루를 허하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모든 인간은 자신의 능력만큼 신을 만난다”(스피노자)

 

“모든 부모는 자신의 능력만큼 자식을 만난다”(지성파파)

 

자녀교육에 고심하는 부모들을 절망케하는 신조어가 몇 개 있다. 대치동엄마, 목동엄마, 중계동과 평촌의 거대 학원가의 전설적인 엄마들. 누가 이들을 낳았을까. 할아버지의 재력, 아빠의 무관심, 엄마의 정보력이란 괴상한 현상을 누가 설파했을까. 적어도 평범한 엄마, 아빠들은 아닐 것이다. 사실은 그분들이 못내 존경스럽다.

 

국내 유수의 금융회사에 다니면서 목동에 거주하는 친구에 따르면, 중학생인 큰딸이 좀 더 수준 높은 학원에 등록하기 위해 학원입시를 다른 학원에서 준비하는 중이란다. 그러니까, 학원을 위한 학원이 존재하는 거라고 한다. 결국은 사교육이 쳐 놓은 거대한 거미줄에 우리 아이들을 맡긴 결과가 그 한 칸을 더 움직이기 위해 허우적거리는 거다. 목동에는 이런 일이 다반사라고 한다. 오, 하느님, 맙소사.

 

휘경동에서 집을 옮길 무렵 그 친구는 내게 목동행을 권했다. 아이들 키우기에 좋다고, 특히 맞벌이 하는 부모에게는 더할 수 없이 좋은 동네라고 했다. 정교하게 짜여진 학원시스템이 이를 받쳐준다고 했다. 난 한마디로 거절했다. 여러 곳을 탐색한 끝에 과감히 잠실 주변부인 풍납동을 선택했다. 그 동네엔 학원이 많아 보이지 않았고, 유례 깊은 풍납토성이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었고, 목동보다는 강남권 출퇴근에 교통이 편리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이유로, 우리 집 아이들은 아무도 학원에 다니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목동과 대치동과 중계동이 가진 장점이 우리 가족에게는 중요한 변수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볼 때 단독주택과 아파트, 풍납토성이 적절히 조화된 풍납동의 밤풍경은 아늑하기 그지없다. 이 점은 5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다. 물난리로 소문난 그 옛날의 풍납동이 아니었다.

 

학원에 의존하지 않는 우리 아이들, 스스로 열심히 하고 있을까? 스스로 학습법을 개발하고 적용해서 친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까? 아직까지는 “아니다”가 대답이다. 학창시절 공부를 대단히 잘했다고 착각하는 우리 아이들의 엄마는 애걸복걸이다. 대치동 엄마의 코드에 맞는 소문을 익히 아는 까닭이다. 초4때 수학을 놓치면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 영어는 초등학교 입학 이전에 말문을 터놓아야 한다. 독서는 어떻게 해야 하고, 어쩌고저쩌고, 특목고 준비는 어쩌고 하는 말들이 소문의 실체다. 이러한 소문의 결론은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으면 뒤떨어진다는 얘기다. 이런 얘기를 자꾸 들으면 귀가 얇아질 수밖에 없다.

 

니체는 경고했다. 인간은 검증되지도, 검증할 수도 없는 진리를 진리로 알고 살아가는 바보들이라고. 아이들 교육방법에 관한 소문은 검증이 가능하고, 아이들에게 합당한 그러한 학습법일까? 심히 의문스럽고, 두렵다. 부모들이 알아서 판단할 일이지만, 과잉 경쟁이 일상화된 한국사회가 낳은 조작된 사회현상이 아닐까. 사교육 시장에서 명성과 부를 얻었던 소위 일류강사들 중 일부가 학원에 의존하는 학습양태를 비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교육시장의 판도를 이끌었던 그들이 학원에 대한 의존성을 버리고 자기주도학습을 하라고 권장하고 있다. 이들이 돈에 환멸을 느끼거나 단순한 명예욕 때문에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아! 그들 중 아주 유명한 이는 선행학습을 강요하는 사교육에 환멸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두고두고 고민해볼 일이다.

