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제9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박민정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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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오랜만에 읽는 한국 현대문학이었다.

거기다 ‘젊은’ 작가들이라는 말에 기대가 컸다.

다 읽고 난 지금 느끼는 감정은 혼란스러움이다.

문단은 도대체 현실 세계와 얼마나 멀어지고 있는 걸까 싶었다.



1. 

특히 대상을 받은 「세실, 주희」라는 작품은 이 작품을 쓴 작가가 여자라는 점도 놀랍고, 이 작품에게 대상을 줬다는 문단의 심사위원들도 놀랍고, 심사평은 더더욱 놀라웠다.


시작은 어떤 페미니즘적인 이야기를 꺼내려는 듯싶더니,

나중에 가서는 페미니즘 따위 중요한 게 아니라고 훈계질 하고 있는 느낌이다.


여성 서사 자체에 힘을 실어주려는 독자들이나 관객들이 많다.

워낙에 그 숫자 자체가 적기 때문이다. 

그들은 작품의 수준 여하조차 판단하지 않고 거의 무조건적으로 지지해준다.

여성 창작자들이나 여성 서사 자체를 북돋아

더 많은 여성 서사들이 늘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일 것이다.


그런데 「세실, 주희」는 오히려 나와서는 안 되는 해로운 여성 서사를 보여준다.

소설은 세 명의 각기 다른 환경의 여성들이 나와 그들의 국가적 정체성을 드러내면서,

문화적·국가적 차원의 수직적인 층위에 대한 문제를 말한다.

이렇게만 말하면 상당히 괜찮은 수준의 여성 서사 같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그렇지가 않다.


여성 인물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문화권이 아닌, 상위 문화권이라 여겨지는 타국의 문화권을 동경한다. 그리고 그 타국의 문화권에서의 2등 시민 자리에 만족한다.


그 2등 시민의 자리는 외국인이라는 핸디캡과 동시에 여성이라는 이중의 핸디캡을 가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등 국민도 되지 않는 자리일 수도 있겠다.


주인공 주희는 세실이라는 일본인 여성의 ‘한심한’ 빠순이 짓을 바라보며,

뉴올리언스의 문화를 쫓아다녔던 자신이 얼마나 한심했는지를 발견한다.


세실은 동방신기 때문에 한국에 와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고, 

주희가 일하는 뷰티숍에서 일본인 손님을 응대한다.

그녀는 한국과 일본 간의 역사에 무지하고 관심도 없는 그냥 ‘빠순이’로 그려진다.


세실을 낮추어 보며 문화적 권력을 쥐고 있던 주희는

결국 자신도 하등 다를 바 없는 한심한 여자아이임을 인정한다.


남자는 주요 등장인물로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 이 이야기에서

여성들이 뒤집어쓰고 있는 속물스러움과 모순들은 여성들 스스로의 잘못된 생각 때문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남자 등장인물은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저 여자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자각하기만 하면 그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니까.


세상에 이상한 여성은 많다.

속물스럽고, 모순된 여성들도 많다. 동방신기 빠순이인 일본 여자들도 많고,

뉴올리언스 같은 이국에서 이미 그 문화의 일부라고 착각하는 여자들도 많다.

하지만 그 문제들이 온전히 그녀들만의 문제일까?


유독 여성들 사이에서 왜곡된 가치관을 가진 경우(특히나 국가 간의 역사적·문화적 위계 구조에서)가 많다면, 그것은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적인 문제가 깊숙이 개입된 것은 아닐까?


괴물이 된 ‘보편적인’ 여성을 그린다면, 괴물이 된 맥락을 그려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건 사회적인 ‘여혐’을 재생산하는 것밖에는 안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주변에 저런 여자들은 널리고 널렸다. 그래서, 그대로 그 모습을 옮겨놓기만 하면 된다는 말인가.

그것만으로 소설의 의무는 끝난 것일까?

해로운 여성 서사라는 말은 이런 이유에서다.


젊은 여성 작가가 쓴 여성 서사가 이럴 수 있다는 게 대단히 놀랍다.

여성 작가라기보다는 중년 남성 작가가 젊은 여성들 보라고 써놓은 이야기 같다.

대단히 노골적으로 여자들을 탓하고 있는 느낌.


‘니들이 하는 짓거리가 이렇게 한심하단다.’


더군다나 2018년에 말이다.


한국의 문단이란, 중년 남성 작가들의 마음을 대변해줘야만 인정받을 수 있는 곳인가.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페미니즘에 대한 뒤떨어진 수준을 보고 있자니 자꾸 그런 의심이 든다.



2.

나는 장르물에 익숙해서 그런지 몰라도 공포 장르에 가까운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과 판타지물의 느낌이 물씬 나는 「그들의 이해관계」를 재밌게 읽었다.


