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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선물 -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은희경을 처음 접한 장편소설 새의 선물, 삶이 주는 것들에 농간 당하지 않으려고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며 열두 살에 성장을 멈춘, 사랑을 사소한 것으로 여기고 나 자신을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로 분리해서 분열로 가지 않게끔 단도리 할 줄 아는 소녀 진희의 가족과 이웃에 대한 비밀 이야기(?) 들이다.
하모니카와 염소의 실루엣에서 시작된 깜찍한 첫사랑과, 착각이었음을 알게 된 어느 날에서 어이없는 웃음이 났고, 첫사랑이 상처투성이의 이모에게 한없는 호의를 품은 시선을 보면서 질투와 도의 사이에서 갈등하는 소녀 진희에게 안쓰러움이 생겼다. 인간의 서정성에 대한 그녀의 정리에 기웃거리다, 끄덕이다, 미소짓다가..
내가 왜 일찍부터 삶의 이면을 보기 시작했는가. 그것은 내 삶이 시작부터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삶이란 것을 의식할 만큼 성장하자 나는 당황했다. 내가 딛고 선 출발선은 아주 불리한 위치였다. 더구나 그 호의적이지 않은 삶은 내가 빨리 존재의 불리함을 깨닫고 거기에 대비해주기를 흥미롭게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어차피 호의적이지 않은 내 삶에 집착하면 할수록 상처의 내압을 견디지 못하리란 것을 알았다. 아마 그때부터 내 삶을 거리 밖에 두고 미심쩍은 눈으로 그 이면을 엿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나는 삶의 비밀에 빨리 다가가게 되었다.
군인과 그의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긴 머리의 여자, 이형렬과 이모의 뒷모습은 어쩐지 상징적으로 보인다. 군복이 한시성을 표상한다면 긴 머리는 처녀성을 나타내고, 또한 군복이 구속을 나타낸다면, 긴 머리에서는 자유로운 젊음이 풍겨 나온다. 군복이 제한된 현실에 대한 보상심리를 자극받았을 때 긴 머리의 처녀성은 제물이 될 수밖에 없으며, 긴 머리의 젊음이 자유를 구가할 때 군복에게는 그녀의 배신을 돌이킬 수 있는 개인적 시간이 허용되지 않는다.
교과서가 효심을 고취시킨다는 목적으로 한 단원쯤은 반드시 어머니의 사랑을 환기시키고 모든 어린이용 동시와 동화가 어머니를 아름답고 그리운 존재로 찬미할 때마다 나는 찢어진 치마 사이로 땟국에 전 다리가 내비치던 장터의 미친년을 떠올렸다. 그때 비로소 죄의식이나 공포 같은 강력한 것보다 그리움이나 사랑 따위의 보드라운 것을 이겨내기가 훨씬 힘들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 많은 여자들의 결혼은 첫 경험에 의해 결정된다. 첫 키스를 하거나 처음으로 몸을 섞은 사람에게 여자들은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어릴 때부터 강요된 금기라는 장치에 의해서 그것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도록 길들여져 있다. 단지 첫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그와 함께할 삶을 받아들이며 평생 바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런 첫 경험이 우연히 이루어지는 일이 많다는 사실이다. 내 주변에서 듣고 본 것만 해도 그렇다. 꼭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와만 첫 키스를 하고 처음 옷고름을 풀게 되는 건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성은 자기의 것이다. 남편의 것도 아니며, 처음 문을 연 남자의 것은 더더욱 아니다. 처녀성을 가져간 사람이 내 주인이라는 생각, 우연에 지나지 않은 그 사건에 운명적 의미를 두는 것, 그 모두가 내게는 어리석게만 생각된다. 이모가 경자 이모에게 빌려왔던 소설책들의 작가 토마스 하디와 모파상도 그것을 말하려고 [테스]나 [여자의 일생]을 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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