 

중2, 중1에 재학 중인 큰애와 둘째의 현재 성적은 우리의 기대와 상당히 어긋나(?)있다. 친구들 학원갈 시간에 집에서 혼자 지지고 볶고, 꼼지락 거리고 있는 까닭이다. 초등생인 셋째를 돌봄교실에서 데려오고, 엄마 아빠가 막내를 데리고 귀가하면 네 살배기 막내까지도 돌본다. 가끔씩 무사태평한 그들을 보면 속에서 불이 난다. 성적표라도 보게 되면 소방차가 필요한 시기를 스스로 알게 된다.

 

우리 집 아이들의 행태가 순간순간 불안하고 우리 부부를 여간 고민스럽게 한다. 사교육시장을 선도하는 소문의 실체를 학원에서 확인하고픈 욕망이 슬며시 고개를 들기도 한다. 하지만 멀리 전략적으로 보면 사실은 불안하지는 않다. 그 이유는 우리 아이들은 스스로 학습법이나 각 과목의 실패를 몸소 체험하기 때문이다. 시험 전날 막연함과 두려움에 어깨를 들썩이는 큰애를 본적이 있다.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사실 말은 필요치 않았고 어깨를 두드리며 조용히 지켜보았을 뿐이다. 성장통은 몸이 자라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성장하고, 자기에게 맞는 공부방법을 찾는 것에도 존재한다.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답해야 하는 상황이 중1, 2에게는 심히 곤혹스러운 일일 것이다. 인터넷 강의나 자세한 참고교재를 통해서 답을 얻더라도 학원에서 선생님의 입을 통해서 즉시 얻는 것보다는 느리고 답답한 것임에 틀림없다. 큰 그릇도 늦게 만들어지지만 스스로 자기 몸에 적합한 방법론을 체득하는 것도 상당한 시간을 요할 수밖에 없다. 이럴 때 필요한 말이 있다. 시간이 약이다. 이건 진리다.

 

우리 부모들도 공부에 일가견(?)이 있던 분들은 알 것이다. 쉽게 한 공부는 쉽게 잊혀진다는 가벼운 사실을.... 시험보기 사흘 전, 하루 전에 한 벼락공부가 작은 시험에는 유용성이 있을 수 있지만 큰 시험에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많은 부모들이 먼저 체험했을 것이다. 내가 그랬다. 전형적인 벼락공부 스타일로 중, 고를 나름 잘 버텼으나 끝내는 망했다. 아니다, 망할 뻔 했으나 그 뒤로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체질을 개선해서, 대한민국에서 아주 어렵다는 시험에도 합격하고 지금은 먹고살만하다.

 

얼굴이나 성격뿐만 아니라 부모의 학습방법까지 닮는다는 것은 생물학적 유전의 아이러니다. 이런 된장....이들의 눈빛에서 그 시절의 나를 본다. 섬뜩하다. 그렇지만 그 시선 속에서도 나는 적잖은 안도감을 느낀다. 자식들이 부모의 삶의 궤적을 따라온다는 나름의 신념(또는 궤변) 때문이다. 그 믿음으로 인해 아이들이 원하지 않는 이상 학원에 보내지 않고서도 불안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무지한 낙관론이 아니다. 지금까지 스스로를 지탱해온 나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

 

임신을 확인한 후 아이 얼굴을 보기까지 약 10개월을 부모들은 기다린다. 걸음마, 초등학교 입학, 본격적인 공부, 질풍노도의 사춘기, 처절한 대학입학시험, 전쟁과 같은 취업시험, 판도라의 상자 결혼 등. 아이를 낳고부터는 부모는 계속해서 아이들을 기다린다. 그냥 기다리지 않고 아이들에 대한 강한 신뢰를 갖고 기다린다. 일부 부모들이 아이들의 성장과정에서 그 믿음과 기다림의 진리를 확인하려하지 않고 귀동냥으로 얻은 소문과 쉽게 타협하기도 한다. 하지만 많은 부모들이 그러하듯이, 그 믿음과 불편하지 않는 기다림이 아이를 잘 성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부모의 진정한 능력은 돈과 정보에 있지 않고, 아이들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진득한 기다림에 있다. 오히려 과장된 소문에 대한 무관심과 걸러진 최소한의 정보만이 필요하다. 나는 제 스스로 실패를 경험하고 다시 일어나는 아이들을 신뢰하고, 기다릴 자신이 있다. 언제까지일지 모르겠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세계에서 시인이 가장 많은 나라가 한국이라고 한다. 그 무시무시한 등단제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만큼 우리의 서정적 정서는 풍부(?)하다고 볼 수 있다. 인터넷보급율 또한 최고이다 보니, 온라인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이도 넘쳐난다. 여기도 한명 있다.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글쓴이가 자신의 내면을 내보이고 누군가를 설득하고 스스로를 채록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것이다. 스스로가 판단할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무엇을 써야 할 것인가?

