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감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
김영옥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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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정신의 ‘기능성’에서 소위 정상성 규범이 제시한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여겨지는 노년과 장애인은 안전과 보호의 이름으로 실생활에서 전반적인 감시와 제약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회는 안전을 내세워 이들에게 가해지는 특정 규율을 정당화한다. 생산성과 독립성, 젊음, 속도, (미래라고 일컬어지는 한 방향으로의 불가역적 진행으로 이해되는)진보, 자본주의 노동 윤리 등은 서로 맞물리면서 노골적으로 노년과 장애인을 피보호자의 자리에 눌러앉힌다.
그러나 조미경의 예처럼 생애사의 관점에서 포착된 장애인의 정체성은 이런 주장의 허구성과 편파성을 통쾌하게 부순다. ‘자기 이해‘의 서사란 사회적 관계들의 교차적 만남 속에서 형성되는 ‘자기‘를 계속 재해석한 결과다. 어떤 신체적·정신적 상태에 있든 각자의 삶에는 소망도 있고 갈등과 불안도 있다. 권리나 의무뿐만 아니라, 자발성에 기원을 둔 윤리적 책임도 있다. 피할 수 없는 모멸과 수치심, 억울함의 만남도 있다. 장애인이나 노년들 각각이 갖는 ‘자아 정체감‘이 반드시 신체적·정신적 기능성이라는 조건과 일치하지 않는 이유다. 최중증 장애인인 조미경의 이야기는 이것에 관한 놀랍도록 명료한 증언이다. 그의 몸은, 그의 몸이 살아내는 그의 삶은 매우 의존적이며 동시에 대단히 자율적이다. 그는 휠체어를 비롯해 보청기나 틀니·인공호흡기·돋보기 등 의료기기에, 그리고 활동지원사와 파트너·동료에 ‘기대어서/매달려서 dependent‘ 산다. 잘 기대고 매달려 왔다. 그의 기대고 매달리는 기술력은 기대면서 삶을 조율해 온 긴 역사의 소산이다. 19세까지 ’집 안‘에 갇혀 있던 시간과 이후 ’집 밖‘의 여러 장소와 공간에서 동료와 친구, 애인을 만나며 엮어온 시간은 그의 ’자기‘가 단순히 신체 상태로 환원될 수 없는 것임을 여실히 증명한다. 그가 명랑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48년간의 삶은 ’의존할 수 있는 대상이 늘어날수록, 그래서 선택의 가능성이 커질수록 더욱 자립할 수 있다‘는 명제의 투명한 구현이다. - P139

돌이켜보면 장애 심화와 일상의 선택이나 삶의 만족도가 꼭 일치하는 건 아니더라고요. 이전에 없던 장애가 생기고, 또 장애가 심화하면 솔직히 삶이 좀 고달파지는 건 있어요. 삶이 고달파지니까 그것 때문에 우울감이 들 때가 있지만 이전에 미처 느끼지 못했거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깨닫게 되고, 새로운 감각이 생겨나 새로운 경험이 열리기도 해요. 새로운 앎이 생기고 관점이 넓어지고・・・・・・. 그런 맥락에서 장애 심화가 퇴행만은 아닌 나의 삶이 또 다르게 변화하는, 진화하는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나이듦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이듦으로 해서 또 다른 경험을 하게 되는 게 있잖아요, 분명히. 삶이 진화되는 거, 같은 맥락에서……… 너무 긍정적인가요?" - P143

"슬픔이 너무 깊어요. 하지만 나는 포기할 수 없어요. 매일 계속 뭐든 읽어요, 뭐든 해요. 이제 내가 ‘공감‘에서 장애운동을 계속하려면 다른 식의 시간 감각을 갖고 이것을 현실화하는 게 중요해졌어요. ‘공감‘ 활동가들과 같이 도전해서 새로운 감각을 찾고, 중복 장애가 매우 심한 장애여성의 삶을 같이 나누는 게 중요해요. 이렇게나 피곤하고 힘든데, 내가 뇌출혈에서 다시 깨어난 건 또 새로운 운동을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그는 워낙에도 기존의 나이듦 이해나 관행과는 매우 다른 몸의 역사를 살아왔다. 이제 그에겐 ‘지금 여기‘의 삶을, 이 현존을 충일한 시간성과 장소성의 의미로 살아내는 것이 더욱더 중요하다. 그가 자기/이해를 갱신하며 살아내는 치열한 하루하루를 목격하면서 나는 나이와 시간의 관계를 낯설게 재조명한다. 노년의 나이는 막연한 미래의 어느 시점으로 계속 밀려나는 내일‘들‘의 집합이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꽉 찬 역사성으로 살아내는 시간이다. 뇌출혈을 딛고 또다시 새로운 몸으로, 첫 경험인 양 장애를 알아가면서 펼치는 조미경의 운동은 그런 시간으로서의 나이듦을 구현할 것이다. 그를 통해 우리는 ‘누구와 무엇을 향해 나이들고 있는가‘라는 질문이야말로 나이듦 이해의 핵심임을 알게 될 것이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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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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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이 연대가 될 수 있을까. 연대가 될 수 있게 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 P105

