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과 인권 - 돌봄으로 새로 쓴 인권의 문법
김영옥.류은숙 지음 / 코난북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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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드라마가 아니라 실제 사례로 옮겨 가보자. 의료인류학자 아네마리 몰은 『돌봄의 논리』에서 tinkering(팅커링)이라는 조어를 제시한다. 이 말은 조율하기, 매만지기, 땜질하기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인간과 비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행위자들이 협력해 잘 맞출 때 케어가 출현한다는 개념이다. 팅커링 개념을 실제에 적용한 휠체어 맞추기라는 작업을 살펴보자. 휠체어를 이용하는 A라는 사람이 있다. 몸이 점점 더마비되고 그에 따라 휠체어 조종장치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더굳어진 몸으로 휠체어를 조금이라도 더 수월하게 조작하려면 매만져야 할 게 많다. 게다가 그의 휠체어는 심하게 마모됐으나 단종된 제품이라 수리할 부품을 구하기도 더 이상은 어렵다. 새 휠체어가 필수인데 어떻게 해야 할까? 상품소개서를 펼쳐놓고 선호와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그중 하나를 고르면 되는 것일까? 그리고 이때 선호와 비용 등 휠체어 이용 당사자의 조건들만 고려하면 되는 것인가?
실제 펼쳐진 과정은 이러하다. 돌봄지원센터의 케어매니저가 조율을 위한 자리를 만든다. 휠체어 이용 당사자를 포함해 휠체어 전문 기술자, 사회복지사, 주 돌봄자가 모였다. 휠체어를 자기 몸으로 여기는 이용자의 ‘몸‘ 자체가 최우선 고려 대상이다. 또 중요한 고려 대상은 돌봄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돌봄대상자가 턱을 넘거나 경사로를 오를 때 휠체어를 밀고 동행하는 역할을 오래 해온 그의 몸도 노화가 진행돼 큰 힘을 쓰기 어렵다. 그가 힘을 덜 들이고 관절을 보호하면서 계속 돌봄에 참여할 수는 없을까? 사회복지사는 정부 지원 비용과 최적의 훨체어 값의 차이, 돌봄자의 경제 상황 등을 두루 고려해 가용한 최대 자원에 대한 정보를 내놓는다. 휠체어 기술자는 기성 제품 그대로를 구매할 때의 장단점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떤 장치를 개조하거나 부가해야 최적의 휠체어가 될 수 있을지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이때 휠체어를 이용해본 경험자들의 다양한 데이터와 사례가 참조된다. 이런 조율을 거쳐 비로소 새로운 휠체어를 결정한다. 완벽할 수는 없지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조합한 의사결정이다.
한국 사회에서 ‘땜질한다"는 말은 임시변통, 근본적 조치 없이 대충 때운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하지만 몰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아쉬운 점이 남더라도 끊임없는 조율 속에서 행해지는 돌봄 과정의 역동성이다. 돌봄은 어떤 상황에서도 멈출 수 없는, 실패를 무릅쓰면서도 지속되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휠체어 조율하기 사례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당사자의 몸과 휠체어를 둘러싸고 형성된 관계와 그 관계의 확장, 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자율적인 결정의 과정이다.
돌봄을 말할 때 핵심은 돌봄의 곁이다. 돌봄이 필요한 사람에게 돌봄을 제공하고, 돌봄을 제공하는 그 돌봄자를 공동체와 제도가 보살피며, 이러한 돌봄 행위들의 선순환 속에서 돌봄의 가치를 인정하고 지켜내는 것이 돌봄권의 대상이다.
결국 돌봄권이 시민 모두의 일상에 뿌리내려야 사회적인것이 재생산된다. 돌봄 관계는 상호의존적이며 호혜적이어야 한다는 것, 이러한 상호성이 시민사회 전반에 실핏줄처럼 퍼져야 한다는 것이 돌봄권의 기본 정신이다. 돌봄을 주고받는 것이 모든 사회구성원의 시민적 덕성과 활동의 기본이 되는 사회가 돌봄 사회다. - P193

