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전혜린 에세이 1
전혜린 지음 / 민서출판사 / 2004년 6월
평점 :
품절


1934년생 '전혜린', 그녀는 '전봉덕'의 딸이다. '전봉덕'은 경성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법과 졸업과 일본 고등문관시험의 행정과와 사법과에 합격했던 수재로, 일제시대 경찰의 수뇌부에 근무하였고, 해방 이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후 헌병부(당시 친일 경찰들의 도피처)에 근무하면서 '김구' 살해범 '안두희'의 보호 및 사건 축소 및 은폐로 '김구' 암살의 배후라는 소문이 꾸준했던 사람이다. 그 이후 '전봉덕'은 국무총리 비서실장을 거쳐 변호사로 일하고 대한 변호사협회 회장을 지내는 등 1980년대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기까지 우리나라 근, 현대사에 많은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이번 독서를 통해 '전혜린'이란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기 위해 그녀에게 가장 영향을 끼쳤던 부친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되었다.

녀는 '전봉덕'의 1남 7녀 중 맏딸로 수재인 아버지의 사랑과 기대, 격려와 자부심에 부합하는, 그녀 역시 수재였다 한다.
1950년대 서울대 3학년에 재학 중 독일로 건너가 5년을 유학한 후 한국에 돌아와 서울대 강사와 성균관대 조교수를 지냈다. 그 유학 중 현 서울대 명예교수이며 헌법학자인 '김철수'와 예정된 만남을 갖고 결혼하여 딸을 낳고는 그 해에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녀의 집에는 그녀 부모와 그녀의 자매들과 딸, 그리고 이듬해 유학에서 돌아온 남편과 식모둘까지 대가족이 살았다 한다.

녀는 독일의 '뮌헨대학' 유학 중, 패전 독일의 다소 독일스럽지 않은 '슈바빙'에 살면서 많은 예술인과 젊은 청춘들과 각 나라에서 온 유학생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문화를 관조하기도, 즐기기도, 부러워하기도, 또 우리 것과 비교하기도 하면서 고독하고 오롯이 자신에게만 침잠하는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스위스에 살던 당시 80세의 '헤르만 헤세'에게 편지를 보내고, 그로부터 사진과 그림과 책 '데미안'과 '싯다르타'를 받기도 한다. 

'데미안', 사강의 '어떤 미소',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와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외 여러 작품을 번역하였다. 

녀는 남편과 이혼하고 얼마 안 돼, 그녀가 끊임없이 두려워하고, 이의를 품었던, 여자로서의 삶과 아내로서의 삶, 엄마로서의 삶을 자살로 마무리한다. 향년 31세..

그녀에 대한 평가는 많이 갈린다. 요절한 천재의 안타까움과 천주교 세례까지 받고 그토록 감동하고 어여뻐하던 어린 딸을 두고 저지른 극단의 선택에 대한 어이없음.. 그리고 그녀의 짧은 유학기간과 그에 반하는 성과에 대한 의구심까지..

책에서의 그녀는 남다르게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이다. 자기애가 강하고, 여성이란 존재로 태어나 살면서 유독 부대끼던, 존재를 앓았던 사람이다. 다른 어떤 평가들보다 내겐 그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시대 다른 여인들의 삶에 비해서 많이 배우고 깨어있음이, 그녀로 하여금 여자로서의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 들여다보게 하고, 모성애를 통해 성장해가는 듯하지만 이내 멈춰진다.

그녀에게 있어 결혼은 자기 내면에 대한 끊임없는 방해이고, 그 시대 사회에 진출한 여성은, 석기시대 수렵하는 남자들을 대신해 동굴을 지키며 아이를 낳고 불을 지피던 그녀들이 동굴 밖으로 나왔을 때 돌팔매질을 해서 죽여야 했던 변절자였던 것이다. 선사시대 이전부터 여자에게 부여되었던, 마땅히 그래야 했던 삶,,이것에 대한 그녀의 상념들이 이세대의 삶을 사는 나를 비롯한 여성들에게도 아직 유효하다하겠다.
    
시대에는 사철 발벗은 아내들이 들로 밭으로 다니고, 폐경이 올 때까지 자녀를 생산하고, 아들도 꼭 낳아야 했던 여인의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이다.
그런 여성들을 엄마로, 할머니로 두었던, 세대들이 한동안 그녀의 이 수필집을 읽으며 엄마처럼은 살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사춘기를 보냈는지도 모른다.
    
중학교 때부터 '죽더라도 평범하게는 살지 말자'라고 스스로를 단속시켰던 그녀는 남다른 지성과 관찰력과 조숙함으로 학업에 대한 경쟁심과 성취, 남다른 독서가 그녀의 생 전부를 지배했던 듯하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분신이었던 딸에게는 책을 읽지 않게 하겠다고 했다. 

딸이 성장하면서 읽게 되길 바랐던 육아일기와 동생에게 쓴 편지글들, 그리고 '데미안'에 대한, '생의 한가운데'에 대한 그녀의 해설이 또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유의미한, 이미 많이 앓았고, 없어져 버린 그녀를 평가절하해버리려는 마음이 없다면,,, 그런 독서라 하겠다.

그녀의 사춘기 시절 친구와 주고받던 편지들, 그리고 일기장 교환 등의 아련한 정서와 때론 고독의 심연에서의 지적인 외침이 와 닿는다. 
내 사춘기 시절, 이 책을 읽으며 나의 감성은 더 충만해졌으며, '루살로메'와 '생의 한가운데' '니나'를 알게 했던 그녀 '전혜린'은 나의 치기어린 시절과 함께 소중하게 간직된 추억이다

- 짙은 안개를 들이마시면서 나는 새파란 하늘을 그리워했다. 감나무와 대추나무를 꿈에 그렸다. 사실로 내가 그리워한 것은 황색 그림자였는지 모른다. 그것은 감상이나 미학적인 어떤 음탄이 아니었다. 그것은 색이 있는 민족의 환영, 그들의 비극이 내 속에 담겨져 있고 그들의 대표자로 내가 여기에서 간주되고 있는 그러한 절실한 비전이었다. p 22

- 그러나 운명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우리의 의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자유롭지는 않다. 우리가 생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생이 우리를 형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기치 않았던, 때로는 소망치 않는 방향과 형식 속에 생이 형성해 놓는다. p30

- 작은 우연이 일생을 결정하기도 한다. 인간은 유리알처럼 맑게. 성실하고 무관심하게 살기에는 슬픔, 약함, 그리움, 향수를 너무 많이 그의 영혼 속에 담고 있다. p31

- 여자는 전체로 보아서 아직도 하인의 신분에 있다. 그 결과 여성은 자기로서 살려고 하지 않고 남성으로부터 이렇다고 정해진 자기를 인식하고 자기를 선택하도록 된다. 남자의 손에 쥐어진 경제적 특권, 남자의 사회적 가치, 결혼의 명예, 남자에 의존하는 것에서 얻는 효과, 이러한 모든 것이 여자들로 하여금 남자의 마음에 들도록 애쓰게 하고 있다. p179

- 무엇보다도 자기를 좀 더 응시할 수 있는 것, 자기를 견딜 수 있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다 비극인 우리의 생의 소상을 긴박하고 팽팽하게 차 있는 참된 순간으로 지속시키는 방법일 것이다.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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