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우연들
김초엽 지음 / 열림원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가가 되고 ‘불순한‘ 독서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니, 어쩌면 소설 쓰기를 제대로 결심한 시점부터였을 것이다. 정확히 특정할 수는 없지만 언젠가부터 나의 책 읽는 방식은 조금씩 변화해왔다. 읽는 사람의 독서에서 쓰는 사람의 독서로, 순수한 감탄과 경이에서 벗어나 표면 아래 설계도를 더듬는 방식으로. - P15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과 우연들
김초엽 지음 / 열림원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존재라는 게 제자리에 있을 때는 있는지 없는지 눈치도 못 채던 거였는데, 사라지고 나서 그게 차지하고 있던 빈자리의 크기가 드러나니까 겨우 그게 뭐였는지 감이라도 잡을 수 있는 거잖아요. - P29

우주에서 바라본 작고 푸른 점, 행성 지구에 관해 칼 세이건이 했던 말을 나는 자주 떠올린다. "그 작은 점을 대하면 누구라도 인간이 이 우주에서 특권적인 지위를 누리는 유일한 존재라는 환상이 헛됨을 깨닫게 된다."(『창백한 푸른 점』) 그리고 우리가 위대한 존재여서가 아니라 단지 이 작은 행성의 일부에 불과하기에, 살아가는 동안 이 행성의 이웃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빚지고 있기에, 우리가 지닌 좁은 이해의 영역을 계속해서 넓히고 존엄을 지키며 살아갈 방법을, 상상하고 또 읽는다. - P38

그 무렵 나는 상상력과 지식이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는 것이 없어서 상상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 P40

지금도 나는 내가 밑천 없는 작가라고 느끼지만 예전만큼 그것이 두렵지는 않다. 이제는 글쓰기가 작가 안에 있는 것을 소진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바깥의 재료를 가져와 배합하고 쌓아 올리는 요리나 건축에 가깝게 느껴진다. 배우고 탐험하는 일, 무언가를 넓게 또는 깊이 알아가는 일, 세계를 확장하는 일. 그 모든 것이 나에게는 쓰기의 여정에 포함된다. - P42

나는 장벽 너머를 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게 어떤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시키는 일을 따라가기에 급급하고 결과를 제대로 해석할 수도 없었지만 논문을 무작정 쌓아놓고 읽다보니 적어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가 안갯속에서 조금씩 드러났다. 모든 것이 마음만큼 잘되지 않아 괴로웠던 그때도 세계가 점점 선명해지고 있다는 감각이 주던 기쁨만큼은 지금도 생생하다. 어떻게든 머릿속에 집어넣다보면 밑천이 생기고, 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그러면 언젠가 새로운 질문을 던질 수도 있게 된다는 것을 그때 배웠다. - P48

나뿐만 아니라 보통 당사자로서 어떤 주제에 대해 글을 쓰는 저자들이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당사자로서 겪은 경험만이 아니라 그 다음의 이야기일 것이다. 개인의 경험이 어떻게 사회와 연결되는지, 이 경험을 구조 속에서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나와 타인의 경험은 얼마나 같고 또 다른지. 그런 이야기까지 도달할 수 있어야만 개인의 경험은 사적인 서술에 그치지 않고 풍부한 의미를 갖게 된다. - P10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과 우연들
김초엽 지음 / 열림원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결코 읽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눈길도 주지 않았던 책을 우연히 펼쳐드는 순간이 있다. 투덜거리며, 의심을 가득 품고, 순수하지 않은 목적으로 그런 우연한 순간들이 때로는 나를 가장 기이하고 반짝이는 세상으로 데려가고는 했다.
그 우연의 순간들을 여기에 조심스레 펼쳐놓는다. - P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 정희진의 글쓰기 3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특히 데이비드 리스먼의 <고독한 군중>에 나오는 외부(타인)지향성에 대한 재해석과 탈감정은 밀접하게 연결된다. 외로운 군중의 특징은 타자 지향성 (other-direction)이다. 타자 지향성은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라고 생각하는데, 어쨌든 이 맥락에서는 내부(자기) 지향성의 상대어로 쓰인다. 타자 지향성이란 자기 자신에서 출발하지 않는 삶의 방식이다. 대중은 부정의에 대한 분노를 타자 지향적 방식으로 처리한다. 자신은 정치를 변화시킬 능력이 없기 때문에 정치를 이해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래서 그들은 정치를 ‘말해주는‘ 사람에게 의존한다. 감정을 직접 경험하지 않도록 하는 후기 자본주의의 다양한 문화 장치(미디어)가 이런 경향을 더욱 강화한다. 타자 지향적인 개인들에게는 희생할 만한 초월적 가치가 없다. 남아 있는 유일한 가치는 생존이다. - P197

외롭고 지겨운 노동의 연속. 이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인생이다. 슬픔은 삶에 어쩌다 닥치는 불행이 아니라 삶의 조건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슬픔을 외면한다. 그것을 상기하는 사람만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은 예외인 양 방어한다. 나는 다음 구절에서 스메들리가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한다고 느꼈다. "왜 이리 인생이 모순일까. 매우 비참한 상황인데도 나는 종종 웃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258쪽) - P22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 정희진의 글쓰기 3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런데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빨래하는 페미니즘》에서 말하는(275쪽) 의미에서도 아니고, 타인의 시선 때문에 숨기려는 것도 아니다. 나의 착한 여자 콤플렉스, 신데렐라 콤플렉스, 아버지 콤플렉스는 거의 중독에 가까우며 매일 이 문제와 사투를 벌이며 분열 속에 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페미니즘을 ‘열심히 공부한다‘. 내가 아는 한 페미니즘은 인류가 만들어낸 그 어떤 지식보다 수월(越)하다. 정치적, 이론적, 학문적으로 다른 어떤 언설보다 세련되고 앞서 있으며 상상력조차 뛰어넘는 참신한 문제의식과 질문을 던지는 사상 체계다. 지식이 지속적으로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행위라면, 또 지식이 윤리적이어야 한다면, 그리고 지식이 사유 능력을 의미한다면 최소한 페미니즘을 따라올 지식은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페미니즘은 지난 모든 언어에 대한 의문과 개입에서 시작됐으며, 이 과정에서 저절로 기존의 지식을 조감(overview)하는 능력을 지닐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다(多)학제적이기 때문에 지식 전반에 걸쳐 박식하고, 다른 분야와 연결되어 폭발적인 재해석과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 P14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