자유는 방해만 없으면 되는 게 아니다. 자유의 내용을 실현할 만한 강한 제도들로 쌓아올린 방벽이 있어야 한다. 흔히 사회적 권리라 부르는 주거, 노동, 교육, 여가, 사회보장 등과 관련된 방벽 없이는 돌보고 돌봄 받을 자유를 이야기할 수 없다.
흔히 자유로 논해지는 자기결정, 자율 같은 것은 돌봄이 처한 사황을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 있는 경우가 많다. - P198

삶 자체를 상호돌봄으로 이어진 공생으로 이해할 때라야 생산적인 ‘하기(doing)‘가 없어도 ‘존재(being)‘만으로 평등한 존중과 인정의 대상으로서 온전한 인간임을 서로 확인하고 감각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 사람도 사람인데…‘라는 동정과 두려움 섞인 반응은 ‘○○ 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으로 대하라‘는 명령이나 ‘여전히 사람이다‘라는 선언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구체적으로 매개하는 활동이 필요하다. 그것이 돌봄이다.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고 인간이 되게 하는 활동이 돌봄이다. 인간의 얼굴을지켜주는 한 겹의 옷, 그것이 돌봄이다.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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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과 인권 - 돌봄으로 새로 쓴 인권의 문법
김영옥.류은숙 지음 / 코난북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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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해야 할 일은 좋은 돌봄의 기본 요소를 발견해 이를 돌봄 현장의 필수 요소로 만드는 것이다. 열악한 노동 환경에도, 늘 부족한 시간에도, 사회적으로 너무나 낮은 인정에도 불구하고 가슴 뭉클한 돌봄이 존재하는 건 오로지 돌봄을 하면서 "생겨버린 책임감과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때문이다. 좋은 돌봄 사례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있다면 돌봄자를 지키고 돌보는 노동 환경과 제도적·사회문화적 지원이 마련된다면 믿고 기댈 만한 돌봄이 가능하다는 사실의 증명이다.
이것은 도움이 필요한 의존 상태에 있는 사람과 그 필요에 응답하는 사람의 관계 속에서 행해지는 실천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당신과 내‘가 기댈 수 있는 그 돌봄을 공적으로, 조건을 갖춰 시민사회 안에 기본값으로 만드는 일이 절실하다. 그때 우리는 요양보호사의 지식과 역량을 마음껏 기대할 수 있다. 이 지식은 몸으로 체화한 실천지식이다. 이 실천지식이 돌봄의 생태계를 비옥하게 만들 수 있도록 돌봄노동자의 전문성을 소중히 여기고 돌보는 방향으로 사회문화 환경을 구축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시민사회 논의와 정책과 생명윤리, 인간의 취약함에 대한 이해, 정치 등을 현장에서의 실천을 중심으로 통합해 연결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통합적 연결은 현장의 돌봄 경험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누가 어떻게 돌보고 있는지 돌봄의 보람과 기쁨, 좌절과 고립, 심지어 살해를 포함한 현장에서의 경험을 공론의 주제로 만들어야 한다. 이때 시민사회가 등장해 다양한 돌봄 경험들을 통용 가능한 지식으로 만들고 논의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최적화된 합의를 만들고 이 합의를 정책으로 만들라고 압박한다. 권리의 이름으로 압박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시민사회의 압박은 개별 정책을 마련하는 데서 멈추지 말고 정치의 지평, 방향성, 철학으로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이 과정은 순차적이지 않고 끊임없이 섞이고 순환될 것이다. 그리고 언제든 현장에 입각해서 질문 받고 비판받고 수정되는 방식이 될 것이다. - P161