특히 「회랑을 배회하는…」이 보여주는 ‘예술을 비판하는 방식’이, 

마지막 작품인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와 비교되어 재미있었다.

기존 예술 판을 비웃고, 조롱하는 방식을, 장르적 장치들로 표현하는 것과

다시 순문학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의 차이를 보이는데,

확실히 전자의 경우가 담백하고 모순됨이 없어 보였다.


「자이툰 파스타」는 실컷 기성 예술인을 비웃고 비꼬는데,

그 기성 예술인의 모습이 너무 과장되어 있어서 속 좁은 악의만이 드러난다.

그런 어린아이 같은 칭얼거림을 ‘젊음과 다양성의 미덕’이라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다.(p. 338)

작품에 나오는 말대로 예술이란 ‘기록해 놓을 만한’ 자위일 뿐인가 보다.



3.

「자이툰 파스타」의 경우는 그 밖에도 비슷한 위태로운 지점들을 

상당히 약삭빠른 방식으로 돌파해낸다.


이를테면, 초반에는 영락없는 홍상수 영화처럼 진행되다가, 

독자들이 그렇게 판단할 즈음에 그런 독자를 오히려 지적한다.


세상천지에 술 먹고 싸우는 얘기는 다 홍상수 아류인 건가요? p. 287


고리타분한 퀴어 영화를 욕하다가 결국엔 크게 다르지 않은 이야기가 된다.


그때의 우리가 느꼈던 감정은 모래바람처럼 한순간에 우리를 휩쓸고 지나가버린 것이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울지는 않았다. 신파는 영화로 족했다. p. 309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쓰다가(뭔가 메시지를 던져야 할 마지막에)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라고 말해버린다.


우리는 애초에 아무것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아니며, 그러므로 영원히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p. 318


자신의 단점을 미리 알고 방비책을 마련한다는 점이 약간은 비겁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4.

「자이툰 파스타」가 재밌는 지점은 하나 더 있다.

한국 문단의 퀴어 소설 선두에 서 있는 작가답게도,

자신의 성 정체성을 내세워 어떤 유리한 지점을 선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반복해서 ‘진짜 퀴어’임을 내세우며,

헤테로 남성이 퀴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을 ‘가짜’로 규정한다.


나는 오감독의 영화를 보고 그가 동성애자가 아님을 확신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이성애 섹스 전력조차 의심하게 되었다. p. 284


그러는 오감독님이야말로 동성애가 뭔지 알기는 알고 하는 소리예요? 동성애자 한 번 본 적이라도 있어요? p. 288


보통 오감독 캐릭터에게 향하는 지적들인데, 오감독 캐릭터는 지나치게 과장돼 있고 과하게 희화화되어 있다. 그가 만취해서 빈 회접시에 머리를 박을 때, 흑채 가루가 떨어졌어야만 했을까. 여기서도 작가의 개인적인 분노가 느껴진다. 또다시 자위 얘기가 떠오른다.


단순하게 작가가 퀴어라는 사실만으로 (당연하게도) 좋은 퀴어가 나오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퀴어가 쓴 것만 진짜 퀴어 문학이고, 이성애자가 쓰면 퀴어 문학이 아닌 것도 아니다.

그것은 마치, 「세실, 주희」의 박민정 작가가 여성이기 때문에 훌륭한 여성 서사를 만들어냈다고 우기는 것과도 같다.


독자가 읽고 싶은 것은 저자의 성 정체성이 아니다. 작품 속에 설득될만한 인물이 있고, 그 이야기에 깊이 공감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5. 

마지막으로, 「자이툰 파스타」가 지향하는 남성성의 정체는 뭘까 하고 생각하게 됐다.

게이 남성들이 등장하는 이야기에 군대 이야기, 그중에서도 자이툰 파병 이야기가 내세워져야 하는 이유는 뭘까. 


자이툰 파병이라 함은 국내에서 군 복무를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국내 군 복무는 그냥 군 복무라면, 자이툰 파병은 실제 전장, 즉 실전이다.

사격장이 아니면 실탄을 만져볼 수도 없는 한국 군대가 아니라

실제로 실탄이 지급되고, 생화학 무기가 터지는 전쟁터인 것이다.

그곳은 모래먼지가 날리는, 컨테이너 박스에서 잠을 자야 하는 거칠고 남성적인 배경에, ‘왕샤’라는 캐릭터가 갖고 있는 남성미가 넘치는 육체까지.


나는 저자가 자신이 퀴어임을 강조하고 있지만, 

동시에 한국 남자임도 (의도하진 않았지만)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게이다. 하지만 나는 군대를 다녀왔으며, 지원-선발 되어, 

국내 군대와는 차원이 다른 실제 전장에서 구른 몸이다.


이것은 마치 남성들의 사회에 최소한의 인정을 요구하는 몸짓으로 읽힌다.

