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유산 - 역사와 과학을 꿰는 교차 상상력
고려대학교 공과대학 기획 / 동아시아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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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떡이 커 보인다. 남의 나라 박물관의 유물은 위대해 보이고, 우리나라 박물관의 유물을 보면 초라해 보인다. 루브르 박물관이나 대영제국 박물관의 유물을 보기 위해 입장료를 지불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진다. 어쩌다가 국내 유물이 전시된 박물관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라 하면 안 가고 만다. 왜 우리는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을 이렇게 홀대하는 것일까? 실제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이 우리에게 홀대를 받을 만큼 하찮은 것일까?

나는 최근에 고려대학교 공과대학이 기획하고 '동아시아아'에서 출판된 '첨단X유산'을 읽으며 우리의 문화유산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나 자신에 대해 반성했다. 그저 남의 나라 유물 귀한 줄만 알았지, 우리의 문화유산이 이토록 값어치 있는 줄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첨단X유산'은 현재 고려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동궐도, 고려청자, 조선백자, 사인검, 보성관, 대동여지도, 수선전도, 오마패, 혼천시계, 태항아리 등을 첨단 과학기술로 재조명하는 책이다. 이 책은 총 10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의 장은 문화유산을 소개하는 특강과 첨단 과학기술을 소개하는 특강으로 나누어져 있어서 총 20개의 특강을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 나는 여태껏 여러 명의 저자가 공저한 책을 많이 읽었다. 아무래도 한 사람이 쓴 책이 아니라 여러 명이 책을 쓰다 보면 글의 수준이 고르지 못할 때가 많았다. 놀랍게도 이 책은 저자들의 학식과 수준이 높아서 그런지 전반적으로 글이 상향 평준화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책은 인문학자들과 공학자들의 콜라보로 만들어졌다. 만약에 인문학자들만이 모여서 이 책을 만들었다면 지금과는 느낌이 많이 달랐을 것이다. 아마도 어려운 역사책을 읽는 느낌이지 않았을까? 흥미롭게도 이 책에서 공학자들이 과거의 유물을 드론, 디스플레이, 리소그래피, 기가스틸, 인공지능, 자율주행차, 스마트시티, 5G, 양자통신, 바이오기술 등과 연결해서 소개하니깐 박물관이 죽어있지 않고 마치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과거의 유물을 그저 과거의 유물로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바로 우리를 위한 유물로 생각하고 참신하게 접근할 때 비로소 우리의 교차 상상력이 극대화되는 것 같다. 고려대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조명철 교수는 이 책의 닫는 글에서 이와 같이 말했다.

"이번 콜라보는 우리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발상의 전환, 새로운 관점, 엉뚱한 상상력 등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우리 민족의 유산이 당대 최고의 수준에 이르는 데에는 인문학적 창조력이 요구되었고, 이는 지금의 첨단기술이 발전하는 과정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인문학적 창조력은 천재적인 개인 또는 집단으로 하여금 끊임없는 고민을 통해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당대 최고의 완성도를 자랑하는 유산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384쪽)

국보급의 문화유산은 당대 최고의 인문학적 상상력과 과학적 기술력이 결합될 때 비로소 탄생한다. 과거의 선조들이 국보급 문화유산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적당한 수준에서 안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름다운 비색을 내기 위해 수 없는 시행착오를 거치지 않았다면 도공에 의해 고려청자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정확한 지도를 만들기 위해 수천 번 혹은 수만 번 지도를 수정하는 과정이 없었다면 대동여지도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국보급의 문화유산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상상력과 과학적 기술력 말고도 최고의 장인정신을 필요한 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러 우리의 후손들이 2020년대를 바라봤을 때, 선조 된 자로서 우리는 그들에게 어떤 문화유산을 남겨줄 수 있을까? 나도 우리의 선조들처럼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남겨줄 수 있다면 이 얼마나 값진 인생일까?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선조가 아니라, 가치 있는 문화유산을 물려주는 선조가 되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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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지 감수성 트러블 - 성인지 페미니즘
오세라비 외 지음 / 가을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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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연초에 화장품을 새로 사야 했다. 원래 쓰던 로션을 다 사용했기 때문이다. 화장품 매장에 들어가니 점원이 어느 로션을 추천했다. 가격이 적당해서 별생각 없이 로션을 샀다. 며칠 동안 세안 후에 로션을 발랐다. 바를 때는 괜찮은데 얼마 지나니 입 주변에 트러블이 올라왔다. 트러블을 무시하고 일주일간 더 사용했다. 피부가 뒤집어졌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는 사람들 만나기 민망할 정도였다. 더 이상 이 로션을 쓸 수 없어서 순한 아이 로션을 발랐다. 아이 로션을 바르니 서서히 트러블이 가라앉았다. 새로 산 로션은 몸에 바르는 바디로션으로 용도를 변경했다. 연초부터 피부 트러블 때문에 신경이 거슬렸다.