런던에서 시작된 돌봄 단체인 ‘더 케어 컬렉티브’는 ‘돌봄선언’에서 "난잡한 돌봄"을 말한 바 있다. 돌봄의 위계를 해체하고 급진적 평등주의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제안한 표현이다. 난잡한 돌봄 윤리는 "인간, 비인간을 막론하고 모든 생명체 간에 이루어지는 모든 형태의돌봄이 필요와 지속가능성에 따라 공평하게 그 가치를 인정받고 사용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돌봄에는 어떠한 차별도 위계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구별 짓기나 경계 짓기가 없다고 해서 그 돌봄이 가볍거나 진정성을 결여하고 있는 건 아니다.
가볍고 진정성 없이 거리를 두고 행하는 돌봄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돌봄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끔찍하다. 우리는 난잡한 돌봄이 가장 가까운 관계부터 가장 먼 관계에 이르기까지 돌봄의 관계를 재정립하며 증식해가는 윤리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난잡함이란 더 많은 돌봄을 실천하고 또 현재 기준에서는 실험적이고 확장적인 방법으로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너무 많은 돌봄 요구를 너무 오랫동안 ‘시장‘과 ‘가족‘에 의존해 해결해왔다. 우리는 그 의미의 범주가 훨씬 넓은 돌봄의개념을 만들 필요가 있다. - P169

이 부정의를 부정하는 의미로서 ‘아무나‘는 혈연관계나 성역할의 고정관념을 벗어나 돌봄 책임자의 범위를 바꾸고 확장하려는 의지를 표명한다. 돌봄자의 자리는 친밀한 관계, 믿고 의지하는 관계, 구체적인 삶의 장소와 일상을 공유하는 관계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 전통적 통념이 이 확장을 가로막고 있다. 법제도는 이 통념을 뒷받침하거나 강화한다. 이에 맞서 혼인과 혈연관계에 국한되지 않는 다양한 가족 형태를 인정하고, 실질적인 돌봄 관계를 보호하고 이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고, 생활과 돌봄을 공유하는 관계를 인정하는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
돌봄을 혈연관계나 성역할 고정관념에 붙들어 매는 통념은 현실 속에서 수행되는 여러 다른 돌봄 형태를 인정하지 않을 뿐더러 그것이 구현하는 돌봄의 확장과 새로운 상상력을 방해한다. 성소수자, 중증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는 신뢰와 우정의 커뮤니티 안에서 통념을 벗어난 돌봄을 이미 하고 또 받고 있다. 이들의 돌봄은 사회적으로 기대되지도 않고 지원되는 바도 없기에 ‘실험적이고 확장적‘이다. 이들은 허들 경기하듯 ‘보호자 자격 없음‘이 가로막는 방해물을 계속 넘어야 한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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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류은숙 지음 / 코난북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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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외 없이 보편적으로 취약한 우리 모두가 폐를 끼치며 살아간다. 폐를 끼치기에 삶이 가능하다는 엄중한 사실에 겸허한 존재들은 폐 안 끼친다고 자부하고 위장하는 세력의 위선을 드러낸다. 적극적인 폐 끼침의 사유와 실천, 곧 돌봄을 통해 기존 사회의 시간과 공간에 변화를 요구한다.
폐 끼친다는 말은 달리하면 의존한다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상호의존하는 가운데 시민들은 의존과 자립의 관계를 기존과는 다른 관점으로 이해하게 된다. 의존에 관한 주류 담론이나 관행, 사고방식에 비판적으로 개입함으로써, 타자의 의존이나 폐 끼침은 자신들의 의존이나 폐 끼침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는세력의 허위의식을 흔든다. 폐 끼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존재들은 폐 끼치기의 호혜성을 위해 시민사회 차원의 토론과 각성을 추동한다. 의존과 돌봄을 무시하려는 사회적 과정과 흐름을 중단시키고 돌봄의 연대를 추동한다. 의존에 대한 낙인과 차별을 철폐하려 한다. ‘폐 끼치는 사람들의 연대‘야말로 서로의 차이를 넘어 의존에 대한 공통 감각을 시민적 덕성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이다. - P117