퀴어들에게 남성들의 인정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그런 면에서 저자는 퀴어로서의 인정과 동시에, 한국 남성 사회에서의 인정을 요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왕샤의 아버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실종된 것’은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퀴어 남성에게 (한국적) 남성성은 죽지 않았다. 은밀히 살아서 숨 쉬고 있다. 혹은 그렇다고 믿고 싶어 한다.


다들 아버지가 납치되거나 불의의 사고를 당한 거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아닌 거 같아. 숨어서 어디선가 살아 숨쉬고 있는 거 같아. p. 269



6.

소설마다 평론이 하나씩 붙어 있는데,

평론이랍시고 줄거리 다시 요약하고 있는 인간들은 도대체 뭔가 싶다. 

소설을 읽고 난 직후에 다시 그 요약된 줄거리를 읽어야 할 정도로 

독자가 바보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그냥 분량 때우려는 꼼수인 건가. 

어느 쪽이든 문제가 많다. 한국의 문학 평론 수준이 심히 의심되는 지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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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발명 - 사후 세계, 영생, 유토피아에 대한 과학적 접근
마이클 셔머 지음, 김성훈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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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스켑틱》의 발행인으로 유명한 마이클 셔머의 신작이다.

원제는 ‘Heavens on Earth’인데, ‘지상의 천국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까.

인간이 꿈꾸는 천국을 비롯한 영생, 사후세계에 대한 허위성을 낱낱이 파헤친다.

과연 과학적 회의주의자로 유명한 저자다운 소재 선택이다. 


역시나 가장 먼저 격파 당하는 것은 종교적인 사후세계 개념들이고,

그다음으로는 환생이나 임사체험 같은 신비한 경험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례들.


종교에 대한 부분은 사실 ‘갈 길이 바쁘니 자세한 건 생략한다’ 같은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일신교들(유대교, 개신교, 이슬람교)이 

저자가 지적한 허점들에 대해 그렇게 허술한 논리를 가지고 있을 리 없다.

그 종교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완벽한 논리체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파고들다 보면 한도 끝도 없이 평행선만 그리게 될 테니, 

회의주의자 입장에서 문제점만 지적하고 넘어가는 것은 이해할만하다.

간단하게 말해서, 그들이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단 하나의 증거도 없다는 것.

그것으로 게임 끝이다.


이것은 어찌 보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막연하게 사후세계를 상상하는데 익숙하고, 

그것에 대해 대충이라도 안다고 여기는 태도들에 대한 정면 비판이다.

안다고? 어떻게? 우리는 할 말이 없다.



이어지는 내용은 반대로 과학적으로 영생을 이룩하려는 다양한 노력들인데,

의외로 저자는 대부분의 시도를 회의적으로 바라본다.

여기서부터 저자의 진가가 드러난다.


과학은 죽음을 아는가? 사후세계를 아는가?

절대로 모른다.

과학적 영생은 가능한가?

적어도 이번 세기에는 불가능해 보인다.


앞서 종교 부분에서도 느낀 거지만,

회의주의는 일종의 겸손함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알게 한다.

그리고 그 태도 때문에 우리는 저자를 더 신뢰할 수 있게 된다.

저자는 자신이 직접 겪은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경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전혀 있을 것 같지 않은 사건까지도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시간이 오기 전에는 이런 이야기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그냥 즐기면 된다. 그 안에 담긴 감정적 중요성을 인정하고 그 미스터리를 받아들이자.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을 굳이 신이나 초자연적인 힘을 들먹이며 채우려 들 필요는 없다. 우리가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냥 “나는 모르겠어”라고 말하고 자연스러운 설명이 등장할 때까지 그 상태를 내버려 두어도 문제 될 것 없다. 그때가 올 때까지 미스터리를 즐기고 미지의 것에 귀를 기울이자. p. 201-202



앞에서 본 것처럼 중후반까지는 충분히 예측 가능한 내용이라고 여겨지는데,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부분들이 흥미롭다.


사후세계를 꿈꾸게 만드는 심리적 오류들을 짚어내더니만, 

역사적·정치적으로 지상의 유토피아를 만들려던 과거 시도들과

그 결과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게 됐음을 조목조목 설명한다.

의외로 이 부분이 가장 공들인 느낌이고, 앞선 이야기 모두는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한 서문에 불과했다는 생각마저 든다.


고비노에서 바그너, 바그너에서 니체, 니체에서 오스발트 슈펭글러와 히틀러까지.

결국 그 유토피아의 역사 끝에 트럼프와 대안 우파라는 집단이 있다.

저자는 과거의 그 어리석음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인류가,

다시 한 번 오류를 반복할 위기에 처했음을 근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이 모든 회의주의 여정을 통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인간의 나약함과 탐욕이다.

죽을 운명의 존재로서의 불안감, 그것을 극복하려는 어리석은 시도들,

그 모든 것들은 천국을 약속하면서 사실은 지상을 지옥으로 만든다.