피부 트러블이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트러블의 원인이 되는 화장품의 사용을 즉각 중지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피부가 더 망가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가을밤에서 최근에 출간된 '성인지 감수성 트러블'을 읽으며, 성인지 감수성을 덕지덕지 발라서 트러블투성이가 된 대한민국이 연상되었다. 성인지 감수성을 바르기 전에는 대한민국이 봐줄 만한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트러블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성인지 감수성은 어떻게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은 트러블 메이커가 된 걸까?

'성인지 감수성 트러블'은 대한민국의 성인지 감수성 교육의 실태와 현황을 적나라하게 지적하는 책이다. 이 책은 총 3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1부는 '성인지 감수성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제목으로 오세라비 작가가, 2부는 사법부의 성인지 감수성 용어 남용에 대한 위험성과 우리의 대응'이란 제목으로 안요한 대표가, 3부는 '나다움 어린이 책과 성인지 감수성'이란 제목으로 전혜성 연구위원이 각각 집팔했다. 책의 분량이 많지 않기에, 책을 완독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이 책을 읽으며 성인지 감수성을 교육하는 데 31조 7000억 원의 국가 예산이 소모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31조면 국가 예산의 6%에 해당하는 상당히 많은 액수이다. 그렇기에 이 성인지 감수성 교육이 여성단체와 같은 특정 세력을 위한 예산 몰아주기와 다를 바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코로나19로 인해 자영업자들은 장사를 못해서 파산 직전인데, 성인지 감수성 교육을 하는 세력은 막대한 예산으로 흥청망청 돈잔치를 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이게 과연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한 일일까?

"성인지 감수성을 향상시켜야 한다면서 오히려 발언의 자유, 창작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관용의 정신을 제한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ㅇ성계의 성인지 개념의 과도한 사용에 대해 우려하지 않ㅇ르 수 없다. 이데올로기의 노예는 위험하다. 성인지 만능시대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 결국 성인지 감수성도 젠더 페미니즘 전쟁의 새로운 전략일 뿐이다." (53쪽)

'성인지 감수성 트러블'을 읽으며, 대한민국에서 성인지 감수성 교육이 '3무'로 정리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단 대한민국의 성인지 감수성 교육은 '무근본적'이다. 인류 역사에서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개념을 이렇게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교육한 전례가 없다. 도대체 이 뿌리 없는 교육의 결과로 대한민국은 어떤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는가?

또한 대한민국의 성인지 감수성 교육은 '무제한적'이다. 성인지 감수성 교육이 필요하다면 때와 장소를 분명히 가려야 한다. 아직 어린 초등학생에게 성인지 감수성 교육이라는 미명 하에 급진 페미니즘을 강제해서는 안 된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무제한적으로 실시되는 성인지 감수성 교육은 분명히 적절한 통제가 필요하다.

궁극적으로 대한민국의 성인지 감수성 교육은 '무질서'를 야기한다. 성인지 감수성 교육은 남성과 여성을 상호 동반자의 관계로 보지 않고,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여성을 잠재적 피해자로 본다. 성인지 감수성 교육을 통해 대한민국의 학교, 가정, 회사, 사회는 더 무질서해졌다. 남과 여의 신뢰는 깨지고 곳곳에 트러블이 일어나고 있다.