돌봄은 아동, 장애인, 노인, 환자 등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돌봄의존자를 대상으로 하는 활동이다. 동시에 돌봄은 대상 영역으로 환원될 수 없는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활동이기도 하다. 돌봄자-보호자와 돌봄의존자의 관계, ‘좋은 돌봄’의 불가능성, 돌봄의 탈/여성화 · 탈/가족화 또는 공공화·시장화, 돌봄 자원·부담·책임의 평등하고 정의로운 분배 등은 어떤 돌봄 현장에서든 중요한 핵심 의제다.
그래서 각 부분을 서로 연관성이 없는 개별 복지정책의 대상이나 돌봄 서비스 등의 자원 분배 대상으로 다루면 돌봄을 중심축으로 생산과 재생산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고 모든 사람이 돌보고 돌봄 받을 권리를 인권으로 정초하려는 지향과 만날 수 없다. - P122

뒤돌아보는 보호자는 기관과의 소통과 협력을 이어간다. 당사자가 (대부분 안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는 상태라는 걸 알기에 이전의 모습에 집착하지 않는다. 지금의 ‘좋은 머무름’을 위해 당사자의 변화에 따라 함께 변할 수밖에 없는 돌봄의 양태를 수용하며, 필요한 단계의 조치를 선택하고 결단할 수 있게 된다. 협력은 내 가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요양시설을 ‘돌아오지 못할 곳‘이 아닌 계속 가꾸고 보듬어야 할 삶의 장소로 만들 수 있다.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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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과 인권 - 돌봄으로 새로 쓴 인권의 문법
김영옥.류은숙 지음 / 코난북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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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은 근본적으로 관계 안에서 관계를 갱신하고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일이기에 돌봄 위기라는 건 사회가 재생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가장 작은 범위로는 아동, 장애인, 노년 등 당사자 개인의 위기, 돌보느라 자기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대개는 여성이다)의 위기이고, 넓게 보면 사람들이 서로 협력해서 만든 관계라는 의미의 사회가 재생산되지 못하는 위기다. - P11

그간 법적·정치적 윤리에 치우쳤던 인권은 돌봄 윤리와 만나면서 인간의 보편적인 취약성과 그에 따른 상호의존성에 주목하게 됐다. 그 배경 조건은 사람 ‘사이‘, 다른 말로 ‘관계‘다. 개인은 자기의 고유한 삶을 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첩되고 교차되는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가능하다. 인권에 대한 관계에 기반한 접근은 다른 무엇 때문이 아닌 인간의 관계 때문에 사람을 사람으로서 대한다는 것이다. 모욕하고 멸시하고 착취하는 관계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다른 방식의 관계, 더 나은 의존관계를 만드는 것이 적극적인 인권 실현이다. 인간 누구나 관계속에 깃들여 살며, 서로의 취약성을 돌아보고 응답할 보편적 책임이 발생한다. - P29

존엄을 말하지 말자는 게 아니다. 존엄을 어떻게 말하느냐와 존엄이 어떻게 가능하냐가 중요하다. 누가 어떤 자리에서 누구를 향해 무엇을 말하느냐가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당신이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당신을 기억하고 있어요. 당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라는 응답이 필요할 것이다. 기억하고 알고 있다는 것은 그의 살아온 내력과 함께 그의 현재 모습을 인정한다는 의미다. - P34

이 책에서는 역량을 돌봄의 관점에서 적용하고 이해하려 한다. 여기서 능력이라 하지 않고 역량이라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능력이 단순히 훈련과 반복된 실천으로 얻어지는 것이라면, 역량은 돌봄이 왜 필요한가, 돌봄은 무엇인가, 어떻게 돌봐야 돌봄 받는 사람도 돌보는 사람도 존엄성이란 걸 잘 지키면서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재생산할 수 있는가를 포괄하기 때문이다. 매뉴얼대로 잘하는 게 능력이라면, 역량은 생각하고 질문하면서 돌봄의 내용과 형식을 고민해 바꾸어가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 P40

