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은 이렇게 -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지침서
마이클 왈저 지음, 박수형 옮김 / 후마니타스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시민정치가 성공하려면 (특히 지역 수준에서) 시민 리더의 욱성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역량있는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든 찾을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모든 파업, 시위, 선거운동에서 만날 수 있으며, 책임감을 갖고 위기에 대처한다. 그러나 직업정치인들이나 분파적 급진주의자들이 나타나 확신에 찬 목소리로 모두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말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들은 사라지고 만다.
사람들에게는 운동 말고도 다른 할 일이 많다는 사실을 아는 리더들이, 운동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가장 잘아는 이들이다. 따라서 다른 일도 해야 하는 뛰어난 활동가들에게 정치활동을 계속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방법을 열심히 찾아야 한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시련을 겪을 때 격려 받아야 하며, 자기 지역에서 중앙조직으로 나갈 준비가 되어 있을 때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지역으로 다시 돌아오고자 한다면 그럴 수 있도록 지원받아야 한다. 이런 활동가들을 돕는 방법이 한 가지 있다. 그들과 가족이 가난에 지치지 않도록, 그리고 전문가들이 누리는 지위나 보상에 현혹되지 않도록 활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것이다. - P110

그럼에도 나는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을 힘들고 지치게 만들어 결국 소수의 동조자들끼리 결정을 내리는 것보다,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최선의 결정을 얻고자 노력하는 편이 대체로 더 낫다고 생각한다. 선택할 수 있다면 작은 거실보다 큰 교회 지하 강당이 더 좋다. 그러나 가장 먼저 두 가지 규칙을 지킬 필요가 있다. 첫째, 회의를 너무 자주해서는 안 된다. 둘째, 회의는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
의장은 자신에게 요구되는 일들을 책임질 만한 역량을 갖춘 사람이 맡아야 한다. 회의와 관계없는 발언은 차단하고, 주요 안건들을 논의하도록 유도하며,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전에 투표가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운동 내 소집단들이 틈틈이 모임을 가져야만 회의를 너무 자주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장이 구성한 위원회들 그리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활동가들로 구성된 의견그룹들이, 자신이 다루고 싶은 제안과 옹호하려는 입장을 갖고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 의장은 그들의 제안과 입장이 무엇인지, 누가 발언할 것인지를 미리 알아 두고 일정한 순서에 따라 발언자들을 호명할 수 있어야 한다. 회의 전에 주요 참석자들과 소통하지 못하면, 의장은 회의를 효과적으로 주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의장이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물론 이 말은 회의가 늘 의장이 의도한대로 진행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
회의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최대한 많은 사람을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간판 집단에게는 회의 같은 것이 필요 없을 수도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집회뿐이며, 집회는 이념적 성장, 도덕적 카타르시스, 열정과 연대의 고양 같이 매우 다른 목적에 기여할 것이다. 좋은 회의도 이런 목적에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회의는 또 다른 두 가지 과제를 처리해야 한다. 하나는 권한을 나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책임을 부과하는것이다. 이 두 과제를 모두 성공적으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운동은 리더나 스태프들의 소유물로 전락하고 만다. - P126

회의는 주재하지만 사무국에서 존재감이 없는 리더는 리더로서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어렵다. 이럴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은 특정 사람들이 사무국을 ‘포획‘하는 것이다. 여기서 특정 사람들이란 전체 대표자 회의의 신임을 받고 있지 않으면서도, 리더들이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간판 노릇을 해서 그런 신임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을 말한다. 이런 현상은 특히 파트타임 활동가와 파트타임 리더로 이뤄진 운동에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간판 집단은 모두가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활동에 적합한 조직 형태지만, 이것이 늘 적합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구성원들을 대표하는) 리더는 자신이 원할 경우 언제든 사무국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 P133

정치적 결사는 거리를 유지하는 기술이다. 사람들 간의 거리가 너무 가까우면 위험하고 집중을 방해하며, 너무 멀면 통제력과 영향력을 잃게 된다…….