마지막에 이르러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사실 별로 새로울 게 없는 것들이다.

‘유전자의 생존’만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영생이며, 

우리는 그것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결국 인간의 유전자는 지구를 벗어나고, 

태양계를 벗어나 생존 가능성을 높인다.

그리고 그 수준에 다다른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상상하는 신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유전자가 생존할 수 있는 환경까지 자유자재로 만들 수 있는.

SF에서 많이 보던 결론이다.



그럼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어차피 후손을 위해 죽을 운명이라면 

우리는 최대한 우리 자신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생존 조건을 넘어선 그 무언가다.

여기서 그 무언가를 위해 저자가 제시하는 것들이 의외로 상당히 종교적인 것들이다.


사랑과 가정, 삶의 의미, 초월과 영성, 그리고 사랑.


이것은 마치 이전의 종교가 선사했던 것,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선사하지 못하는 것, 

한때는 과학이 종교를 대신해 선사해줄 거라 기대했던 것을 요약한 것 같다.


오늘날의 종교가 얼마나 그 본래의 기능을 잃고 있는지,

오늘날의 과학이 얼마나 기대치에 못 미치는지를 말해주는 것 같다. 

저자는 절대로 인간의 영생이나 몇 백, 몇 천 년의 수명연장을 꿈꾸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건 그저 소박한, 하지만 실질적인 수준이다.


“당신은 200세, 500세, 1000세까지 살고 싶지 않나요?” 

그럼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물론 그럼 좋지요. 하지만 내 여생에 이루어질 가능성이 아주 희박한 그런 고상한 목표 대신 그냥 암에 안 걸리고 90세까지 살고, 알츠하이머병 없이 100세까지 살고, 노망나지 않고 110세까지 살고, 의식도 없이 움직이지도 못하고 침대에만 누워 있는 일 없이 120세까지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200세, 500세, 1000세가 될 때까지 무슨 일이 생길지 걱정하기 전에 이런 문제나 먼저 해결하자. p. 381-382


회의주의자 다운 현실적인 결론이었다.



일단 이 책은 포만감이 대단하다.

그 포만감은 분량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소재에 대한 완벽한(혹은 그렇다고 느껴지는) 소화 능력에서 온다.

사후세계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부분을 다루고 결론을 내린다.

그 정도의 스펙트럼을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그 모든 집대성이 담긴 한 권의 책을, 

편하게 앉아 읽고 있는 것은 굉장히 즐거운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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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클래식 수업 - 알아두면 쓸모 있는 최소한의 클래식 이야기
나웅준 지음 / 페이스메이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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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문외한인 (나 같은) 사람들에게 아주 친절한 입문서다.

내용도 수박 겉핥기 식이 아니고 알찬 편이었다. 

친절한데 내용까지 알차니 즐겁게 읽을 수밖에.


클래식의 대중화에 애쓰는 저자의 애정 때문에 가능한 일 아니었을까.

저자는 트럼펫 연주자(트럼펫터!)로서 클래식 공연 해설자, 뮤직테라피스트, 클래식 관련 네이버 오디오클립 운영까지 다방면으로 클래식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우리에게 친숙한 클래식들로 흥미를 돋우고, 기본적인 정보들을 소개하더니, 본격적인 클래식 음악사를 훑고, 각 악기들을 설명해준다.

입문서로서 더 이상 친절하고 알찰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드는 구성이었다.


정보 전달도 전달이지만, 클래식에 대한 핵심적인 논점들을 소홀히 하지 않고 언급해 줘서 깊은 이해를 도왔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QR코드를 통해 저자가 만든 오디오클립의 클래식 음악과 해설을 들을 수 있다. 책 한 권으로 클래식을 맛볼 수 있는 최고의 코스 요리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시리즈화 되어 더 심화된, 혹은 특화된 후속작들이 나와 준다면 좋을 것 같다. 그 정도로 저자에 대한 신뢰가 생기는 좋은 책이었다.


나는 클래식에 대해 문외한이어서, 클래식은 어렵고, 지루하고, 잘난 척한다는 선입견이 있었다. (그게 선입견인 것만은 아니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이런 대중적인 클래식 입문서들을 보면 항상 느끼는 점은,

클래식 음악은 고정돼 있고, 듣는 사람이 클래식에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온갖 음악들이 나 좀 들어달라고 아양을 떨고, 사람들의 호응을 얻어내기 위해 안달인 상황에서, 관심도 안 가는 음악을 듣기 위해 ‘노력’까지 해야 한다는 게 어이없게 느껴졌다.


그 정도의 음악이라면 도태되어 사라지는 게 맞지 않을까?


게다가 클래식은 오랜 시간 동안 변화를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 모습에서 바꾸려는 노력이 없이 고정되어버렸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사람들이 거기에 맞추기만을 바라는 것이다.