 

당신이 진정한 작가라면, 자신이 경험한 것만을 갖고 글을 써야 할 것이오!“(류시화, 지구별여행자)

 

글을 쓰는 사람들은 생활 속에서, 책속에서, 타인과의 대화 속에서 글감을 발굴하고 이를 자신의 언어로 표현한다. 타인의 글을 읽다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글이 있는가하면, 도통 무슨 말씀을 하는 것인지 모를 때가 있다. 너무 현학적이거나 미학적 기준에 충실한 분들의 글도 그렇다. 우리가 모르는 낯선 철학자의 이름과 그들의 난해한 개념들로 채워진 글도 역시 그렇다. 글을 쓰는 이들이 모두를 이해하거나 경험할 수 없지만, 적어도 자신의 체험이거나 체험적 지식일 필요는 있는 것이다.

 

당신의 영혼 깊이 새겨진 진실한 경험이 아니라면, 그 것은 글로 쓸 가치도 없소. 머릿속에 한순간 스쳐지나가고 마는, 그래서 금방 잊어버릴 수 있는 것들은 갖고 글을 쓴다면, 그 것이 어찌 다름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겠소?”(류시화, 지구별여행자)

 

오늘날 특이하면서 생각이 좋은 작가(개인적인 생각에)인 류시화는, 마흔 다섯 시간이나 걸리는 인도 카르나타카 특급열차 안에서 만난 어느 노인과의 대화에서 진정한 작가수업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한다. 그 깨달음은 류시화의 글과 말을 통해 타인들에게 간접적으로 체험을 제공하고 있다. 나도 류시화의 독자로서 그 부분에서 강하게 무릎을 쳤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깨달았다고나 할까! 아직까지는 그렇다.

 

내가 쓰는 글의 최초의 독자는 바로 나다. 내가 쓴 글을 읽고 감동을 받지 못하거나, 공감하지 못한다면 타인들의 시선에는 어떻게 비춰질 것인가? 글을 내보이는 이들이 가장 두려운 부분이다. 전업 작가가 아닐지라도 글쓴이의 의도가 자신의 언어로 나타나 공감을 얻지 못한다면 그리 반가운 일은 아니다.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은 내 영혼의 기록들이다. 사람과 사물과 책과의 만남, 그리고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끊임없이 기억된 체험의 기록들이다. 한참 시간이 흘러가도 내 영혼의 기록은 잊히지 않을 것이고, 적어도 진실 되게 내 자신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체험적 기록만이 사실성과 독창성을 체득할 수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에 그렇다는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바야흐로 표현과잉의 시대이다. 시각적 청각적 요소에다 다변, 능변의 소유자들이 도처에 넘쳐난다. 누군가를 이해시키고 나를 표현하고자 하는 좋은 의도이리라.

 

하지만, 그가 쏟아낸 말이 그 사람의 총체가 아닐뿐더러 그 사람의 됨됨이를 평가하는 결정적 기준은 아니다. 오히려 말을 내뱉기 이전의 생각과 그 생각이 드러나는 행동에서 우리는 그 사람을 읽는다.

 

생각은 말로 표현하면 갇히고, 행동하면 풀려난다.”(칼릴지브란, 모래와 거품)

 

말로 나를 표현하려고 하다보면 진정 필요한 말이 무엇인지 경중을 가리기 어렵다. 모래밭에서 반짝이는 보석을 찾는 것과 같다. 정리되지 않은 말은 내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 것이고, 결국은 피로한 대인관계를 만들고야 만다.