활동가들이 가져야 할 이상적 태도는, (자신들에게 날아올지도 모를) 비방과 모욕에 대해서는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정치적 이견의 미묘한 차이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대응하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이 두 가지가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며 섞여 있다. 패거리 집단이 위험한 이유는, 그들이 공적 논쟁과 사적 음모 간의 균형을 후자 쪽으로 옮겨 놓기 때문이다. 이것은 리더십이 한 무리의 친구들로 구성될 때 특히 더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런 상황에서는 자신이 리더십에서 배제된 이유가 정치적인 것이라고 받아들이면 기분 나빠하지 않을 많은 활동가들조차, 인간적인 이유로 배제되었다고 생각하며 분노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현명한 리더는 친구가 아닌 사람, 심지어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과도 어울리고자 하는 사람이다. - P13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운동은 이렇게 -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지침서
마이클 왈저 지음, 박수형 옮김 / 후마니타스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에게는 저항운동이 필요하고, 오래전부터 노동운동이 내걸었던 다음과 같은 핵심 구호를 기억하는 시민운동가들도 필요하다.
조직하라!

: 1915년 노동운동가이자 작곡가였던 조 힐이 사형을 앞두고 선배운동가 빌 헤이우드에게 보낸 전보에서 발췌한 구호 전문은 이렇다. "잘 있어요, 빌. 나는 진정한 반역자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애도하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 조직하세요." 2010년 미국의 진보적 역사학자 하워드 진이 사망했을 때, 보스턴 글로브 신문도 이 구호를 표제로 그의 부고를 알렸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맞서 싸우는 활동가들 또한 이 구호를 쓴다. - P35

가장 유용한 이론이나 주장은 활동가들에게 한 번에 하나의 선택, 하나의 싸움만 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나중에 얼마든지 더 많은 선택을 할 수 있고 더 많은 싸움에 참여할 수 있다.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는 미리 계획을 세워 놓고 싶어하는 이들도 있다. 운동의 초점을 흐리지 않는 범위에서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 운동의 초점은 확실하게 하나의 중요한 이슈에 맞춰야 하며, 투표나 전쟁, 폭격처럼 쉽고 단순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운동의 대변인들과 활동가들은 그 이슈의 중요성과 단순함을 과장해도 좋다. 단일 이슈에 초점을 맞춰 승리한 후에, 그 이슈를 둘러싼 문제의 복잡성을 깨닫고 실망해도 늦지 않다. - P67

활동가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 자기 같은 사람들이 더 많이 있으리라 생각하며 운동을 시작할 때, 최선을 다할 수 있다. 자신의 결의와 열정적인 활동에 자부심을 갖는 것은 좋지만, 자신을 예외적인 사람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정말이지 활동가들이 남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면 효과적으로 활동하기는 어렵다. 당신이 발 딛고 선 곳에서 시작하라. 이 말은 윤리적인 삶과 관련해 자주 언급되는 중요한 격언 가운데 하나지만, 정치운동의 세계에서도 자신이 발 딛고 선 곳에서 시작해야 할 경우가 많다. - P71

이처럼 단체와 지역에 뿌리내린 사람들이 주도하는 운동이 한 나라 안에서, 심지어 한 도시 내의 여러 지역에서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면 그것만큼 좋은 일도 없다.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운동을 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운동의 대의보다 더 절박하고 더 즉각적인 관심사가 있다는 사실이다. 중산층이 가진 최악의 편견은 다른 모든 사람이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여유로운 생활, 사심 없는 마음, 이상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다거나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에게 대의란, 그것이 자신과 관련된 것일지라도 그저 가끔씩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사치품에 불과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통상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평범한 정치인이, 유토피아를 위한 정책 프로그램 운운하는 시민활동가보다 더 많은 지지자를 더 쉽게 확보할 뿐만 아니라 마땅히 그럴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정치인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억압의 피해자나 ‘허위의식‘의 희생자가 아닌 합리적 인간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운동 단체의 스태프들도 탁아와 법률 지원, 복지 프로그램에 대한 안내와 조언 같은 서비스를 제공한다. 같은 이유에서 시민들 또한 평범한 정치인을 찾아가거나 지역 활동가에게 출마를 강력히 권유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대의만 가지고 운동을 전개할 수 없다. 이 말은 운동이 자신의 단일 이슈를 포기해야 한다거나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슈를 다루는 정치집단이나 야심 있는 사람들과도 연합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 P77

