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님 리뷰를 보다가 건진 책, 소설의 반이 제목에 드러나 있는, 삼류소설 같은 소재, 삼류 드라마 같은 내용의 책을 읽게 되었다.
1960년에 발표한 책이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치른 10년 후의 소설이란 점을 감안해야 하고, 그 시대가 요구하던 여인상, 그시대가 원했던 가정이란 제도에 대한 도전을 하는듯한 '박경리'의 이 작품은 '토지'보다도, '김약국의 딸들'보다도 훨씬 이전, 그녀의 초기작쯤 되겠다.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하고, 그간의 아침 드라마나 일일 드라마 막장 소재들의 모티브가 되었었음을 짐작할 수도 있다.
'박경리'는 "나는 슬프고 괴로웠기 때문에 문학을 했으며, 훌륭한 작가가 되느니보다는 차라리 인간으로서 행복하고 싶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실제 그녀는 19세에 결혼을 하고 딸을 낳았고, 수도여자 사범대학을 졸업한 후 교사 재직 중에 한국전쟁으로 남편을 잃는다. 그리고 세 살 난 아들도 잃는다. 그녀의 삶은 불행한 가족사와 더불어 인간에 대한 이해, 여인으로서의 삶 등에 대한 깊은 고찰의 결과로서의 문학사라는 생각이 든다.
'안 원석'이라는 저명한 외과의사는 6.25로 부인을 잃고 그 아내의 먼 친척뻘이던 가정부 신여사와 22세의 생일을 맞는 딸 '수미'와 그 위로 아들 '수영'을 두고 있다.
그에게는 집에는 들이지 않는 어떤 여인과의 삶이 있고, 가정부는 집안일을 교양 있게 잘 처리하고 아들은 음대의 강사이자, 작곡가이며 딸은 그림을 그리는 '허 세준' 이라는 약혼자를 두고 있다.
'수미'의 22세 생일을 맞이하여 '수영'과 '수미'의 친구들이 오원장의 집으로 초대된다. 그 초대에 참석한 남녀들 간, 사랑의 변주와 인생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들 '수영'은 자신의 음대에 다니는 학생, '형숙'이라는 여인에게 빠져있다. '형숙' 은 '수미'의 친구이기도 하다. 초대받아 온 자신의 집 정원에 서 있는 아들과 '형숙'의 긴장된 밀당을 본 안 원장은 작위적으로 개입하여 그들의 긴장을 방해한다.
안 원장은 '형숙'이 못마땅하다. 자신의 과거 여인 기생, '국주'를 쏙 빼닮은 그녀의 모습에 나쁜 피가 흐른다고, 요녀라면서 '형숙'과의 교제를 반대하는 의사를 '수영'에게 밝히며 반발하는 아들에게 '형숙'이 고모로 알던 '국주'가 사실은 그녀의 엄마였으며 그녀가 부모로 알던 부부는 외삼촌과 외숙모였음을..
그리고 명문가이자 지주 가문의 자제였던 자신이 한때 '국주'란 여인에게 빠져 애욕으로 인해 정신을 못 차렸으며 가산도 탕진하는 등 가정의 위기도 있었으나, 아내와 처가의 도움으로 유학을 다녀오고, 이 남자 저 남자를 떠돌던 '국주'는 아편쟁이가 되어 자살했고 많은 돈과 함께 자신의 아이를 동생 부부에게 맡겼다는 이야기도 들려 준다. 그녀 '국주'는 애정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만나는 사내마다 망쳐 놓는 악녀, 요녀 였다고 일축해버린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나무 밑에서 엿듣던 '형숙'은 충격으로 쓰러진다.
그날 초대된 '문하란'은 여고의 영어 교사로 안원장의 친구 딸이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그녀를 후원해주면서 자신의 며느리가 되어 주기를 바라고 '하란' 역시 '수영'을 흠모하지만, 오로지 '형숙'만 바라보는 '수영'으로 인해 낙심을 한다.
그런 '하란'에게 '수영'의 동료인 '박현태'가 접근 하지만, '하란'의 마음은 '수영'에게만 향한다. 그리고 늦게 나타난 '수미'의 약혼자 '허세준'은 '하란'을 보고 심상치 않은 정서를 갖게 된다.