원래 모습에서 벗어나면 클래식이 아닌가?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클래식이라고 하면 베토벤, 모차르트 등 고전적인 작곡가들의 음악을 떠올리는 것처럼 당시에도 비슷한 고정관념이 있었다. 작곡가들은 작곡 형식도 그렇고 악기 역시도 과거의 스타일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p. 198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그 예술은 없어지는 게 자연스럽다. 전통이란 이름으로 유지해야 한다면, 판소리나 사물놀이를 듣는 게 더 타당해 보인다.


어쩌면 뮤지컬이나 영화가 시대에 적응해야 할 클래식의 의무를 대신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 음악가 한스 짐머는 이렇게 말했다.


“할리우드를 비롯한 세계 곳곳의 영화음악 작곡가가 없었다면 사람들은 이렇게 자주 관현악 연주를 들을 수 없었을 겁니다. 영화음악이 없었다면 값비싼 관현악은 사라질 겁니다.”

- 맷 슈레이더 엮음 『스코어 오리지널 인터뷰집』 p. 133


아이돌 음악처럼 신곡이 쏟아져 나오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마 과거의 유럽 사회에서는 지금같지 않았을 것이다. 르네상스 이후 바로크, 고전주의, 낭만주의... 근사한 음악들이 쏟아져나오고, 베토벤이나 모차르트는 <보헤미안 랩소디>의 퀸보다도 슈퍼스타였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발전이나 변화가 없는 똑같은 클래식을 들어야 하는 대단히 불운한 시기를 맞이한 건지도 모르겠다.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자기 젊었을 적 노래만 반복해서 듣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래서 저자는 클래식의 변천을 사람의 성장과 비교하며 오늘날의 클래식을 ‘꼰대’에 비유한 건 아닐까.


그럼 지금의 클래식은 과연 어떤 시기일까? 우리나라 클래식 시장을 기준으로 냉정하게 판단해본다면 인생의 황금기를 넘어 속된 말로 ‘꼰대’가 된 시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p. 166


저자 본인이 이렇게 클래식을 스스로 ‘까’줬다는 건 중요한 일이다.

이미 전성기가 끝나버린 퇴물 음악을, 우리가 그렇게까지 경직되어서, 자격지심이나 열등감 같은 걸 느끼면서, 혹은 반대로 우월감을 느끼면서까지 들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바로 그 정확한 출발점을 제시한다는 의미에서 작가의 자기 비판은 중요하다.


클래식의 높은 문턱을 넘는 것은 클래식이 문제가 있는 음악이라는 걸 전제하고 나서야 가능하다. 아무도 듣지 않는 음악에 권위가 있을 수 없다.


저자는 ‘클래식은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버리기엔 너무 매력적입니다.’ 라는 태도로 클래식을 소개해주고 있다.

그리고 저자의 수업을 따라가다 보면, 그 말에 일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저자가 클래식이 꼰대가 된 시대라고 말했는데 그 말을 잘 생각해보면, 

클래식이라는 음악이 굉장히 성숙하고 완성된 음악 형태라는 말이기도 하다.


힙합 음악은 현재 역동하는 음악이고, 무궁무진하게 발전할 수 있는 젊은 음악이다.

역사가 비교적 짧고, 어린 세대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거기에 비하면 클래식은 고루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그러나 클래식 또한 비슷한 발전의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발전 가능성은 거의 없어졌을지 몰라도 계속해서 다듬어져 왔기 때문에 그 형태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그 긴 역사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도전해 가며 만들어온 끝에 비로소 지금의 ‘완성형’ 음악 체계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클래식은 그 켜켜이 쌓인 성취들 때문에 도무지 얕볼 수 없는 아우라를 뿜어낸다. 확실히 듣지 않고 그냥 버리기에는 지나치게 아름답다.


그러므로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는 대단히 운이 좋은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과거 시대의 사람들이 꿈꿨던 궁극의 클래식을 즐길 수 있다.


분명히 알고 들으면 다르게 들린다. 그리고 어느 정도 내가 노력해서 듣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왜냐면 저자가 설득력 있게 주장했듯이, 정말로 클래식은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클래식의 아우라를 우리 생활에 더한다면, 분명히 우리의 삶은 근사하고 풍요로워질 것이다. 그게 아무리 고되고 피곤한 퇴근길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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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
브루스 고든 지음, 이재근 옮김 / IVP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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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이를 잇는 존재였다. 

구교와 신교, 중세와 르네상스, 학계와 신학계, 세속 권력과 교회 권력, 외국인과 자국인, 루터와 루터 이후...

그리고 거기에 머물지 않고 그는 양쪽 모두와는 구별되는 자기만의 시선을 갖게 되었다.그런 사실을 잘 보여주는 예가 성찬에 대한 칼뱅의 입장이다.