민주적인 조직에는 갈등이 내재돼 있다. 이것을 분열적이라고 안 좋게만 볼 필요는 없다. 갈등은 내부 논쟁을 자극하고, 유의미한 실천으로 이어지는 경쟁을 촉발하며,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그러나 갈등은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종종 극적인 방식으로) 보여 주기도 한다. 왜냐하면 최선의 정치조직이란 어떻게 구성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운영되느냐에 따라 결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 P10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생각하기에, 함께 일하는 수많은 사람 사이에도 상당히 많은 편견이 있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물론 그들은 자신이 편견을 갖고 있다고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겠지요. 그것이 운동에 피해를 줄까 봐 겁났다고 말할 겁니다. 사실 이미 알려졌고 숨길 게 없었어요. 폭로할 것이 있지 않은 한 운동에 해를 입힐 수 없습니다. 그들은 또 말을 더 하면 내게 해가 된다고도 말했죠. 그들은 나를 그윽하게 바라보고는, 정말 치욕을 더 겪고 싶은 건 아니겠지? 라고 말했어요. 글쎄요, 난 치욕스럽지 않았습니다. - P289

그러나 라이히와 맬컴 엑스, 야콥슨과 러스틴의 이야기가 뭔가를 알려준다면, 어떤 인간의 몸이든 국가에 의해 유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범죄를 저질러서가 아니라, 특정한 몸 자체를 범죄적이라고 지정했기 때문에 말이다. 데이비스는 다시 말한다. "우리는 더 많은 수의 사람을 권위주의 체제와 폭력, 질병, 심각한 정신적 불안정을 유발하는 격리 기술들로 얼룩진 고립된 존재로 기꺼이 전락시키려는가?" - P291

침략, 살인자, 동물, 벌레, 포식자. 이와 같은 오래된 판타지가 스스로 영속화한다. 더러움과 오염과 무절제한 성과 멈출 수 없는 질병을 촉발하는 용어로 살아남는다. 그들이 온다. 알 수 없고 침략적이고 오염시키고, 당신 것을 빼앗고, 당신을 감염시킬 그들이 온다(물론 트럼프는 코로나-19 "중국 바이러스"라는 별칭으로 부른다). 이동의 자유는 도둑질로 개념이 바뀌고, 순수성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것은 혼혈혼에 대한 공포, 상이한 종류의 몸이 너무 자유롭게 섞이는 것에 대한 공포이기도 하다. - P323

더 좋은 세상을 원했다고 말하라. 그것을 위해 싸웠다고 말하라.
그리고 그것이 파탄이 났다고, 사람들이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었다고, 죽었다고 말하라. 자유가 꿈이었다고 말하라. 사람들이 점유하고 있는 몸의 종류 때문에 좌절하지 않고 증오받지 않고 살해되지 않는 세상을 꿈꾸었다고 말하라. 몸이 힘이나 기쁨의 원천이 될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고 말하라. 해악이 없는 미래를 상상했다고 말하라. 당신이 실패했다고 말하라. 그 미래를 실현시키는 데 실패했다고 말하라.
페미니즘에서 게이 해방으로, 또 민권운동으로, 지난 세기의 투쟁은 그 심장부에서 볼 때 당신이 점유하는 몸의 종류에 기초한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권리를 얻으려는 투쟁이었다. 원하는 곳에 살고, 원하는 곳에서 일하고, 좋아하는 곳에서 먹고, 폭력이나 죽음의 위험 없이 좋아하는 곳을 걸을 수 있는 것. 임신을 중단할 수 있고 공공장소에서 키스하고, 감옥에 갇힐 위협 없이 합의하에 섹스할 수 있는 것. 승리는 힘들게 얻어졌지만, 영구히 보장되지는 않았다. 이미 사라지고 있다. - P372

폭력은 하나의 사실이다. 하지만 조스펍에 앉아 비브를 보거나니나 시몬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는 내 주위 공간이 확대되는 것을 느꼈다. 하나의 몸이 다른 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이것이다. 공유되는, 내면까지 침투하는 자유를 표현하는 것. 자유는 과거의 부담을 짊어지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로 계속 나아가고 항상 꿈꾸고 있는 것을 뜻한다. 자유로운 몸이 온전하거나 손상되지 않거나 현 상태를 유지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항상 변하고 변하고 변한다. 결국은 유동적인 형태다. 잠시 두려움 없이, 공포를 느낄 필요 없이 하나의 신체 안에 살아가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 상상해보라.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상상해보라. 우리가 구축할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해보라. - P37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표현하는 일은 내 한계를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잖아요. 나는 내가 아는 만큼만 표현할 수 있으니까, 내 인식의 경계를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해요. 한계에서 멈추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 쓰고 읽고 말하고 듣는 거 아닐까요? 제가 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서 당신의 이야기에 몸을 바짝 당겨 앉게 된 이유는 그 때문이에요. 서로의 한계가 만나 연립하는 순간을 믿어서요. 우리는 부딪치며 넓어지는 중이에요." - P140

