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를 리뷰할 때는 일본 작가의 작품이라고 해놓고, 이번 책 리뷰에는 영국이라고 표기한다.

전작과는 다르게, 지극히 영미문학스러운 소설이며, 소설의 배경이나, 인물 어디에도 일본스러움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 작가의 출신이 어딘가는, 많은 부침을 겪는 나라의 작가들이 망명을 하고, 이국의 언어와 배경으로 글을 쓰지만, 작가의 부모나, 성장 배경의 정체성은 출신국에 있다고 강하게 믿는 편이라, 특히 유럽의 작가와 작품들을 대할 때, 어느 언어로 쓰였느냐 못지않게, 어디 출신인가를 밝혀두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일본계 영국 작가인 '가즈오 이시구로'의 이 책은, 마술에 가까운 솜씨라는 찬사를 받고, 영어판으로만 100만 부 이상이 팔렸다는 기록이 있다.

승전결이나, 뚜렷한 클라이맥스 없이, 차분하고 잔잔한 글이 친근하게 다가와 울림을 주는 이런 글을 쓴다는 내공에 경의를 표한다.

현대 영미 문학을 이끌어 가는 거장의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한 '가즈오 이시구로'..일본은, 영국은,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또 하나의 걸쭉한 현대문학 작가를 키웠다.

이 소설은 크게 품위, 명예, 인생의 황혼(저녁), 그리고 농담에 대해 집중해서 읽게 된다.

영국의 달링턴 홀이라는 영국 귀족 '달링턴 경'의 저택에 살고 있는 집사 '스티븐스'

황혼기에 접어든 그는 35년간, '달링턴 경'과, 이 저택을 모셔 온 사람이다.

3년 전 '달링턴 경'이 죽자, 미국의 신사 '패러데이'가 그 저택을 인수했고, 집안 관리에 필요한 하인들의 수를 대폭 감축한 채로, '스티븐스'까지 인수하였다.

한때 28명까지 하인들을 거느렸었지만, 최소한의 인원인 자신을 포함한 네 명이 관리하기엔 그 규모가 너무 큰 저택인지라 구석구석은 먼지 가리개를 덮어 놓는 지혜를 냈지만, '스티븐스'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면서, 예전의 빈틈없이 주인을 섬기던 것에 못 미치는 자신의 능력에 회의적이다.

각종 난제들의 중심이 인력 부족임을 깨달아 갈 즈음, 예전에 자신의 밑에서 총무로 일했던 '켄턴' 양의 편지를 받는다. 그간 크리스마스카드를 받아온 세월도 한참 되었지만, 이번처럼 긴 편지는 처음이라 읽고 또 읽고 외우다시피 하는데

5주 정도 미국에서 지내기로 한, 새 주인 '패러데이'가 그에게 자신의 포드 자동차를 내어주며, 여행을 하라고 권한다.

'당신에겐 휴식이 필요하다'고~

 

국 영국의 서부지역으로 여행을 결심한 '스티븐스'는 '켄턴' 양의 편지에서 받은 인상, 명확하진 않지만, 향수나 그리움을 넘어선 무엇, 달링턴 홀에 대한 무한 애정과 프로정신을 장착했던 그녀가 이곳을 그리워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정말 다시 돌아오고 싶은 건지 본심을 탐색해보기로 하고, 겸사겸사 여행을 떠난다.

스티븐스가 새로 모시게 된 미국 신사 '패러데이'는 영국 신사와는 많이 다르지만, 자상하고 좋은 사람이긴 하다. 그러나 그는 새 주인의 미국식 유머, 아니 그냥 유머의 코드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새 주인이 던지는 농담에 긴장하고 어리둥절한 채로 대처해서 서로 곤란해지는 일이 종종 있다.

'달링턴 경'이나, 그의 손님들, 그리고 하인들과의 대화에서도 공감대 형성이 충분히 가능했으나, '페러데이'의 사교생활은 그 시절과 너무도 딴판이고, 방문객들도 드물지만, 베테랑에 완벽주의인 '스티븐스'는 뭔가 삐걱임을 느낀다.

생 집안일을 책임져야 했던 그는 여행 한번 못해보고 거의 갇혀지내듯이 살았지만, 자신이 일하는 가문에 대한 이미지를 유지하려고 옷도 가벼이 입지 못한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도 옛 손님들에게 물려받은 값나가는 신사복 차림으로, 주인이 경비를 모두 댄다고 빌려준 포드 자동차에 올라 여행을 떠났다.

