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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평점 :
'정약현',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은 광주 두물머리 마재의 명문가 집안 사형제이다. 서로 벗처럼 책을 읽고, 토론하며 영향을 미친다. 특히나 맏형 '정약현'에 대한 작가의 묘사가 인상적이고 약현의 사위 '황사영'의 세 숙부에 대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그 인상적이라 함은 내가 좋아하는 참선비, 참 학자의 모습이요, 그래서 맑고 고요한 무언가가 얼굴에 드러나는.. 아직 학자가 되지 않은 어린 '황사영'의 얼굴에 깃든 맑음에 대한 묘사도 좋다.
'정약전'이 천주교를 제일 먼저 받아들이고 약종과 약현에게도 전하였으나 약종은 순교를 하고 약전과 약용은 배교를 하여 귀양을 간다.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
'정약현'은 '황사영'을 사위로 맞고, 데리고 살다가 서울로 보낸다. 그리고 그 일가의 노비였던 '김개동'과 '육손이'를 면천하여 준다. 그들은 신부 '주문모'와 '황사영'을 비호하고 점조직처럼 흩어진 교인들의 조직을 관리한다.
'정조'가 죽고 대비 '정순왕후'는 혈안이 되어서 천주교인들을 발본색원하고자 갖은 고문 끝에 죽여 버린다. '주문모'를 찾아, '황사영'을 찾아...
그러나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에게 천주교란, 글을 몰라 교리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해도, 뭔가 당연한 이치가 신비롭고 설레고 희망이 가득할 뿐이다. 현실의 고된 삶끝에 있다는 그 먼 곳을 소망하는 것, 희망하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박차돌'과 오누이 '박한녀', 새우젓 장수 '강사녀'와 버려진 딸, 백도라지로 피어난 젖 유모 어미를 두고도 동냥 미음으로 커야 했던 '아리', 궁인 출신 '길갈녀', 전라도 소작농의 처 '오동희', 말을 닮은 마부 '마노리'... 그 어려운 시대를 살면서도 여인이라서, 가난한 천민이라서 겪는 이중의 노고.. 사람들의 삶이 너무 스산하고 비루하고 고되다. 그리고 부패한 관리들은 그들의 고름을 짜낸다. 각종 세금의 형식으로..
익숙한 지명 교하, 행주나루 수유리, 마포
그리고 흑산도에 유배되어 글을 모르는 사람들 속에 섞인 약전이 '黑山'이란 이름 대신 '玆山', 어둡지만 빛이 들어있다는 '자산'이란 이름으로 쓰면서 섬의 물고기들을 관찰하면서 지었다는 '자산어보'...
'정약용'일가의 불행과 천주교도들의 박해,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가? 뭔가 겉돌다 만 느낌이 드는 책이다.
작가는 후기에서 나는, 겨우 조금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이라고, 그래서 말이나 글로써 설명할 수 없는 그 멀고도 확실한 세계를 향해 피 흘리며 나아간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또 괴로워한다며 맺는다.
작가가 일산에 살면서 자주 절두산 아래를 통과하면서 그의 일상을 압박하는 무언가를 이렇게 토로했던, 그런 책쯤으로... 아무래도 내가 처음읽는 김훈은 다른 책들을 좀더 읽어 본 후에 말해야 할듯..
한때 역사에 묻힌 그들이 목숨 바쳐 지키고 간직해온 것들을 의무적인 미사 참여로만, 성지순례로만 이어나가고 있는, 깊어지지 않은 신앙심을 돌이키며 올 한 해는 절두산 성지, 베론 성지, 해미성지를 순례해 보리라.. 또 눈물만 주룩주룩 흘릴 테지만..
남녀의 행위를 교접이라고 작가는 표현한다. 먼 길을 떠나고 불안한 길을 떠나고 알 수 없는 죽음의 때를 두려워하며 나누는 행위들...
그리고 정약전이 흑산 섬에서 조껍데기 술맛에 젖어들면서 술이 늘어가는데, 조껍데기 술... 예전에 사패산 산행 후 마셔보았던, 맛났던 기억이 있다. 반가운 이름ㅎㅎ 발음을 참 잘해야 하는 조 껍데기 주..
- 귀 기울이지 않아도 물소리는 정약전의 몸속을 가득 채웠고 정약전은 그 소리를 해독할 수 없었다. 그 물소리 너머의 바다에서는 말이 생겨나지 않았고 문자가 자리 잡을 수 없을 것이었다. 언어가 지배하는 세상과 언어가 생겨나지 않은 세상 중에 어느 쪽이 더 무서운 것인가. 물소리 저 너머에서 인간이 의미를 부여해서 만든 말이 아니라 목숨과 사물 속에서 스스로 빚어지는 말들이 새로 돋아날 수 있을 것인가,. 그 말들을 찾아서 인간의 삶 속으로 주워 담을 수 있을 것인지, 어둠 속에서 정약전의 생각은 자리 잡지 못했다. 183-184
- 하늘의 선한 뜻은 권력의 작용이 아니라 인간의 실천을 통해서 일상의 땅 위에 실현할 수 있으며 그 실천의 방법은 사랑이다. 그러므로 네 이웃을 사랑하고 죄를 뉘우치고 뉘우침의 진정위에 새날을 맞이하라. 크고 두려운 날들이 다가온다. 200
- 흑산 사람들은 그 일을 입에 담지는 않았고 정약전의 유배지 신접살림은 흑산의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죽음은 바다 위에 널려 있어서 삶이 무상한 만큼 죽음은 유상했고, 그 반대로 말해도 틀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자들끼리 살아 잇는 동안 붙어서 살고 번식하는 일은, 그것이 다시 무상하고 또 가혹한 죽음을 불러들이는 결과가 될지라도, 늘 그러한 일이어서 피할 수 없었다. 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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