나는 오해한다. 쉽게 오해한다. 두려움은 오해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미움도, 적의도, 분노도 오해일 수 있다. 설사 그게 오해가 아닌 진실이어도 나에게는 소통할 기회가 있다. 그 기회를 겁이 난다는 이유로 미리 차단하고 싶지 않다. 일단 진심으로 표현한다. 언젠가 상대에게 내 말이 ‘문득 떠오르는 순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샤워하다가, 밥 먹다가, 변기에 앉아 있다가, 혹은 자기와 사랑하는 이들이 차별이라는 벽 앞에서 멈칫하거나 다쳤을 때. 어떤 순간이든 그에게 이 말이 절실해지는 순간이 있을 수 있다. 그 가정법을 안고 계속 말한다. 우리는 서로를 오해하고 쉽게 두려워하지만, 결국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함께 느끼는 순간은 온다. 내 오해가 깨졌던 순간들처럼, 내 두려움이 억측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처럼. 그렇게 두려움과 오해를 넘어 말을 건넨다. - P146

"저는 사랑의 신화를 믿습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으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알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사랑하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나를 알 수 있을까요. 타자가 있어서 나를 아는 것인데, 내가 사랑하지 않고 누구와 공감하고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언제나 사랑을 꿈꾸죠.
비록 사랑을 통해서 상처 입고 눈물 흘리고 때로는 에로스의 바다에 빠져서 익사한다고 할지라도 징검다리로 올라올 수 있는 힘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죽음의 바다를 건너기 위한 하나의 징검다리로서 사랑을 잡으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사랑이야말로 어떤 의미에서 구원이지요. 내가 죽지 않기 위하여, 죽음으로부터 나를 살아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에요. 사랑이라는 건 누구한테나 가능한 것이고, 사랑 때문에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각종 오물을 몸에 간직한, 사악하고 비겁하고 연약한, 타자를 삼키며 살아가는 어쩔 수 없는 뱀파이어인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며 세계를 책임지는 일. 혐오와 사랑, 무수한 아이러니가 흐르는 곳에 아이러니한 내가 있다. - P163

줌파는 책에서 자주 술에 의존했던 내 엄마의 이야기를 읽었다면서 다정한 눈빛으로 말했다. "어머니의 술은 제 슬픔과 같다고 생각해요. 저도 자주 생각했거든요. 술이 몸에 받았다면 정말 술에 기댔을 거라고요. 저는 승은 씨 어머니의 술이 제 눈물처럼 보였어요. 그러니까 어머니에게 술은 꼭 필요한 표현이었을 수 있어요." 그 말을 듣는 동안 나는 눈물을 훔쳤다. 엄마는 자주 말했었다. "술을 먹으면 솔직할수 있었어. 울고 싶을 때 마음껏 울 수 있었어." 줌파와 엄마의 울음이 겹친다. 나는 말이 되지 못한 그녀들의 울음을 들으며 자랐다. 슬픔의 이유는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나 또한 말이 되지 못한 울음을 삼키거나 뱉으며 살았으니까. - P190

울부짖음은 주로 짐승의 소리, 여성의 소리로 폄하되어 왔다. 눅눅한 감정을 제거하고 바짝 말린 소리만이 공적인 언어가 될 수 있다고 배웠다. 나는 그 잠언에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싶다. 나는 당신의 슬픔을 하나하나 파고들고 싶지 않다. 오늘 하늘이 너무 맑거나 흐려서 눈물이 흐를 수도 있고, 아픈 기억을 직면하는 괴로움으로, 사무친 그리움으로, 이유 모를 슬픔에 잠길 수도 있다. 다만 당신이 울음을 참거나 홀로 삼키지 않길 바란다. 당신에게 울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되길 바란다. 그 울음이 독백이 아니라 대화로 이어지길 바란다. 울음 뒤에 가려진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꺼내 자기만의 언어로 재해석할 관계가 곁에 있길 바란다. 당신의 울음을 듣기 위해 자세를 잡는다. 어떤 울음은 가장 적극적인 말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 P194