이처럼 무근본적이고, 무제한적이며, 무질서를 야기하는 성인지 감수성 교육에 대해 침묵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성인지 감수성 트러블은 대한민국에 더 큰 흉터를 남길 것이다. 남과 여를 적대시하는 교육이 아닌 서로를 상호 존중과 평화공존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평화교육이 필요하다. 트러블 메이커를 양성하는 교육이 아닌 피스 메이커를 양성하는 새로운 교육의 도래를 갈망하며 이 책의 일독을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오세라비 #안요한 #전혜성 #성인지감수성트러블 #가을밤 #미래대안행동 #바른인권여성연합 #페미니즘 #성인지감수성 #젠더감수성 #feminism #feminist #카이노스카이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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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습니까? 믿습니다! - 별자리부터 가짜 뉴스까지 인류와 함께해온 미신의 역사
오후 지음 / 동아시아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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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정치는 내가 사석에서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 주제다. 이와 관련된 대화는 본전을 찾기 힘들다. 대다수의 인간은 종교와 정치에서 나름의 식견을 가지고 있다. 대화를 통해서 이 식견이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종교와 정치는 개인의 정체성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자칫 이를 잘못 이야기하면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 그 상처는 관계의 단절로도 이어질 수 있다. 혹시 종교와 정치를 언급하려면 마음속으로 먼저 각오해야 한다. 이 대화를 마지막으로 관계가 깨질 수도 있다고 말이다.

애석하게도 오후 작가의 신작 '믿습니까? 믿습니다'에서 종교와 정치라는 민감한 주제를 건드렸다. 이왕 오후 작가가 종교와 정치를 건드릴 거면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주제만 살짝 건드려야 했다. 그랬다면 이 책은 현대사회에 만연한 신화와 미신을 교정하는 좋은 책으로 길이길이 남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오후 작가는 지혜롭게 낄끼빠빠하지 못했다. 저자는 종교와 정치를 싸잡아 언급하며 그 누구도 선뜻 동의하기 힘든 말을 했다.

"어쩌면 예수가 2,000년 전에 하고 싶었던 게 공산주의 사회를 만드는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의 일생에서 신비 요소를 제하고 나면 공산주의자와 흡사한 모습만 남는다. 다만 시대적 한계로 예수는 자기 생각을 사상으로 발전시킬 만큼 체계를 세우지 못했고, 자의든 타의든 구원자로서 종교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마르크스는 생전에 자신의 사상이 왜곡되는 것을 보고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발언한 적이 있다. 아마 예수도 오래 살았다면 비슷한 말을 했을 것 같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263쪽)

예수가 공산주의자라니? 이는 예수쟁이가 아니라 공산주의자가 분노해야 할 말 아닐까? 공산주의의 역사를 안다면, 과연 예수가 공산주의자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공산주의가 들어간 곳에서 가장 먼저 핍박받은 사람이 예수쟁이였는데 말이다. 예수가 공산주의자라는 말은 김일성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처럼 황당하다. 오히려 나는 예수가 공산주의자였을 확률보다 김일성이 그리스도인이었을 확률이 더 높다고 생각한다. 그의 어머니 강반석은 교회 신자였고, 그의 할아버지 김형직은 선교사들이 세운 미션스쿨 숭실중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일성이 북한에서 그리스도인에게 가했던 참혹한 핍박을 생각한다면 김일성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건 역사적으로 불가능하다. 하물며 예수가 공산주의자였다는 말은 더 말해서 무엇하랴.

나는 이 책에서 저자가 점성술, 손금, 관상, 사주, 팔자 등등을 이야기할 때 저자의 지식에 감탄하면서 책을 읽었다. 그러나 저자가 종교와 정치를 연결해서 이야기할 때 혀를 끌끌 차면서 책을 읽었다. 종교와 정치에 관해서는 가능하면 언급 안 하는 게 좋다. 오랜 내공을 쌓았거나, 상대를 설복시킬 인격이 준비되지 않았다면 말이다. 만약 이 책이 종교와 정치는 빼고 더욱더 과학적 미신에 집중했다면 훨씬 더 좋은 책이 되었을 것이다. 기획과 편집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믿습니까믿습니다 #동아시아 #오후 #별자리 #점성술 #mbti #미신 #종교 #정치 #과학 #천문학 #카이노스카이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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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알드 달 베스트 단편 세트 - 전3권 로알드 달 베스트 단편
로알드 달 지음, 정영목 외 옮김 / 교유서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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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위 어금니 뒤쪽에 사랑니가 자라고 있다. 그 부위에 혓바닥을 대면 밥알이 낀 것처럼 이물감이 느껴진다. 사랑니는 곧게 자라고 있다. 전부터 오른쪽 아래 어금니 뒤쪽에도 사랑니가 곧게 자라고 있었다. 곧게 자라는 사랑니는 고통스럽지 않다. 썩지 않는다면 굳이 발치할 필요도 없다. 사랑니는 불편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로알드 달의 단편소설을 읽는 건, 마치 어금니 뒤쪽에 있는 사랑니를 혀로 핥는 느낌이었다. 그의 단편소설 하나하나는 독자에게 작은 불편함을 선사한다. 이 불편함이 치명적이지는 않다. 이 불편함은 쓴웃음을 자아낸다. 어금니 뒤쪽에서 무시로 자라는 사랑니처럼, 그의 단편소설은 독자의 마음속에서 서서히 자라난다. 책을 덮어도 그의 소설이 생각난다. 화장실을 가더라도 주인공의 우스꽝스러운 행동이 불연듯 떠오른다. 소설을 읽는 건 끝이 났으되, 탐구는 쉬이 끝나지 않는다.

