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추리 - 강철인간 나나세
시로다이라 쿄 지음, 박춘상 옮김 / 디앤씨북스(D&CBooks)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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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다이라 쿄 하면 떠오르는 만화 <스파이럴>. 상상조차 못했던 '판타지적'인 면으로 굴러떨어졌던 스토리는, 그럼에도 나름의 논리를 유지하며, 재미있었다. 그리고 원작자의 이름에 '시로다이라 쿄'가 보이면 주저하지 않고 집어들었고, 언제나 반전을 각오했다. 그리하여 언제쯤, 어떤 방식으로, 어떤 방향으로 이 스토리는 '뒤집어질' 것인가. 이제 시로다이라 쿄의 '소설'―그것도 본격 미스터리 대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을 걸머진―을 집어들었을 때, 나는 이미 호의 가득한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추리'란 조각조각 흩어진 단서를 꿰어맞춰 그 너머에 있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고,

그로 인해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알고, 그에 적절한 조치를 취해, 매듭짓는다.

그렇다면 '허구 추리'란 무엇인가?

 

간단하게 줄거리를 말하자면, 17세의 일안일족一眼一足 소녀 이와나가 코토코岩永 琴子가 우연히 마주친 남자 사쿠라가와 쿠로를 2년간 짝사랑한 끝에 연인과 헤어진 22세의 쿠로에게 사귀어달라고 고백한다. '갓파를 만나 연인과 헤어졌다'는 쿠로는 쿠단과 인어 고기를 먹어 예언과 불사 능력을 지니고 있고, 이와나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요괴들에게 유괴당해 지혜의 신이 되어달라는 부탁을 받아들여 한쪽 눈과 한쪽 다리만 남았다.

그리고 2년 반 뒤. 쿠로의 헤어진 연인 유미하라 사키가 경찰이 된 마쿠라자카 시에서 괴이한 일이 벌어진다. 올해 초 마쿠라자카 시에서 철골에 깔려 사망한 아이돌, 나나세 카린이 아이돌 시절 의상을 입고 철골을 든 모습으로 밤마다 나타나 사람을 습격한다는 것. 일명 '강철인간 나나세'와 마주친 사키의 앞에, '강철인간 나나세'를 쫓아온 전 남자친구의 현 여자친구가 나타났다.

 

 

"사키 씨, 강철인간은 괴물이에요. 그것도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망상과 바람이 빚어낸 '상상력의 괴물' 이죠." - p.156

 

 

강철인간은 요괴였다. 그것도 현대이기에, 인터넷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현실이기에 태어날 수 있었던 괴물이었다. 게시판들이, 괴물을 믿는 자들의 마음이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는 괴물은, 그렇기에 비현실적인 어떤 수단이 아니라 현실적인 추리와 논쟁을 통해 괴물의 존재를 믿는 자들의 마음을 꺾어냄으로써 쓰러진다. 어떤 판타지라도 그 판타지 나름의 규율이 존재하고, '논리'와 동떨어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현실 속 의회와 비유되는 인터넷 논쟁에서, 이와나가는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괴물인 강철인간으로부터 '이기기 위해' 거짓이라는 허구 위에, 그러나 믿는 자의 마음 속에는 진실이 되어 강철인간을 쓰러뜨리게 할, 논리의 탑을 쌓아올린다.

 

 

애초에 '올바르다'는 게 뭘까? 범인을 지적한다는 일은 또 뭘까?

실제 사건이라면 알맞은 자료와 추리로 진상을 분명하게 밝혀내는 일쯤으로 정의할 수 있으리라. 진실은 언제나 하나다. 그 모습은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으니, 논리로 명확하게 밝혀지기도 하리라.

하지만 이와나가가 하려는 것은 있지도 않은 범인과 진상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한정된 단서에서 놀라운 진상을 도출해내는 것. 현실에 없는 것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밝혀낼 수 있을까? - p.240

 

시로다이라 쿄는 친숙한 장치와 비현실적인 장치를 서로 잘 섞어내 허구추리라는 또 한 편의 멋진 이야기를 선보였다. 그가 원작자로서 선보인 만화들에 못지 않은, 멋진 소설이었다. 이와나가와 쿠로 콤비의 이야기를 또 어딘가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되길 기대하며.