불안정하고 불안하다고만 여겨왔던 침묵을 다시 생각한다. 침묵은 여러 가지 메시지를 품고 있다. 이미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당신이 못 듣고 있어서 힘들다는 서운함의 표현이기도,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며 뱉는 신음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갇혀 있어서 진공 상태에 있다가 무언가 서서히 열리며 피어오르는 불씨이기도, 당신과 이 공간이 이야기를 꺼내기 믿을 만한 곳인지 가늠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요청이기도 하다. 침묵을 불안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는 것만으로도 불안은 희미해진다. - P250

목소리를 가진다는 것은
단순히 무언가를 말할 수 있다는 뜻만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역할을 가진다는 것,
주체성을 가진다는 것,
"이 경찰이 폭력을 쓰는 것을 내가 목격했습니다"라는 말이든
"아니, 너랑 섹스하기 싫어"라는 말이든
"내가 꿈꾸는 사회는 이렇습니다"라는 말이든 남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말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 리베카 솔닛,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 - P26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렇게 괴롭다면, 숨고 싶다면, 나는 왜 이 일을 할까? 왜 굳이 드러낼까. 표현할까. 지난 7년간 망설일 때마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누구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걸까? 이 질문이 있었기에 드러내는 쪽으로 몸을 기울일 수 있었다. 나에게는 하고 싶은 말이 있었으니까. 편견을 먹고 자라는 성장 위주의 언어가 아닌, 편견을 해체하고 세계를 돌보는 언어. 배제가 아닌 연대의 언어. 나를 자유롭게한 언어. 당신에게도 꼭 닿길 바라는 이야기들. 자유들. 그이야기를 전할 때만큼은 익숙한 문장을 뒤로하고 용기 낼 수 있었다. - P6

나는 아직 더 많은 이야기들이 흘러야 한다고 믿는다. 인종, 계급, 젠더, 섹슈얼리티, 장애, 연령, 이주 상태 등 다양한 영역에서 정상 규범을 강화하는 단일화가 주위를 감싸고 있는 이 세계에 더 다채롭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흘러야 한다고 믿는다. 그 이야기는 다른 누군가의 말이 될 수도 있지만, 누구보다 우리 안에 가라앉은 이야기에서도 찾을 수 있다. - P9

나는 신뢰받지 못했다. 모두에게 친절하게 굴며 간결하지 못한 화법이 몸에 밴, 꾸미는 걸 좋아하는 여자. 그건 사회에서 주입받은 ‘여자’의 모습이었고, 신뢰와 거리가 멀어지는 일이었다. 물론, 나도 불편한 상황에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무표정을 짓기도 한다. 화장과 렌즈를 생략하고 안경을 낀 채 앞에 서는 날도 있다. 고개는 끄덕이고 싶을 때만 끄덕이며 싫은 건 정확하게 싫다고 표현한다. 특히 타인을 깎아내리며 자기를 과시하거나 자기 주제(위치)를 모르고 함부로 중립이나 평화를 외치는 사람은 참지 못한다. 그런 순간이면 나는 기꺼이 변할 수 있다. 그렇게 표현해도 상대는 자기 관리 못하는 여자가, 감정적으로, 히스테리를 부린다고 받아들이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사실 모든 말과 태도를 앞서는 건 발화자의 위치라는 사실을 이미알고 있었다. - P39