사실상 칼뱅은 성찬 논쟁에서 다른 진영들의 주장에 대해 비판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입장으로 옮겨 가고 있었다. 로마 가톨릭교회에 반대한 그는 미사를 우상숭배로 비난하는 프로테스탄트 합창단의 일원이 되었다. 츠빙글리파에 반대한 그는 이들이 빵과 포도주에 그리스도가 임재한다는 것을 거부하면서 버린 것이 너무 많다고 주장했다. 최종적으로 칼뱅은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해 육체로 임재한다고 주장하는 루터파의 편재설에도 공감하지 않았다. p. 305


그리고 그런 중간자적 역할은 양쪽 모두를 설득하고 만족시켜야 했기에 고도의 지적 능력과 확신, 그리고 사명감을 필요로 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칼뱅의 고민은 그리스도가 성례 안에 물리적으로 임재한다고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이 성찬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을 표현할 수단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츠빙글리파와 루터파를 소외시키지 않으면서도 이것을 성취해야만 했다. p. 305


종교 개혁의 문은 열렸지만, 이후의 상황은 굉장히 혼란스럽고 복잡해진다.

반대할 때는 뭉치기가 쉽다. 하지만 지지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의견이 갈리기 시작한다. 우리는 박근혜 탄핵을 거치면서 똑똑히 보아오지 않았나.


책은 그런 혼란의 중심에 서 있던 칼뱅이, 자신이 믿었던 교리를 유럽 전체에 설득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일생을 꼼꼼하고 균형 있게 담아내고 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방대한 분량이 필요했다. 그것을 다 읽어낸 후에야 어렴풋하게 그림이 그려진다.


처음에는 칼뱅이란 사람에 대해 알고 싶어서 읽기 시작했지만,

칼뱅의 사역들을 보면서 계속해서 한국 교회의 개혁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지나치게 부패하고 엉뚱한 곳을 향하고 있다는 면에서 종교 개혁 당시의 가톨릭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칼뱅을 비롯한 개혁가들의 노력도 무색하게, 오백여 년 만에 다시 교회는 개혁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래서 칼뱅의 사역들은 ‘우리의 개혁은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거울로 삼아 보게 된다. 칼뱅이 이스라엘 백성의 교훈을 거울삼았듯이 말이다.


다윗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나라의 예표였으며, 이스라엘 백성의 경험은 16세기 사람들에게 교훈과 지식을 준다. 칼뱅의 말로 하면, 이들은 거울을 통해 자신을 본다. p. 507


재미있었던 점은, 종교 개혁을 주도했던 칼뱅 본인마저도 수없이 많은 이단 논쟁에서 자신을 증명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아직 기준이 분명하지 않은 시대였기 때문에 더욱 그래야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이단이 아님을 증명하는 과정이 칼뱅의 사상을 단단하게 만든 것 같다. 


우리는 ‘가짜’와 어떻게 다른 ‘진짜’인 걸까. 

한국 교회가 개혁을 미루고 있는 동안 ‘신천지’같은 이단이 개혁의 탈을 쓰고 기존 교회들을 비판하고 나서는 판이다. 우리는 그들이 틀렸고 우리가 옳음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결국 근본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칼뱅은 다시 1세기 초대 교회와 교부들에게로 돌아갔다. 특히 그는 사도 바울의 적자를 자처했다. 바울과 자신 사이에 있는 천오백 년의 시간은 큰 의미가 없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근본이 무엇인지를 따지는 것부터가 중요했다. 예수님에게로, 성경에게로, 초대교회의 정신으로. 칼뱅에게 가톨릭의 그 휘황찬란한 장식들은 모두 무의미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 기초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에 기초해야 합니다. 바울이 말했듯이 믿음은 들음에서 오는 것이며, 사람이 만들어 낸 모든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만을 듣는 것입니다.” p. 519


칼뱅 개혁의 또 다른 교훈은 타협 없는 고집이다. 

물론 칼뱅도 수없이 많은 타협을 했다. 전략적인 고지를 선점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칼뱅에 대한 이미지는 여전히 고집스러운 신학자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타협을 극도로 싫어했고, 어쩔 수 없을 때만 우회적으로 했다. 수많은 친구들과 등을 돌렸다. 개혁은 기본적으로 기성과의 충돌이고 전복이다. 그런 역동적인 변화를 온건한 방식으로 이루려는 건 안일한 생각이다. 


수많은 순교자들이 있었다. 칼뱅도 조국에서 쫓겨나 망명인이 되었다. 개혁은 전쟁을 동반했고, 일상생활을 불안으로 물들게 했다. 그 모든 것들을 걸고서라도 이뤄내야만 하는 중요한 문제였다. 칼뱅은 거침이 없었다.


