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라빈스키 - 종(種)의 최후 현대 예술의 거장
정준호 지음 / 을유문화사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처음 펼치고 나는 깨달았다. 내가 러시아 음악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스트라빈스키는 고사하고 나는 러시아 음악에 대해서 그동안 별로 관심이 없었다. 거의 유일하게 관람한 러시아 음악 공연은 아마도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정도밖에 없다. 그렇기에 나는 정준호 작가의 '스트라빈스키'를 읽으며, 아무 선입견 없이 스트라빈스키를 대면할 수 있었다. 이 책에 담긴 모든 내용이 내게는 어려우면서도 신선했다.

1882년에 러시아에서 태어나 1971년 미국에서 생을 마감한 스트라빈스키는 긴 생애만큼이나 굴곡진 삶을 살았다. 그의 대표작인 '불새'와 '봄의 제전'은 그가 음악가로서 초창기 경력을 쌓을 때 만든 작품이었다. 이후에도 많은 작품을 만들었지만, '불새'와 '봄의 제전'만큼 사람들에게 파격을 선사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스트라빈스키 하면 '불새'와 '봄의 제전'의 작곡가로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된다.

이 책을 쓴 정준호 작가는 이미 12년 전에 스트라빈스키의 평전을 집필했었다. 이번에 12년 만에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된 '스트라빈스키'는 전작의 전면 개정판이라 할 수 있다. 이미 한번 집필한 음악가에 대해 다시 책을 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그 일에 다시 무모하게 도전했다. 나는 그 무모한 도전의 이유를 스트라빈스키에게서 찾고 싶다. 스트라빈스키 역시 일평생 자기가 이미 작곡한 음악을 수정하고, 고치는 일은 반복했기 때문이다. 완벽한 음악을 향한 스트라빈스키의 열정과 완벽한 평전을 향한 작가의 열정이 서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시기 스트라빈스키가 가장 힘을 쏟은 작업 가운데 하나가 자기 작품을 다시 손보는 일이었다. '불새'는 1911년과 1919년 편곡에 이어 1945년에 또 개정되었다. 밑바탕은 같더라도 색을 입히는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389쪽)

스트라빈스키가 자신의 음악을 계속 개정하는 것을 보며 나는 문득 종교개혁가 존 칼빈을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존 칼빈과 스트라빈스키는 여러 공통점이 있다. 첫 번째 공통점은 스트라빈스키와 칼빈은 자신의 작품을 개정하는 걸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칼빈은 1536년에 '기독교강요' 초판을 쓰고, 1539년에 '기독교강요' 2판을 쓰고, 1543년에 '기독교강요' 3판을 쓰고, 1550년에 '기독교강요' 4판을 쓰고, 1559년에 '기독교강요' 최종판을 썼다. 칼빈은 무려 '기독교강요'를 23년간 5번이나 개정한 것이다. 스트라빈스키와 칼빈은 이처럼 자신의 작품이 더욱더 완벽해질 때까지 수정과 개정을 멈추지 않았다.

스트라빈스키와 칼빈의 두 번째 공통점은 둘 다 법학을 공부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 스트라빈스키와 칼빈이 계속 자신의 작품을 고친 것에 힌트가 될 수도 있다. 법운 영원불변하지 않고 시대에 따라 변화되는 가변적 속성을 띤다. 법은 진리를 반영하긴 하지만, 법이 곧 진리는 아니다. 시대에 맞게 법이 개정되는 것처럼, 스트라빈스키의 음악도 칼빈의 '기독교강요'도 얼마든지 개정될 수 있다. 비록 스트라빈스키가 칼빈처럼 치열하게 법학을 공부한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스트라빈스키는 법학도로서 법에 대한 지식은 타인보다 더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스트라빈스키와 칼빈의 마지막 공통점은 그들이 이 땅에서 나그네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유럽과 미국에서 대부분의 생을 살았고, 칼빈은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스위스 제네바에서 대부분의 생을 살았다. 스트라빈스키가 고향을 떠난 이유는 창작의 자유를 위함이었고, 칼빈이 고향을 떠난 이유는 종교의 자유를 위함이었다.

"1945년 12월 28일, 스트라빈스키는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전쟁이 끝나면서 유럽에서 건너온 인사들이 잔류와 귀향 사이에서 고민했지만, 혁명과 전쟁을 피해 평생을 떠돌았던 스트라빈스키는 딱히 돌아갈 곳이 없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여건은 자유롭게 창작하고 연주할 환경이었다. 고민은 필요 없었다." (377쪽)

그런데 스트라빈스키와 칼빈의 결정적 차이도 있다. 칼빈은 종교개혁이 시작하는 초창기에 활동했지만, 스트라빈스키는 클래식음악이 정리되는 말기에 활동했다. 칼빈은 자신으로부터 종교개혁이 시작되는 것을 느꼈지만,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으로부터 클래식음악이 마무리되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이 책에 '종의 최후'라는 부제가 달린 것도 그러한 의미가 담겨있다. 이 책의 초판은 원래 '현대 음악의 차르'라는 부제가 달렸다. 그러나 저자는 이 부제를 '종의 최후'라고 바꾸었다. '종의 최후'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여기서 종(種)은 다윈이 쓴 '종의 기원'에서의 종과 같은 의미이다. 저자는 개정판에서 스트라빈스키의 죽음으로 클래식음악의 위대한 세기가 막을 내렸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스트라빈스키 이후로 클래식음악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바흐부터 시작되고 스트라빈스키에서 마무리되는 클래식음악의 위대한 역사는 과연 끝난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다시 들어야한다.

#도서협찬 #현대예술의거장 #스트라빈스키 #종의최후 #을유문화사 #정준호 #stravinsky #classic #calvin #칼빈 #클래식음악 #도서리뷰 #review #카이노스카이로스 #kainoskairos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