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정신의 ‘기능성’에서 소위 정상성 규범이 제시한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여겨지는 노년과 장애인은 안전과 보호의 이름으로 실생활에서 전반적인 감시와 제약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회는 안전을 내세워 이들에게 가해지는 특정 규율을 정당화한다. 생산성과 독립성, 젊음, 속도, (미래라고 일컬어지는 한 방향으로의 불가역적 진행으로 이해되는)진보, 자본주의 노동 윤리 등은 서로 맞물리면서 노골적으로 노년과 장애인을 피보호자의 자리에 눌러앉힌다. 그러나 조미경의 예처럼 생애사의 관점에서 포착된 장애인의 정체성은 이런 주장의 허구성과 편파성을 통쾌하게 부순다. ‘자기 이해‘의 서사란 사회적 관계들의 교차적 만남 속에서 형성되는 ‘자기‘를 계속 재해석한 결과다. 어떤 신체적·정신적 상태에 있든 각자의 삶에는 소망도 있고 갈등과 불안도 있다. 권리나 의무뿐만 아니라, 자발성에 기원을 둔 윤리적 책임도 있다. 피할 수 없는 모멸과 수치심, 억울함의 만남도 있다. 장애인이나 노년들 각각이 갖는 ‘자아 정체감‘이 반드시 신체적·정신적 기능성이라는 조건과 일치하지 않는 이유다. 최중증 장애인인 조미경의 이야기는 이것에 관한 놀랍도록 명료한 증언이다. 그의 몸은, 그의 몸이 살아내는 그의 삶은 매우 의존적이며 동시에 대단히 자율적이다. 그는 휠체어를 비롯해 보청기나 틀니·인공호흡기·돋보기 등 의료기기에, 그리고 활동지원사와 파트너·동료에 ‘기대어서/매달려서 dependent‘ 산다. 잘 기대고 매달려 왔다. 그의 기대고 매달리는 기술력은 기대면서 삶을 조율해 온 긴 역사의 소산이다. 19세까지 ’집 안‘에 갇혀 있던 시간과 이후 ’집 밖‘의 여러 장소와 공간에서 동료와 친구, 애인을 만나며 엮어온 시간은 그의 ’자기‘가 단순히 신체 상태로 환원될 수 없는 것임을 여실히 증명한다. 그가 명랑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48년간의 삶은 ’의존할 수 있는 대상이 늘어날수록, 그래서 선택의 가능성이 커질수록 더욱 자립할 수 있다‘는 명제의 투명한 구현이다. - P139
돌이켜보면 장애 심화와 일상의 선택이나 삶의 만족도가 꼭 일치하는 건 아니더라고요. 이전에 없던 장애가 생기고, 또 장애가 심화하면 솔직히 삶이 좀 고달파지는 건 있어요. 삶이 고달파지니까 그것 때문에 우울감이 들 때가 있지만 이전에 미처 느끼지 못했거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깨닫게 되고, 새로운 감각이 생겨나 새로운 경험이 열리기도 해요. 새로운 앎이 생기고 관점이 넓어지고・・・・・・. 그런 맥락에서 장애 심화가 퇴행만은 아닌 나의 삶이 또 다르게 변화하는, 진화하는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나이듦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이듦으로 해서 또 다른 경험을 하게 되는 게 있잖아요, 분명히. 삶이 진화되는 거, 같은 맥락에서……… 너무 긍정적인가요?" - P143
"슬픔이 너무 깊어요. 하지만 나는 포기할 수 없어요. 매일 계속 뭐든 읽어요, 뭐든 해요. 이제 내가 ‘공감‘에서 장애운동을 계속하려면 다른 식의 시간 감각을 갖고 이것을 현실화하는 게 중요해졌어요. ‘공감‘ 활동가들과 같이 도전해서 새로운 감각을 찾고, 중복 장애가 매우 심한 장애여성의 삶을 같이 나누는 게 중요해요. 이렇게나 피곤하고 힘든데, 내가 뇌출혈에서 다시 깨어난 건 또 새로운 운동을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그는 워낙에도 기존의 나이듦 이해나 관행과는 매우 다른 몸의 역사를 살아왔다. 이제 그에겐 ‘지금 여기‘의 삶을, 이 현존을 충일한 시간성과 장소성의 의미로 살아내는 것이 더욱더 중요하다. 그가 자기/이해를 갱신하며 살아내는 치열한 하루하루를 목격하면서 나는 나이와 시간의 관계를 낯설게 재조명한다. 노년의 나이는 막연한 미래의 어느 시점으로 계속 밀려나는 내일‘들‘의 집합이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꽉 찬 역사성으로 살아내는 시간이다. 뇌출혈을 딛고 또다시 새로운 몸으로, 첫 경험인 양 장애를 알아가면서 펼치는 조미경의 운동은 그런 시간으로서의 나이듦을 구현할 것이다. 그를 통해 우리는 ‘누구와 무엇을 향해 나이들고 있는가‘라는 질문이야말로 나이듦 이해의 핵심임을 알게 될 것이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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