설교자와 예언자의 몫은 건전한 교리로 훈련받는 것뿐만 아니라, 공격과 거절도 버텨 내는 것이다. 칼뱅은 저항을 바른 설교의 표지로 여겼다. 설교자는 청중과 대적하는 상황을 피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거친 말도 자주 필요하다. p. 521


개혁은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다. 

칼뱅의 주변에도 그를 돕는 지지자나, 동료들, 비서들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개혁파 교회 공동체가 있었다. 칼뱅은 온 생애를 바쳐 개혁을 완성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바턴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을 맡기고 눈을 감아야 했던 모세처럼 말이다. 


유언에서 칼뱅은 자신의 약점에 주목했다. “그러나, 아아 슬프다, 내가 그렇게 묘사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내 욕망과 열정이 너무 식고 줄어들어서 이제 나는 내 존재와 행동이 모든 면에서 불완전하다는 것을 잘 안다.” p. 590


그래서 그에게는 교육이 중요했다. 

젊은 목회자를 양성하는 것은 그에게 마지막 사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칼뱅의 이론을 배우고 익혀 더욱 발전시켜줄 후계자들, 그들은 개혁 교회가 세워지는 전 유럽으로 파송되어 개혁 교회의 기틀을 잡았다. 

칼뱅의 역할은 거기까지였고, 그의 이론이 완전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는 자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 셈이다.


그는 제네바를 교회의 지도자로 세우는 데 아카데미는 필수라 보았기에, 새 건물들을 짓고 도서관을 만들고 수준 높은 교사를 임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일했다. 아카데미가 너무 늦게 설립되어 칼뱅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어려웠지만, 그가 남긴 유산의 핵심 부분이었다. 제네바 아카데미는 성직자를 가르치기 위해 집필한 『기독교강요』와 함께 제도적 뼈대가 되었다. 따라서 그의 『기독교강요』 라틴어 최종판이 등장한 해에 아카데미가 문을 연 것은 우연의 일치라 하기 어려워 보인다. p. 531


마지막으로 얻은 교훈이라고 하면, 무엇보다 개혁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할 수 없더라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믿음. 누구라도 칼뱅이 직접 시편을 해설하면서 한 말을 보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교회는 망했지만, 그[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그분의 놀라운 능력으로 교회를 죽음에서 새로워진 생명으로 다시 일으키실 것을 확신한다. 이것은 교회가 항상 외형적으로 살아남은 것처럼 보이도록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죽은 것처럼 보이는 때도 언제든지 하나님이 기뻐하시기만 하면 순식간에 새로 창조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놀라운 구절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무너뜨리는 어떤 황폐한 상황도, 하나님이 이전에 무에서 세계를 창조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를 사망의 흑암에서 불러내시는 것이 그분의 합당한 일하심이라는 소망을 우리에게서 빼앗지 못하게 해야 한다. p. 510


확신을 가진 다음 필요한 것은 오직 인내뿐이다. 칼뱅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육체적 고통 속에서도 끝내 자신의 역할을 다 해냈다. 


반면, 인내는 숨겨진 목적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능력이다. 순례는 세상의 악에 저항하는 투쟁이며, 고통은 그리스도인에게 할당된 몫이다. 오직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이들만 승리할 것이다. p. 591 


오백여 년이 흐른 지금, 바턴은 우리에게 넘어온 것 같다. 칼뱅의 16세기를 ‘거울’로 삼은 우리의 개혁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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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섭의 대한민국 입시지도
심정섭 지음 / 진서원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SKY캐슬>을 보질 않아서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얼핏 듣기로는 드라마 속 학생들이 최상위권 학생들은 아닌 것 같았다.

이 책에 의하면, 최상위 학생들은 보통 영재고나 유명 과학고에 있다.

문과 학생이라고 해도 수시 비율이 70퍼센트에 육박하는 현실에서

뛰어난 인재들은 정시 이전에 각 대학에서 데려간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수능과 내신은 중요하다. 

하지만, 최상위권 학생에겐 절대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아마도 드라마는 상위 0.1%의 학생들이 아니라

상위 0.1%의 상류층 가정을 다루고 있는 것 같다.

그 둘이 항상 일치하진 않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부모가 명문대 출신이어도 자녀들은 공부를 못하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공부란 우리나라 입시에서의 ‘문제지 잘 풀어서 선호하는 대학을 가는’ 좁은 의미의 공부를 말한다.서울의 대치동이나 목동 같은 명문 학군에도 이런 자녀들이 많다. 어려서부터 영어유치원-사립초등학교-자사고나 강남 일반고를 다녔는데도 Top30위권 혹은 인서울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p. 278-279


이 책은 영어유치원부터 유학, 대안학교까지 

입시의 거의 모든 걸 망라했다.

특히 그 속에 입시에 대한 핵심을 찌르는 통찰이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통찰대로라면 입시는 무의미해진다.

