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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그네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200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헤르타 뮐러'의 대표작이다.' 숨그네'.. 란 목숨이 삶과 죽음 사이를 그네처럼 왔다 갔다 한다는 뜻으로 수용소에서의 삶이 그처럼 위태로웠다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미미했다는 정도 되겠다.
이 같은, 이 작가만의 독특한 단어의 조합은 고된 수용소 살이를 하는 주인공을 통해 빛나는데, 언어예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소설을 이렇게 쓸 수도 있구나, 한편의 시집 같기도 하고, 산문집 같기도 한 이 소설을 가슴에 새겼다는 이들도 많았다.
시적인 감성과 언어로 승화시킨, 절망과 절박함이 이 소설의 대체불가한 매력일 수 있다.
'레오폴트 아우베르크'(이하 '레오'라 한다.)는 17세의 동성애자이다. 그는 루마니아의 독일계 민족으로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 미술교사인 아버지와 어머니와 살고 있다.
공원 등지에서 소위 '랑데부'라는 밀회로 여러 남성 파트너들과 아슬아슬한 사랑을 즐기면서 언젠가 들킬 것을 염려하며 차라리 나를 모르는 낯선 곳으로 떠나고 싶어 하는 마음도 있다.
1944년 여름 루마니아가 소련에 항복을 하고 독일에 전쟁을 선포하는데, 1945년 1월 나치에 파괴된 소련의 재건을 위해 루마니아에 거주하는 독일인들을 넘겨 달라는 요구로 17-45세의 남녀들이 강제 수용소로 가게 된다. 그 명단에 '레오'가 있었다.
할머니의 '너는 돌아올 것이다.'라는 문장을 새기고 러시아 포로수용소로 향한 '레오'는 고된 노동과 학대, 추위와 배고픔을 견뎌나간다.
수용소에서 나온 침묵은 복종이라 한다. 수용소에서 할 일은 복종뿐이다.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죽음과 불안과 고통 속에서도 고향과 유년기 가족을 추억하며 버티는 힘은, 노동의 도구 하나하나, 노동의 재료 하나하나를 노래하듯이 시를 읊듯 하며 무심하게 순응하는 것이다.
그 시적인 언어들이, 감정의 절제가, 더 처연하게 다가온다. 처연함,, 그리고 몽환적이기까지 하다.
1950년 1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가족들 모두 그가 죽었으리라 추모해왔던 터라 서로 무덤덤한 일상을 보낸다. 막일꾼으로 취업을 하지만, '배고픔의 천사'와 싸워야 했던 굶주림의 시간을 견딘 후 가족과의 식사시간은 그의 기이한 식습관으로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레오'에게 있어 '배고픈 천사'는 자신을 괴롭힌 것이 아니라 자신을 구한 장본인이라 여기며 차라리 수용소 생활을 그리워하기조차 하는 태도이다.
풀려난 몸으로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외톨이의 삶을 살다가 어느 날 노트를 구입하고는 그 장소에서의 그 시간들을 기입해둔다.
콘크리트 전문가가 되려고 등록하면서 만난 여인' 에마'와 결혼을 하지만 여전히 그는 '랑데부'의 장소를 기웃거리는 동성애자이다. 파트너들의 잇따른 체포 소식에 고모가 있는 오스트리아에 방문차 떠나면서 아내에게 돌아오지 않겠다는 엽서를 남기며 11년간의 결혼생활을 끝낸다.
그리고 여전히 들짐승처럼 닥치는 대로 상대를 바꿀지언정,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
자유가 두려운 노동에의 강박을 갖고 열심히 일하지만 누구도 그 자신을 소유하지 못하게 한다.
루마니아의 이 강제추방 사건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도 못하던 그 나라, 그 민족의 아픈 역사이다. 가족과 마을 사람들의 이 생활을 기록하던 작가가 실제 같은 일을 겪은 동료 작가 '오스카 파스티오르'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책을 쓰기로 하는데, 결국 '오스카 파스티오르'가 갑자기 세상을 뜨는 바람에 상실감으로 한동안 침잠했다가 고심 끝에 이 소설을 쓰기로 했다고 한다.
'심장삽', '초승달 마돈나', '감자인간', 하조베', '대리형제', '배고픈 천사', '뼈와 가죽의 시간', '향수'등의 단어들과 소제목의 문장 자체도 경이롭다. 한 문장, 한 단락 사이에 텀이 필요했다. 문장을 읽어나가다가 애절하고 미어지는 가슴과 함께 호흡을 위한 텀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런 작품, 이런 문장들을 만나면 발바닥 끝에서 부터 일어나는 전율이 심장까지 올라와 사람을 먹먹해 지게 한다.
수용소의 삶이란, 우리와 동떨어진것만은 아닐것이다. 강제 포로수용소에서의 삶같은 인생도 있는것이니까, 우리 마음속에 만들어놓은 수용소도 있을테고..그런 삶에서도, 그런 고독과 절망속에서도 버틸 수 있는 힘, 각자에게는 무엇인지?..
- 섬세하게 조각된 나무의 틈을 빛이 뚫고 들어왔다. 나는 갈퀴 달린 하얀 덩굴손을 따라 이어지는 텅 빈 동그라미. 네모, 사다리꼴의 두려움을 보았다. 그것은 내 혼돈의 무늬였고, 어머니의 얼굴에 나타날 혐오의 무늬였다. 10
- 그 말을 작정하고 마음에 새긴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수용소로 가져갔다. 그 말이 나와 동행하리라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그런 말은 자생력이 있다. 그 말은 내 안에서 내가 가져간 책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큰 힘을 발휘했다. 너는 돌아올 거야는 심장삽의 공범이 되었고, 배고픈 천사의 적수가 되었다. 돌아왔으므로 나는 말할 수 있다. 어떤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17
수용소를 나온 지 육십 년이 지나도 음식을 먹을 때면 너무나 흥분된다. 나는 온몸의 구멍을 모두 열어젖히고 먹는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먹는 것은 불편하다. 먹을 때 나는 독재자다. 입의 행복을 모르는 그들은 대화를 나누며 예의를 차리며 먹는다. 그러나 먹을 때 내 머릿속에는 여기 앉아 있는 우리처럼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찾아올 한 방울 넘치는 행복이 스쳐간다. 머릿속의 새 둥지. 숨결 속의 그네, 가슴속의 펌프, 배 속의 대기실을 내주어야 할 그 순간, 먹는 게 너무 좋아서 죽고 싶지 않다. 죽으면 먹을 수 없으니까. 나는 지난 육십 년 동안 나의 귀향이 수용소의 행복을 누그러뜨리지 못했음을 안다. 수용소의 행복은 그의 배고픈 입으로 오늘도 내 모든 감정의 한복판을 메어 문다. 내 한가운데는 텅 비어 있다.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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