씨앗의 자유와 다양성은 은유가 아닌 유물론의 실재 차원에서 지구를 살리고 지구인들의 자유로운 공존을 지원한다.
이성애자와 트랜스젠더와 침례교인과 히피와, 노란 과육을 검은색 껍질이 감싸고 있는 감자와 가뭄에 적응한 보라색 옥수수 등등 모든 실재하는 것들 사이를 가르는 경계는 없다. 씨앗 지킴이들에게 유전적 다양성은 ‘인류와 세계적 기근 사이의 울타리‘다. - P115

인공지능이 아닌 땅과 몸의 지능으로 한 해 한 해 살아온 할머니들의 시간 감각은 후배 여성들에게 이런 조언으로 도착한다. "마음을 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느긋하게 생각하고, 거짓 없이 진실하게 살아라. 자신을 믿고 느긋하게 사는 것 그 이상은 없는 것 같아." "먼 데 걱정 땡겨 하지 말고. 안 되는 것은 잊고 살아." - P125

특히 삶에 어려움이 닥쳤을 때 어떤 힘으로 버텨낼 것인가를 할머니들을 통해서 직접 보고 배운 것 같아요. ‘지나가겠지‘ 또는 ‘버텨내지겠지‘ 그런 힘들을 배웠죠. 포기하지 말고, 버텨보자. 태풍도 버텨보고, 가뭄도 버텨보고, 장마도 버텨보자. 그러면 결국은 또 씨앗을 맺더라. 한 알일지라도 결국에는 씨앗을 맺는다.
밭을 일구는 할머니들을 보면 다리도 고장 나고 허리도 고장 나서 너무도 고단하지만 생명의 기운이 느껴졌어요. 아마 항상 무언가를 살리는 사람들이라 그런가 봐요. 저는 그런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 다양한 삶의 풍파를 살아낸 단단하면서도 생명력 넘치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가 생명력이 넘친다는 게 어딘가 모순적이긴 하지만, 또 다른 의미의 생명이 아닐까 싶어요.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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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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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산노동인 돌봄노동을 축으로 생산노동 중심의 경제를 재해석한 낸시 폴브레가 말했듯이, 돌봄노동자 역시 ‘사랑의 포로’다. 그러나 돌보는 일 자체에 내재하는 사랑과 애착의 정서가 견디기 힘든 정도의 불평등한 희생을 요구한다면, 그 포로는 도망치려 할 것이다. 기꺼이 사랑의 포로 자리에 머물면서 자신의 돌보는 손길로 요양원 거주자들의 마지막 나날을 쾌적하고 평온하게 동반하는 것, 이것이 이은주가 꿈꾼 요양보호사의 하루하루다. - P72