 

때때로 나를 위해서, 상대방을 위해서도 침묵이 필요하다.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구체화시킬 필요가 없는 관계가 바람직한 관계다. 침묵이 장애가 되지 않고, 대화의 수단으로 존재할 때 우리는 그를 친구라 부른다.

 

침묵은 기쁨을 가장 감동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이다.”(윌리엄 셰익스피어)

 

아침안개가 걷히고 처음 마주하는 꽃잎이 나를 말로 부르던가. 우리가 자연을 접할 때 그 어떤 소란이 장애가 되었던가. 소소한 일상에서 관조가 필요한 상황은 말이 필요치 않고 오로지 침묵만이 존재한다. 그러한 진지한 침묵만이 나와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다.

 

침묵이 깊어질수록 내가, 내 생각이 살아나고, 내가 치유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존재를, 나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때는 침묵에서 비롯된 바로 그 시간이다.

 

우리는 절대적 침묵을 규율로 정하고 철저한 금식으로 명상을 수행하는 트라피스트 수도사들처럼 살 수는 없다. 하지만 스스로 약속한 침묵의 시간만큼은 외부의 모든 안테나를 꺼두어야 한다.

 

말의 유희보다는 침묵과 사색의 성찬을 즐기시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오래된 우체통

 

누가 마르지 않을 시간을 보냈을까

누가 담지도 못할 그리움을 보냈을까

가끔은 난청의 운명을 원하지만

허공을 향해 열려진 귀는

늘 허기를 견디지 못해 듣고, 또 듣고

검고 푸른 속삭임, 은 끊임없이 밀려오고

 

섬진강변 버들치의 물오름 소리가

모래언덕을 넘는 낙타의 울음소리가

동부전선에 내려앉은 반쪽 달빛의 미소가

또박또박 맞춤법이 길을 잃은 서투른 안부가

길을 묻고, 또 묻고

 

전상서(前上書)와 전사서(戰死書)가 함께 머물렀던 옛이야기는

마른 상처로 남아 퇴역군인의 노래가 되고

김 한 톳, 햇살 한 속은 늘 노란 옷을 입어

영원히 품을 수 없는 향수가 되는

 

바램과 버림을 견디어 낸, 색 바래 늙은 얼굴

젖어있거나 웃으며 말을 건네는 검고 푸른 소란들

때문에, 늘 붉어져 있어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수줍은 오후

 

다시

당신이라 부르는 2인칭의 뜨거운 연서가

, 그녀를 호명하는 3인칭의 멀어진 눈길이

자작시를 투고하는 늙은 시인의 1인칭 독백이

한데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는

 

 -----------------------------------------------

공중전화만큼이나 찾기 어려운 것이 우체통이다. 휴대전화나 이메일이 나타나기 전에는 손편지를 써서 우표를 붙이고 우체국에 우체통에, 사랑한다 보고싶다 기다린다 존경한다는, 말을 많이도 했었는데  ...밤새워 편지를 쓰고 아침에 후회하는...그때가 그사람이 그립다. 말을 할까...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개인pc로 다양한 소식이 전해진다. 업무용 연락이나 친구나 직원들의 애경사에 이르기까지  그 내용도 다양하다. 하나의 메일에 머무르는 시선의 양과 질은 얼마나 될까?

커피 한잔의 시간 속에 모든 메일이나 소식을 확인하는 일이 다반사다. 그 짧아진 시간만큼 인간관계의 농도가 묽어졌다고 생각되는 것은 어쩌면 착각일까?

 

군대간 아들이 2주만에 부쳐오는 첫번째 편지를 기억하는 부모들이 많을 것이다. 눈물없이 쓸수 없었고, 눈물없이 볼 수 없었던 얼룩진 편지지를....내가 그랬다. 훈련소 입소 2주만에 보낸 편지지에 그저 무거운 침묵과 표현하기 어려운 서러움을 잔뜩 보냈다. 해병 1사단 훈련소의 내무실에서는 고개숙여 흐느끼는 스무살의 검게 그을린 어린 아이들이 있었다. 그 편지를 여러번 읽어보았을 부모님에게 아직까지 그때의 심정을 묻지 못했다.

 

오늘은 어머니, 아버지에게 다정한 손편지를 써야겠다.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나는 목이 마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