 

/131201

p.161 / p.169 / p.200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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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집
박완서 지음, 이철원 그림 / 열림원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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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놀랍고 아름다운 까닭은 목련이 쑥잎을 깔보지 않고, 도토리나무가 밤나무한테 주눅 들지 않고, 오직 타고난 천성을 완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데 있지 않을까.-132쪽

할아버지는 왜 그렇게 나를 애지중지하셨을까. 그 생각만 하면 자신이 소중해진다. 그분이 사랑한 나의 좋은 점이 내 안에 지금도 살아 숨 쉬는 것처럼. 그건 삶이 비루해지려는 고비마다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 되었다. 우리가 여행을 할 때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아마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는 소리일 것이다. 그러면서 자꾸자꾸 사진을 찍어대듯이 사람이 한세상 살고 나서 남길 수 있는 게 사랑밖에 없다면 자꾸자꾸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 -136쪽

기 살리기와 응석받이를 혼동하지 말았으면 한다. 덮어놓고 집을 나가 거리를 떠돈다는 것은 일종의 응석이다. 성인이라면 이 어려운 때 누가 누구에게 기대고 떠맡기는 식의 응석은 부리지 말아야 한다. 기는 소통이 돼야 비로소 살아 있는 기고, 소통이란 일방적인 게 아니라 상호적인 것이다. 가장 힘들 때 그 고통의 현장에 부재不在하려는 남편들의 가출을 너무 동정하지 말았으면 싶다. 동정과 격려를 받아야 할 사람은 졸지에 생활고와 남편의 행방을 몰라 애간장이 마르는 이중고를 겪는 아내들이다.-141쪽

시간, 지는 형체도 마디도 없으면서 우리 몸엔 어김없이 마디를 긋고 지나가는구나.-193쪽

노욕도 가지가지라고 웃어넘겼지만 지지리도 못사는 시절을 겪었던 늙은이들에겐 물질적 풍요가 전적으로 대견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어쩌면 이렇게 잘살게 되었을까, 휘황한 겉보기가 꿈만 같으면서도 아직 돈 벌 나이가 안 된 미성년의 씀씀이나, 도처에서 지천으로 낭비되고 버려지는 음식이나 입성을 보고 있으면 문득 하늘 무서운 생각까지 들 적이 있다. 풍요의 그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통으로 겨우겨우 사는 사람도 잘 상상이 안 되는 극빈지대에 버림받은 청소년, 어린이, 노약자, 장애인이 도움을 호소하는 소리를 매스컴을 통해 듣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다.-205쪽

내가 죽도록 현역작가이고 싶은 것은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노년기 또한 삶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삶의 가장 긴 동안일 수도 있는 노년기, 다만 늙었다는 이유로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고 여긴다면 그건 삶에 대한 모독이다. 아무것도 안 일어나는 삶에서 소설이 나올 수는 없다.-212쪽

사람이 살다 보면 이까짓 세상에 왜 태어났을까 싶게 삶이 비루하고 속악하고 치사하게 느껴질 때가 부지기수로 많다. 이 나이까지 견디어온 그런 고비고비를 생각하면 먹은 나이가 한없이 누추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삶은 누추하기도 하지만 오묘한 것이기도 하여, 살다 보면 아주 하찮은 것에서 큰 기쁨,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 싶은 순간과 만나질 때도 있는 것이다.-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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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노블이 벌써 1주년이 되었다고 한다.

기념차 나비노블에서 지금까지 나온 책들을 정리해봤다.

(13/11/27 현재 예약중인 책 2종까지 도합 13권.)

 

 

 

 

 

 

 

 

 

 

 

 

 

 

 

 

<여라의 잿빛 늑대>. 나비노블 초기작이지만 출간되었던 <타임리스 타임>이 4권까지 발매된 것에 비하면 뒷권이 감감 무소식...ㅠㅠ 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듯. 2014년에는 뒷권을 만나볼 수 있을까.