‘어떻게든 일단 대학에 집어넣는 방법’부터

‘대학에 꼭 가야 할까?’까지 모두 아우른다.


입시가 무의미해진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따지면 대학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

어차피 중요한 건 대학이 아니라 대학 이후에 어떻게 먹고 살 것인 가다.

원래는 상위 10% 대학을 나오면 상위 10%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것이 보장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이름 있는 대학에 적성도 맞지 않는 아이를 보내는 게 의미가 있을까?그러면 대학이 더 풍성하고 행복한 어른이 되게 만들어 줄까?


하지만 우리의 생각은 아직도 이전 시대에 머물러 있다.

그래도 대학은 가야지, 대학 생활은 해봐야지, 남들 눈도 있는데, 남들 다 가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입시는 전략의 문제에 앞서 소신의 문제고 용기의 문제가 된다.


책을 보면서 놀란 것은,

전반적으로 이 사회가 너무 빨리 완성형 인간을 원한다는 것이다.

모든 대학이(그리고 모든 기업이) 뛰어난 인재보다는 

완성된 인재를 뽑기 원한다.

어차피 뛰어난 인재는 소수이기 때문에 그들이 채우고 남는 자리를 위해서는

완성된, 혹은 뛰어난 척할 수 있는 인재가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초등학생이었던 청소년들이 

어떻게 인생의 큰 그림을 그리고, 어떤 확신을 가져서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고,

그 방법에 대해 설득할 수 있단 말인가.

가뜩이나 실패(재수 이상)도 몇 번 허용되지 않는 판에서. 선택에 대한 책임도 개인이 온전히 짊어져야 한다.

한 사람의 인생이 수능 한 번, 혹은 두 번으로 결정되고, 낙인찍히는 사회가 올바른 사회일까.

그러니까 자꾸 사교육의 도움을 받아서 입시 전략을 짜게 된다. 

일반적으로 아이 혼자서, 혹은 가정 내에서 소화할 수 있는 실행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확고한 미래관을 가진 학생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학생들은 정규 교육과정에 특화된 

공부머리가 좋은 아이들일 뿐이고,

당연히 그런 아이들은 소수인 게 상식 아닌가.

우리나라는 소수의 공부머리가 좋은(공부머리가 두뇌 전체의 평가를 말하진 않는다)사람들만을 우대하는 사회인가?


슬프게도 그렇다.


우리에겐, 우리 아이들에겐 더 많은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그렇게 더듬더듬 찾아가는 건 열등한 게 아니다.

인간의 삶은 원래 그렇다.

마치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미래를 알고 있다는 듯 자소서를 쓰게 하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다.

인간은 원래 변덕도 심하고 관심사가 이동하기도 한다. 미래에 대해 쥐뿔 아는 게 하나도 없다. 그리고 그건 죄가 아니다.


어떻게 모든 인간이 같은 시기에 대학 가고 취업하고 결혼하기를 바란단 말인가그건 정부가 꾸는 꿈같은 거다. 규격에 맞춘 삶.

아이들이 왜 정부의 꿈을 이뤄주려고 자기 인생을 구겨 넣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교육 제도 자체가 ‘나’를 위한 게 아니라 국가나 기업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알게 됐다.

신용등급이 나란 인간의 실제 가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은행들의 편의를 위해 지들 멋대로 등급을 매긴 것과 같이,수능 등급과 내신 등급은 진정으로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국가와 대학, 기업들의 편의를 위해 나의 일부를 단순하게 수치화 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게 마치 그 사람을 말해주는 모든 것인 양 사람들은 생각한다. 입시 제도의 근본적인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학교가 제공하는 교육이 과연 ‘나’를 위한 교육일까? 

학교 교육은 ‘나’를 위한 것을 주지 않는다. 

나는 ‘나’를 위한 교육을 스스로 찾아서 해야 한다. 

그것도 시험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평생 말이다.

나 자신이 아니고서는 그것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가장 값싸게 접근할 수 있는 맞춤형 교육은 독서다. 

지금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교과서가 아니라 독서에 투자하고 있을까. 

불행한 일이다.


공교육은 이미 유명무실해졌다.한 인간으로서 자라는 데 필요한 교육도 제공해주지 못하고,그렇다고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는 족집게 학원도 되지 못한다.

교사들의 권위가 떨어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엎드려 자는 것도 일리가 있듯이 말이다.

저자가 말하는 해법도 결국에는 각자도생이다.

모든 가정이 공부를 하고, 아이의 미래를 위해 아이와 함께 고민해서 나름대로의 해법을 찾아야 한다.


이런 큰 흐름을 파악하고도 중심을 잡고 남들 하는 대로 따라가지 않기는 정말 쉽지 않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입시 레이스에 뛰어들지, 소신을 가지고 아이에게 맞는 다른 대안을 찾을지는 순전히 각 가정의 선택이다. p. 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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