이제까지의 취약성 논의를 돌봄의 맥락에서 정리해보자. 취약성을 보편적 속성으로 갖는 인간의 자율적인 독립의 삶에는 크게 보아 두 가지 움직임이 관여한다. 우선 타인의 취약성에 눈뜸으로써 윤리적 존재가 된 개인이 서로 의존할 만한, 믿을 만한 돌봄의 관계를 형성한다. 서로에게 잘 매달려 경쾌하게 진지운동을 한다. 개인은 이러한 상호 달림, 상호의존을 통해 사회라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시민이 된다. 시민은 자기 삶의 안전과 의미가 사회를 함께 만드는 다른 존재의 연대와 협력 덕분임을 알고, 그 신뢰 속에서 자신도 그를 위해 안전망의 한 코가 되겠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실뜨기를 닮은 이 창의적 연결 속에서 생성되는 자율성은 관계적 자율성이다. 취약해서 늘 안전이 위협받는 상태에 있는 개별 인간이 기본적인 도덕적 권리인 인권의 감각으로 서로 의존하고 기대며 돕지 않는다면, 사회 공동체는 흔들리고 무너질 것이다.
다른 움직임은 권력의 구조적 차이와 사회제도의 취약성 때문에 발생하는 특수한 상황에서의 취약성에 적극적으로 책임 있게 응답하는 국가와 관련된다. 아동, 장애인, 환자, 노인, 비혼모, 노숙인, 기초생활이 위협받는 빈곤한 사람 등은 더 취약하고 더 의존적이다. 그만큼 더 집중적이고 포괄적인 돌봄이 필요하다. 기회와 접근의 의미 있는 제도적 지원뿐 아니라 사회적 정의의 세 범주인 인정, 경제적 분배, 왜곡 없는 재현(repre-sentation)에서 평등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국가의 더 적극적인 반응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게 아니라 평등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일어난다. 그리고 이러한 적극적인 반응이 취약자들의 회복 가능성을 높인다. - P65

돌보는 사회는 돌봄 자원이 풍부하고, 이 자원이 평등하고 정의롭게 분배되고 순환하는 사회다. 돌봄은 개인 단위에서, 동시에 사회와 국가 단위에서 생산되고 축적되고 유산으로 상속된다. 돌봄 자원은 누구나 돌보고 아무나 돌보는 돌봄 민주주의와 연동되어 있다. 즉 돌봄 역량이 자신의 이름을 지키는 일과 시민적 덕성을 증명하는 지표가 될 수 있는 사회가 돌봄 민주주의 사회다. 여기서는 평등과 자유가 적대적 대당이 아니라 서로에게 정당성과 구체적 의미를 부여하는 원리요 힘이다. - P73

돌봄에 필요한 시간과 정성을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같이 도모한다면 호혜적이 된다. 따라서 상호의존성에 대한 인정과 호혜성 구축은 사회적일 뿐 아니라 정치적인 행위가 된다. 돌봄 현장은 병상 같은 물리적 장소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집 안이든 어디든 모든 돌봄 현장의 의미는 정치성을 갖고 있다. 돌봄이 자본주의적 효율성이나 그에 따른 시민의 자격 심의와 연동될 때 돌봄 관계를 둘러싼 사회적인 인식과 실행의 체계는 ‘어떤 삶은 돌볼 가치가 있고 또 어떤 삶은 돌볼가치가 없다‘, ‘누구에게 돌봄 자원을 쓸 가치가 많다 혹은 적다‘는 식으로 흐른다. 이런 식의 논의와 판단은 매우 정치적이다. 존재 가치를 저울질하는 대신 시간과 정성을 같이 기울이되, 획일적이 아니라 각 사람의 고유성을 서로 잘 돌보는 사회가 호혜적인 민주사회다. 이런 사회에서라야 ‘좋은 돌봄‘이 가능하다. - P81