 

 

 

 

 

 

 

 

 

 

 

 

 

 

 

 

 

 

 

 

 

 

 

 

 

 

 

 

 

 

<타임리스 타임>. <낙신부>, <메르헨>, <에튀드> 등을 출간하신 박미정 작가님의 현대 판타지 소설이다. 시간계 사신 이안,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죽게 된 스무 살 여성 유진이 인간 아닌 종속망량으로서 이안과 함께하며 사건들이 벌어지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1~4권까지 출간되었고 2014년에도 다음권이 쭉 발매되어주길 기대하고 있는 작품.

 

 

 

 

 

 

 

 

 

 

 

 

 

 

 

 

 

 

 

 

 

 

 

 

 

 

 

 

 

<병아리>. <러브리스> 등을 출간하신 권새나 작가님의 판타지 소설이다. 봄과 겨울 형제가 이세계로 넘어가는 이세계 트립물이며, 겨울이 소녀가 되는 TS물. 취향 퍽 타게 생겼지만.. 웹연재 당시 읽어보니 너무 재미있어서!! 손 안 댔던 전작 러브리스까지 읽게 되었던 작품이다. 4권은 12월 발매로 현재 예약중(당연히 주문한 상태). <타임리스 타임>과 함께 신간이 나올 때마다 꼬박꼬박 구매하고 있는 나비노블 최고 기대작 중 하나.

 

 

 

 

 

 

 

 

 

 

 

 

 

 

 

<메마른 빛, 이슬 한 방울>. 2권이 발매되었을 때 1~2권 표지가 이어지는 센스에 감탄했지만! ....아쉽게도 미묘하게 취향이 아니었던 작품. 조아라 프리미엄 연재 당시부터 앞부분은 몇 번 읽으며 이북을 살까말까, 고민했는데... 마침 나비노블에서 종이책이 나와주어서 1권을 읽었지만, 여전히 결정적인 뭔가가 부족해서;; 갸우뚱 하고 있다.

 

 

 

 

 

 

 

 

 

 

 

 

 

 

 

 

2013년 마지막 나비노블 발매작 <카르페디엠>. 추억의 프린세스 메이커를 떠올리게 하는 흥미로운 소재와 미려한 일러스트다. 현재 나비노블 1주년을 맞이하여 나비노블 두 권 이상 주문시 카르페디엠 포스트잇을 주는 이벤트를 하는데...보고 싶은 작품을 쌓아두기보다 나오자마자 꼬박꼬박 주문해와서 두 권 사기가 애매하다.

 

나비노블 작품들은 웹연재 당시 접한 것들이 대부분이라, 완전히 처음 보는 작가+처음 보는 내용..! 하고 구입을 고민하게 되는 일은 없는 것 같다. 웹연재 때 책 나오면 꼭 삽니다! 였거나 읽어보고 손 안 간다...; 하고 갈렸기 때문에 책 구입 여부를 두고 고민한 건 웹연재 공개분이 짧은 <메마른 빛, 이슬 한 방울> 밖에 없었던 듯.

 

나비노블 1주년을 축하하며, 오래오래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와주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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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으로 시작하는 스무 살
차병직 지음 / 홍익 / 2012년 6월
절판


'책을 읽을 때는 끊임없이 의심하라.'