보통 말기 중증 치매 환자의 경관 급식에 관한 윤리적 논쟁을 주도하는 것은 제도화된 생명의료윤리 담론이다. 여기서 초점은 의료적 판단에 맞춰져 있다. 연하곤란이 신체의 기능상 장애에 의한 것인지, 그래서 선택하는 경관 급식이 환자의 신체적 잔존 능력을 보존하는지 등. 생명의료윤리는 경관 급식이 의미 있는 개선 혹은 유지 효과를 불러오지 못한다는 의료 지식에 근거해 경관 급식에 반대한다. 그러나 말기 환자의 ‘삶과 행위성‘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들은 이 논쟁에 다른 관점을 도입한다. 환자가 삼키는 일에 곤란을 겪을 때 필요한 것은 의료기술을 사용한 신체 기능의 검사가 아니라, 환자가 왜 음식을 거부하는지, 삼키지 못하는지 또는 삼키지 않으려 하는지에 대한 상황적 검토와 관찰이다. 음식의 맛이나 질감, 복용 중인 약물, 주위의 소음이나 옆 침대 환자의 태도 등 식사 환경, 환자의 심리 상태와 이에 작용하는 상황들까지 살피면서 ‘삼킬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관찰에도 결국 경관 급식이 행해진다면, 억제대나 특수 장갑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환자의 상태나 환경을 만들고자 이런저런 시도를 해볼 수 있다. 이런 살핌과 시도는 환자의 신체 기능에 대한 의료적 판단만을 따르기보다 즐거움과 고통,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등과 관련된 환자의 행위성을 존중한다. 그렇게 관계적 돌봄 속에서 상황적이고 잠정적인 지식을 얻는다. 그러나 이런 살핌은 돌보는 사람에게 시간과 자원이 충분히 허용되어야만 가능하다. 통계적으로 산출된 활동 보조 시간으로 수가가 책정되는 요양원에서 이렇게 ‘느린 돌봄‘이 가능할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문제다. - P86

이야기청의 프로그램은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과 소통의 욕망이라는, 창작자들의 기본 특성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창작 작업이고 따라서 어떤 노년을 만나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들을 것인가는 전적으로 작가들의 선택이다. 그러나 모두가 공유하는 기본 지향점은 있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사람의 일상을 통해서 그 사람만의 특별하고 귀한 면모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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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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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일곱 번 기저귀 교체가 가능한 공공 요양 기관은 전체 요양 시설의 1.1퍼센트에 불과하다. 그게 대한민국 요양 보호의 현실이다. 하루 세 번, 혹은 다섯 번과 일곱 번의 차이, 이 간극에 요양원 입소를 피할 수 없는 노년들은 좌절한다. 요양보호사 일을 ‘성심성의껏‘ 하고 싶은 요양보호사들 역시 좌절한다. 이은주의 <나는 신들의 요양보호사입니다》는 이 좌절 속에서도 지켜내려 애쓴 ‘요양보호사의 자존심과 윤리적 돌봄 실천‘의 기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다짐과 ‘애틋함’의 정서, 고군분투의 땀방울이 책 곳곳에 스며있다. ‘고군’분투라 한 것은 묵직하게 지리 잡고 있는 회의와 견디기 어려운 고립, 그리고 우울 때문이다. - P70

입소해있는 노년들에게는 참혹하고, 요양보호사들에게는 잔혹한 요양원. 늙어가는 많은 이들에게 요양원은 ‘절대로 가서는 안 될 시설‘로 각인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요양보호사 이은주는 바로 그 요양원 안에도 사람살이의 이야기가 있음을, 사랑과 연대의 이야기가 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그 이야기들은 요양보호사 자신을 ’갈아 넣어야‘ 가능한 일임을, ‘갈아 넣다가‘ 안 되면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음을 드러낸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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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면 어린아이가 된다는 말을 사람들이 어느덧 비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이해하고, 이해한 대로 노년을 대하기 때문이다. 같은 나이대의 동료나 시민들뿐 아니라 후배 세대들까지 존경하는 문장가라도 예외는 없다. 노년기는 그 어떤 생애 단계에도 적용하기 어려운 단순한 집단화에 희생된다. 개성을 고려한 존중은 찾아보기 어렵다. - P13

노년 연구를 하면서 내가 만난 당사자들은 대략 75세부터 자신을 ‘진짜 노년’이 되기 시작했다고 느낀다. "그전까지의 나이 이야기는 농담이었고, 이제 진담이 시작되는 거지"라고 말한다. 신체와 정신.마음 사이에서, 사회적으로 부여되는 정체성과 사적으로 느끼는 정체성 사이에서 나이듦은 협상과 조율, 적응과 성장의 문제가 된다. 개인별로 협상과 조율 수준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것 또한 적극적으로 존중받아야 할 사실이다. 아무튼, 나이듦/늙어감은 배움이 필요한 일이다. 노년기의 적응과 성장을 위해서는 선행 학습이 필요한 것이다! - P15

여기, 우리 사이에 노년이 산다는 것이 우리 각자의 삶에서 중요한 공부의 실마리가 되길 희망하며 이 책을 펴낸다. 노년을 만나 노년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되고, 노년과 우정을 쌓거나 ‘늙어감‘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답게 늙어가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쓸모 있는 선행 학습이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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