각각의 특수한 상황에서 타자의 구체적인 필요 욕구에 반응하고 돌보는 것이 윤리적 태도라면 보편성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에 대해 여성주의 윤리 철학은 두 가지 보편성의 차원을 제시한다. 첫째, (앞 장에서 논의한) 취약성의 인류학적 보편성과 그에 따른 상호의존성, 둘째, 자신을 타자의 필요 욕구에 반응하는 ‘선한 자아‘로 고양하길 원하는 갈망의 보편성이다. 넬 나딩즈는 이러한 갈망의 토대가 되는 것은 돌봄 받은 기억이며, 모든 사람은 이 기억에 접근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보편적이라고 보았다.

"자연스러운 돌봄의 관계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선‘이라고 인식하는 인간 조건으로 확인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희구하고 추구하는 바로 그 조건이다. 또한 그것은 우리에게 도덕적이 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그 특별한 관계를 맺고자 하는) 돌봄에 대한 갈망이다. 우리는 계속 돌범의 관계 속에 있고 돌보는 사람으로서 우리 자신의 이상을 고양하기 위해서 도덕적이기를 원한다." - P86

돌봄 상황을 가능한 피하면 좋을 폐 끼치는 상황으로만 보는 것은 의존과 그에 따른 돌봄을 바라보는 사회의 왜곡된 시선 때문이다. 사회적 가치체계는 타인의 돌봄에 의존해 삶을 유지하는 것은 민폐라는 메시지를 지속해서 발산한다. 웬만하면 남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해결하고자 하는 게 타당해 보이겠지만, 문제는 ‘웬만하면‘이 어느 정도를 가리키는지 사회적으로 합의된 바가 없다는 데 있다. 돌봄 욕구를 중심에 두고 소통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가능한 한 남의 도움은 안 받는 게 최선이라는 명제가 성립한다. - P104

장애여성공감은 창립 20주년을 맞아 출간한 책 『어쩌면 이상한 몸』에서 돌봄을 잘 받을 훈련, 몸을 내맡기는 연습에 관해 이야기한다. "존엄하기 위한 노동은 모두에게 필요하며, 끊임없이 의사소통하며 서로를 직면하고 몸을 접촉하면서 익혀지는 것"이라고 말이다. "타인에게 의존해야 하는 자신을 대하는 건 어떤 투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 P107

돌봄은 언제나 얼마간의 자기희생을 요구하고, 삶을 재편하도록 강요하며, 한계를 시험한다. - P109

‘나‘를 돌봄 받는 사람으로 상상할 때 돌보는 일의 형태와 의미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돌봄에 관해 할 이야기가 더 많아지고 담론 차원에서 상상력의 교환도 더 촉구될 것이다. ‘좋은돌봄’에는 적절한 거리 두기 그리고 돌봄 받는 상대방에 대한 감정이입, 공감이 요청된다. 누구를 대상으로 하든 돌봄은 거리두기와 다가가기를 반복하는 두 진자운동의 조율에 따라 양상이 달라진다. 다른 관계성을 형성한다. 정서적 접속이나 교류가 어려운 돌봄 환경에서도 외부의 보상이나 인정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나 여타 에너지가 투여된다.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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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몸과 타인들의 파티
카먼 마리아 마차도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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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 속에 사는 건 내 권리야. 내 권리라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것도 내 권리이고. 곁에 있으면 불쾌해지는 것도 내 권리야. 넌 네 자신에게 귀를 기울인 적이 있기는 해? 이건 미쳤어, 저건 미쳤어, 너한텐 세상 모든 게 미쳤지. 누구 잣대로? 뭐, 미치는 것도 내 권리야, 네가 정 그렇게 말하고 싶다면. 난 부끄럽지 않아. 살면서 수많은 걸 느꼈지만, 그 중에 부끄러움은 없어. - P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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