첫째 날, 솔즈베리에 도착해 일렁이는 영국의 전원을 품은 경치에 놀라면서, 위대함이란 단어에 대해 생각하는데,

위대한, 그레이트브리튼, 이렇듯이 풍경 하나만으로 그 숭고한 형용사(위대함)의 사용이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여행 내내 지나온 날들을 추억한다.

위대함.. 그리고 위대한 집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동료들과 나눴던 대화도 회상한다.

- 중간생략-

루의 일을 끝내고 가장 좋은 시간, 저녁,..

인생의 황혼을 맞이하는, 품위와 명예를 위해 살았던 집사, '스티븐스'

나이가 들어서, 지치고 느슨해진 건데 새 주인을 모시는 일의 소홀함이 왜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인력 부족만을 원인으로 아는 남자

자신이 가장 고귀하다고 여겼던 전 주인이, 잘못된 판단으로 시달리고 결국엔 실수였음을 스스로도 인정하자

그를 위해 봉사했던 자신의 평생이 무너짐을 품위와 명예로 붙잡고 있던 남자

모든 전쟁이 끝나고, 그런 대저택을 지닐 여력은 더 이상 영국인이 아니라, 미국인들에게나 가능한 일이 되었고

영국 신사와는 다른 미국의 신사도 역시 점잖고 친절한 분이지만,

그의 농담과 그의 사교와 그의 즐거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극히 영국스러운 영국식 집사,

의 저녁은 농담을 무장한 좀 더 가볍고 유쾌한 저녁이 되기를...

초로의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소설이다.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다 해내고, 퇴직에 즈음한,

아니면 자신이 가지지 못해서 살 수 없었던 삶에 대해, 그 선택에 대해, 아쉬움과 후회가 있는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소설이다.

로드 무비 같은 로드 소설이라고 해둘까나.. 여행 엿새동안,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회상하면서, 자신과 비껴간 여인의 본심도 미처 모르고, 마냥 불편하기만 했던 그녀를 만나고, 남은 나날을, 그녀도, 그도, 공허함 만은 아닌, 다른 것들로 채우려는.. 하루중 가장 좋은 시간, 저녁, 인생의 저녁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시간, 내게도 저녁이 오겠지, 종달새처럼 즐거워하며 다리뻗고 쉼을 즐기는 것이, 공허함보다 우선해야 할텐데 ..

 

- 따라서 이제 나는 다음과 같이 단정하고 싶다. 즉 ‘품위‘는 자신이 몸담은 전문가적 실존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집사의 능력과 결정적인 관계가 있다. 모자라는 집사들은 약간만 화나는 일이 있어도 사적인 실존을 위해 전문가로서의 실존을 포기하게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집사로 산다는 것은 무슨 판토마임을 연기하는 것과 비슷하다. 슬쩍 밀거나 약간만 비틀거리게 만들어도 가면이 떨어져 내려가면 뒤의 배우가 제모습을 드러내고 만다는 점에서 말이다. 위대한 집사들의 위대함은 자신의 전문 역할 속에서 살되 최선을 다해 사는 능력 때문이다. 그들은 제아무리 놀랍고 무섭고 성가신 외부 사건들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점잖은 신사가 정장을 갖춰 입듯 자신의 프로정신을 입고 다니며, 악한들이나 환경이 대중의 시선 앞에서 그 옷을 찢어발기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그가 그 옷을 벗을 때는 오직 본인의 의사가 그러할 때뿐이며, 그것은 어김없이 그가 완전히 혼자일 때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품위‘의 요체이다. 57-58



-하지만 한 번씩 그럴 때마다 곧 깨닫게 되지요.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남편 곁이라는 사실을. 하긴, 이제 와서 시간을 거꾸로 돌릴 방법도 없으니까요. 사람이 과거의 가능성에만 매달려 살 수는 없는 겁니다. 지금 가진 것도 그 못지않게 좋다, 아니 어쩌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고 감사해야 하는 거죠."그때 내가 곧바로 무슨 대꾸를 했을 것 같지는 않다. 켄턴 양의 말을 제대로 소화하는데 1-2분 정도 걸렸으니까. 게다가 그녀의 말에는 여러분도 짐작하겠지만 내 마음에 적지 않은 슬픔을 불러일으킬 만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이제 와서 뭘 숨기겠는가? 실제로 그 순간, 내 가슴은 갈기갈기 찢기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돌아서서 그녀에게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옳은 말씀이에요, 벤 부인. 말씀하신 대로 시간을 돌리기엔 너무 늦었습니다. 그래요, 그런 이유들 때문에 당신과 부군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나 또한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겁니다. 당신도 지적했듯 우리는 ‘지금 현재‘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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