새해를 맞아 교유서가에서 로알드 달의 단편소설을 세 권으로 묶어서 '로알드 달 베스트 단편 세트'를 출판했다. 1권은 '맛', 2권은 '클로드의 개', 3권은 '헨리 슈거'라는 제목이 각각 붙어있다. 이 세트를 다 읽지는 못하고, 나는 그저 1권만 맛보았다. '맛'에는 총 8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었다. 8편의 단편소설은 배경과 주인공이 제각각 상이하다. 배경과 주인공은 다르지만, 단편소설에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 소설의 초반부에는 주인공이 속임수를 써서 이익을 얻는다. 후반부에는 주인공의 속임수가 드러나거나 혹은 전혀 예상치 못한 내용이 전개되어 주인공이 큰 낭패를 겪는다. 그 어느 단편소설도 지루함이 없다. 매번 다음 단편소설을 기대하게 만든다.

책을 다 읽으면, 'The Roald Dahl Caritable Trust'라는 단체의 소개 글을 볼 수 있다. 이 소개 글에는 로알드 달이 어떤 사람인지 잘 묘사되어 있다.

"이야기는 당신에게 유익합니다. 로알드 달은 스파이였고 뛰어난 전투기 조종사였으며 그는 '찰리와 초콜릿 공장', '마틸다', '내 친구 꼬마 거인' 같은 훌륭한 이야기들을 숱하게 짓기도 한 세계 최고의 이야기꾼입니다. 그는 "만약 당신이 좋은 생각을 품고 있다면 그것은 햇살처럼 당신의 얼굴에서 빛날 것이고 당신은 언제나 사랑스러워 보일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좋은 일을 하는 것의 소중함을 믿습니다."

로알드 달의 단편소설을 읽기 전에, 그를 세계 최고의 이야기꾼이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면 과장이 심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번에 그의 단편소설을 직접 읽으니 이건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로알드 달은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인간의 욕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무심하게 말하는 로알드 달의 글 솜씨에 빠져드는 건 유쾌한 일이다. 어금니 뒤쪽의 사랑니가 나와 평생 함께할 운명이라면, 로알드 달의 단편소설과도 평생 함께하고 싶다. 불편한 존재감이 선사하는 생의 의미가 결코 작지 않기 때문이다.

#로알드달 #로알드달베스트단편세트 #교유서가 #맛 #클로드의개 #헨리슈거 #단편소설 #Roalddahl #문학 #카이노스카이로스 #kainoskair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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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빈스키 - 종(種)의 최후 현대 예술의 거장
정준호 지음 / 을유문화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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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펼치고 나는 깨달았다. 내가 러시아 음악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스트라빈스키는 고사하고 나는 러시아 음악에 대해서 그동안 별로 관심이 없었다. 거의 유일하게 관람한 러시아 음악 공연은 아마도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정도밖에 없다. 그렇기에 나는 정준호 작가의 '스트라빈스키'를 읽으며, 아무 선입견 없이 스트라빈스키를 대면할 수 있었다. 이 책에 담긴 모든 내용이 내게는 어려우면서도 신선했다.

1882년에 러시아에서 태어나 1971년 미국에서 생을 마감한 스트라빈스키는 긴 생애만큼이나 굴곡진 삶을 살았다. 그의 대표작인 '불새'와 '봄의 제전'은 그가 음악가로서 초창기 경력을 쌓을 때 만든 작품이었다. 이후에도 많은 작품을 만들었지만, '불새'와 '봄의 제전'만큼 사람들에게 파격을 선사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스트라빈스키 하면 '불새'와 '봄의 제전'의 작곡가로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된다.