나는 레즈비언 대통령을 원한다. 에이즈에 걸린 대통령과 동성애자 부통령을 원한다. 건강보험이 없는 사람, 독성폐기물이 쌓인 땅에서 자라 백혈병에 걸릴 수밖에 없었던 사람을 원한다. 열여섯 살에 낙태해본 대통령을 원한다. 두 악인 중 덜 나쁜 자가 아닌, 기꺼이 뽑을 수 있는 후보를 원한다. 마지막 연인을 에이즈로 잃은 사람, 자려고 누울 때마다 죽은 연인을 떠올리는 사람, 연인이 죽어가는 걸 알면서 품에서 그를 놓지 못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기를 원한다. 나는 집에 에어컨이 없는 대통령을 원한다. 병원, 차량국, 복지센터에서 줄 서본 적 있는 대통령을, 실업과 해고를 경험한 대통령을, 성폭력, 동성애 혐오 폭력을 겪고 강제 추방 당한 대통령을 원한다. 마당에서 십자가가 불태워지고, 무덤가에서 밤을 지새워본 사람, 강간에서 살아남은 사람, 사랑에 빠지고 상처 입어본 사람, 섹스를 존중하는 사람, 실수하고 실수에서 배워본 사람을 원한다. 나는 흑인 여성 대통령을 원한다. 치아가 엉망이고 태도가 불량한 사람, 끔찍한 병원 밥을 먹어본 사람, 크로스드레서, 마약에 중독되었던 사람과 회복 중인 사람을 원한다. 시민불복종 운동에 헌신했던 대통령을 원한다.
그리고 나는 왜 이런 일이 불가능한지 알고 싶다. 왜 우리는 대통령이 항상 우리와 동떨어진 세계에 사는 광대여야 한다고: 항상 창녀를 사는 사람이며 결코 창녀여선 안 된다고 배우게 되었는지 알고 싶다. 왜 대통령은 항상 사용자이며 결코 노동자여선 안 된다고 배웠는지, 왜 항상 거짓말쟁이고 도둑이면서도 결코 잡히지 않을 거라고 배우게 되었는지 알고 싶다.
- 조이 레너드Zoe Leonard, 〈나는 대통령을 원한다! Wanta President〉(1992) - P42

아빠는 내가 사람들을 ‘당당하게‘ 대하지 못한다고 답답해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당당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성향보다 지위의 문제였다. 사업에 실패하기 전까지 아빠는 다른 사람들에게 지시하고 명령하며 살았다. 나는 한 번도 그런 위치에 있었던 적이 없었다. 아르바이트생이거나 계약직이었던 20대에도, 대필 작가나 외주교정자였던 30대에도 갑보다는 을의 위치에, 때로는 병의 위치에 놓여 있었다. 나는 ‘당당하게‘ 지시하고 요구하는방법을 알지 못했다.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하재영> - P55

청소년들을 만날 때마다 ‘가르친다‘는 말의 의미를 곱씹게 된다. ‘가르친다‘는 말은 새롭게 정의되어야 한다. 나이와 권력에 따라 당연히 주어지는 역할로 착각하지 않으려면, 언어에 담긴 위계를 직시하고 그 의미를 비틀어야 한다. 어른/아이의 이분법으로 누군가를 훈육하려는 오만, 평화를 가장한 무지를 경계하기 위해서라도. - P62

내가 일부러 자극적인 단어를 쓰는 건 아니다. 그저 나에게 화두인 이슈를 포장하지 않고 표현하는 거다. 나누고 싶어서, 나눠야 살 것 같아서. 그저 내 소매 끝에 매달린 먼지를 떼듯,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낼 뿐이다. 그럼 다른 누군가 입을 뗀다. 그 사람의 목소리가 또 다른 이야기를 부른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꺼내지 않은 말 속에 숨어 있던 뱉고싶은 말을 배운다. 꼭 직면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배운다. 누군가 꺼낸 말들 사이에서 내가 꺼내지 않은 말들을 돌아본다. 그렇게 함께 해방하는 감각을 배운다.
말만으로 모든 것에서 자유롭긴 어렵지만, 꺼내지 않고 시작되는 자유는 없으니까. 내 해방이 당신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당신의 해방이 내 해방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배운다.
당신이 입을 떼는 그 순간에. - P74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말을 통해 타인을 언짢게 할 수도, 상처를 줄 수도 있다. 하지만 글을 쓸 때처럼 대화에도 퇴고의 기회가 있다. 진심으로, 너무 늦지 않게 사과하는 것. 그 일에는 무엇보다 용기가 필요하다. 자존심을 내려놓고, 먼저 사과하면 불리해질 거라는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진심으로 사과하기. 나는 사과하는 법과 용서하는 법을 너무 모르고 지냈던 것 같다. 나는 바란다. 말을 뱉기 전에 신중해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보다 기꺼이 사과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초고를 쓴 뒤에 여러 번 퇴고하며 보다 무해한 글로 다듬듯, 말을 뱉은 뒤에도 퇴고할 기회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다. - P10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