혼절했던 '형숙'이 매몰차게 '수영'을 거부하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서는 만나 주지 않자 '수영'은 애가 타서 주위를 맴돈다. 그녀는 성악가 지망생으로 매혹적인 외모와 음악적인 웃음소리로 이미 '수영'을 온통 지배해 버렸다. 그러나 자신의 나쁜 피에 대한 원망과, 안 원장에 대한 복수심에 달뜬 '형숙'은 '수영'을 농락 해버리고 싶은 마음까지 있다.
그래서 그를 자극하고자 '수영'의 동료 '박현태' 에게 접근한다.
생일파티에서의 소동에 잠을 못 자고 출근했던 '하란'이 쓰러지고 입원을 해 있는 동안, 결혼 문제로 아버지와 대립하던 '수영'은, 변심한 '형숙'의 태도에 지치고, '현태'와의 관계를 목격 하고는 술에 취해 병실을 찾는다. 그리고 그녀를 능욕한다. 일종의 자학을 하듯이 .. 그리고 결혼을 해버린다.
한편 '박 현태'와 결혼을 하기로 했던 '형숙'은 일방적으로 이별 통보를 하고는 유학을 가버린다.
'하란'은 딸 '희'를 출산하고, 유명한 가수가 되어서 돌아온 '형숙'과 우연히 재회한 '수영'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형숙'은 자신의 독창회에 '수영'을 초대도 하고 노골적으로 유혹을 하기도 한다.
'허세준'은 '하란'을 향한 사랑의 감정이 자라나 '수미'와의 약혼을 파한다. 쿨한 '수미는 곧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지만, 자궁 외 임신이 되어서 죽게 된다. 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충격을 받은 안 원장은 서재에 틀어박히고, 병원도 넘어간다.
집안의 침울한 분위기 속 방황하던 '수영'은 '형숙'의 유혹을 받아들이고, 공공연하게 외박도 일삼는다. '형숙'과의 만남을 짐작하고 있는 '하란'은 불행해 한다.
'형숙'은 다른 남자와의 데이트도 즐긴다. '수영'은 그런 그녀가 못마땅해서 죽여버리고 싶은 분노를 느끼기도 하지만, 막상 그녀가 자신을 향해 웃어 보이면 녹아내린다. '형숙'은 자신의 삶은 생활의 기교를 부리는 것일 뿐 이라며, 자유롭고 싶다고 한다. 자신은 수영의 아내도, 노예도 아닌, 애인이고만 싶다며...
남자는 여자에게 지나간 이야기는 하지 말자하고
여자는 남자에게 미래의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한다.
과거도 미래도 없는 지금 이 순간만 살기를 원한다고..
남편에게 무시당하고 학대받으며 고통에 빠진 '하란'은 '허세준'의 고백을 되새긴다. 그녀가 불행해지기를 원한다고, '수영'은 돌아오지 않을 거라며..
그가 잠시 위안이 되기도 하지만, 어쩌지 못하고 맴돌던 '하란'은 그 선을 넘지 못하고, 차라리 그녀를 떠나서 이방인이 되어 살고 싶다던 '세준'을 파리로 떠나보낸다.
여전히 다른 남자들과도 자유로운 관계를 즐기며 살던 '형숙'에게 만만치 않은 남자가 나타나고 정보기관에 근무한다던 그 사내의 치정에 의한 복수극은, '수영'을 쏘려고 겨눈 권총을 막아선 '형숙'의 가슴에 꽂히며 끝이 난다.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해보지만, '형숙'은 죽고 오랜만에 가족들이 식탁에 둘러앉았고, 결국 가정이라는 질서 속에서 대면한다는 작가의 작위적인 설명으로 막을 내린다.
마녀 '형숙'은 팜므파탈의 전형이고, 성녀 '하란'은 현모양처의 전형이다. 결국 자신이 사랑한 '수영'을 갖지 못한 '형숙'은 어떤 남자도 가지지 않고 머물게 둔다. 그 가운데 수영을 놓아둔 채. 그녀 또한 누구의 것도 되지 않는다. 자유라는 갈망 아래...
가정부 신여사가 '수영'의 방황을 '하란'에게 위로하면서, '수영'이 치우쳐 있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한다. 유럽의 소설 속 멋진 남자들이 로망하는 '균형 잡힌 인간의 지향'과 비교해서 이 문구가 와닿는다. '수영'도 '안 원장'도 결국엔 치우쳐 있는 사람이다. 무엇 하나에 빠지면 헤어 나지 못하는 캐릭터, 나에게도 다소 그런 경향이 있지 아마도.ㅎㅎ그러므로 내게 있어 문학은 균형잡힌 인간의 지향쯤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