이 책을 쓴 정준호 작가는 이미 12년 전에 스트라빈스키의 평전을 집필했었다. 이번에 12년 만에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된 '스트라빈스키'는 전작의 전면 개정판이라 할 수 있다. 이미 한번 집필한 음악가에 대해 다시 책을 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그 일에 다시 무모하게 도전했다. 나는 그 무모한 도전의 이유를 스트라빈스키에게서 찾고 싶다. 스트라빈스키 역시 일평생 자기가 이미 작곡한 음악을 수정하고, 고치는 일은 반복했기 때문이다. 완벽한 음악을 향한 스트라빈스키의 열정과 완벽한 평전을 향한 작가의 열정이 서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시기 스트라빈스키가 가장 힘을 쏟은 작업 가운데 하나가 자기 작품을 다시 손보는 일이었다. '불새'는 1911년과 1919년 편곡에 이어 1945년에 또 개정되었다. 밑바탕은 같더라도 색을 입히는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389쪽)

스트라빈스키가 자신의 음악을 계속 개정하는 것을 보며 나는 문득 종교개혁가 존 칼빈을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존 칼빈과 스트라빈스키는 여러 공통점이 있다. 첫 번째 공통점은 스트라빈스키와 칼빈은 자신의 작품을 개정하는 걸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칼빈은 1536년에 '기독교강요' 초판을 쓰고, 1539년에 '기독교강요' 2판을 쓰고, 1543년에 '기독교강요' 3판을 쓰고, 1550년에 '기독교강요' 4판을 쓰고, 1559년에 '기독교강요' 최종판을 썼다. 칼빈은 무려 '기독교강요'를 23년간 5번이나 개정한 것이다. 스트라빈스키와 칼빈은 이처럼 자신의 작품이 더욱더 완벽해질 때까지 수정과 개정을 멈추지 않았다.

스트라빈스키와 칼빈의 두 번째 공통점은 둘 다 법학을 공부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 스트라빈스키와 칼빈이 계속 자신의 작품을 고친 것에 힌트가 될 수도 있다. 법운 영원불변하지 않고 시대에 따라 변화되는 가변적 속성을 띤다. 법은 진리를 반영하긴 하지만, 법이 곧 진리는 아니다. 시대에 맞게 법이 개정되는 것처럼, 스트라빈스키의 음악도 칼빈의 '기독교강요'도 얼마든지 개정될 수 있다. 비록 스트라빈스키가 칼빈처럼 치열하게 법학을 공부한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스트라빈스키는 법학도로서 법에 대한 지식은 타인보다 더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스트라빈스키와 칼빈의 마지막 공통점은 그들이 이 땅에서 나그네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유럽과 미국에서 대부분의 생을 살았고, 칼빈은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스위스 제네바에서 대부분의 생을 살았다. 스트라빈스키가 고향을 떠난 이유는 창작의 자유를 위함이었고, 칼빈이 고향을 떠난 이유는 종교의 자유를 위함이었다.

"1945년 12월 28일, 스트라빈스키는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전쟁이 끝나면서 유럽에서 건너온 인사들이 잔류와 귀향 사이에서 고민했지만, 혁명과 전쟁을 피해 평생을 떠돌았던 스트라빈스키는 딱히 돌아갈 곳이 없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여건은 자유롭게 창작하고 연주할 환경이었다. 고민은 필요 없었다." (377쪽)

그런데 스트라빈스키와 칼빈의 결정적 차이도 있다. 칼빈은 종교개혁이 시작하는 초창기에 활동했지만, 스트라빈스키는 클래식음악이 정리되는 말기에 활동했다. 칼빈은 자신으로부터 종교개혁이 시작되는 것을 느꼈지만,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으로부터 클래식음악이 마무리되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이 책에 '종의 최후'라는 부제가 달린 것도 그러한 의미가 담겨있다. 이 책의 초판은 원래 '현대 음악의 차르'라는 부제가 달렸다. 그러나 저자는 이 부제를 '종의 최후'라고 바꾸었다. '종의 최후'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여기서 종(種)은 다윈이 쓴 '종의 기원'에서의 종과 같은 의미이다. 저자는 개정판에서 스트라빈스키의 죽음으로 클래식음악의 위대한 세기가 막을 내렸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스트라빈스키 이후로 클래식음악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바흐부터 시작되고 스트라빈스키에서 마무리되는 클래식음악의 위대한 역사는 과연 끝난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다시 들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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