모처럼 한 권의 책을 읽고 흐뭇해하며 책이 지시하는 내용을 그대로 믿는 것은, 우연히 본 텔레비전에서 좋다고 방송한 식품을 우격다짐으로 먹고 질병이 치유되기를 바라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어리석은 태도다. 그리고 책의 저자도 대학의 교수이거나 그와 비슷한 수준의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테마의 책을 여러 권 찾아 읽어라'고 한다. 사회과학이든 자연과학이든 또는 인문학이든, 전문지식이나 상식이란 것은 어떤 객관적 진리 그 자체가 아니다. 아무리 전문 분야의 정설이라 하더라도 깊이 들어가면 거기엔 학설의 대립이나 의견의 충돌이 존재한다. 지식이란 진실이 아니라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요 측면이다. 저자를 믿고 의지할 것이 아니라, 저자의 의견을 참고하여 스스로 판단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다치바나 다카시-26쪽

이렇게 출발한 비코의 결론을 아주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은 알 수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직접 만든 것은 그 근원까지 따지고 들어갈 수 있기에 철저히 알 수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스스로 만든 것을 '원인에 의한' 지식이라 불렀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 수학을 꼽았다. 비코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기하학을 증명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세계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세계를 완전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로지코믹스> 랜덤하우스-172쪽

<일상이 아름다운 음악>이란 책이 있다. 100페이지가 조금 넘는 작은 책자로, 84곡의 음악을 선곡하여 간단한 해설을 붙인 것이다. 이 책에는 부록이 있는데, 바로 84곡을 모두 담은 CD 14장이다.
...
"덜 깬 잠을 음악으로 적셔 깨어날 수 있다면, 깨어남은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음악을 통해 하루의 피로를 생명의 활력으로 뒤바꿀 수 있다면 시간은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커튼처럼 드리워진 음악이 인생의 의미를 속살거리는 그 속으로 잠들 수 있다면, 잠과 꿈은 얼마나 안온할 것인가."

<논어> 홍익출판사-210쪽

이야기로 읽든 역사로 읽든 <로마제국 쇠망사>는 독자의 도전 의욕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 방대한 양이 의욕을 사그라들게도 한다. 그런 경우에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우선 여섯 권의 완역본 중에서 3권이나 4권까지만 읽는 방법이다. 동로마제국에 관한 후반부 1000년이 그리도 궁금하다면, 요약본도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 <그림과 함께 읽는 로마제국 쇠망사>(청미래)다. 최근에는 번역가 이종인이 직접 축약한 <로마제국 쇠망사>(책과함께)도 나왔다.-234쪽

역사를 읽는 것이 재미있는 것은 그것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마치 소설이 이야기인 것처럼. 구체적인 이야기일수록 과거를 촬영한 다큐멘터리 필름같이 흥미롭다. 하지만 그 과거의 사실은 역사가의 해석에 따라 성격이 달라진다. 해석은 세 단계에 걸쳐 이루어진다. 사실의 선택, 기술, 결론의 단계에서 해석이 끼어든다.(……) 관심 있는 역사의 독자는 자신이 지닌 비판의 눈을 감지 않고 역사책을 읽기 때문이다. 역사는 역사가의 창조물이고, 독자는 자기 방식으로 읽으면서 재창조한다.-234쪽

역사를 해석하거나 읽을 때 미래지향적 목적성도 빠뜨릴 수 없는 요소이다. 카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강조하듯, 과거를 통해 지금의 우리가 있고 동시에 그것은 미래로 향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매번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하면서도, 과거를 보면 미래를 알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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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황후
박승현 / 북스(VOOXS)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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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혹은 대한제국의 황후라고 하면 으레 떠오르는 것은 명성황후이다.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을 밀어내고 지아비 고종과 함께 권력을 차지하여, 쇄국을 끝내고 개화하며 격동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조선을 지키고자 하였으나, 이웃나라 정치가들의 비인간적인 판단과 그를 실행한 무도한 낭인들의 검에 의해 살해당한 비운의 여인.

 

마지막 황후는 그 명성황후의 아들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 윤씨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다. 훗날의 순정효황후, 막 어머니를 잃은 열세 살 소녀 증순은 권력을 노리는 백부 윤덕영과 빚투성이 망나니인 부친 윤택영에 의해 팔리듯이 황태자비가 된다.

 

당당한 증순에게서 명성황후를 연상하여 기를 꺾고자 하는 이토 히로부미와 그 뜻을 받아 움직이는 상궁들. 이미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한일합방이 눈앞에 있는, 바람 앞 등불 같은 처지의 왕실에서 새 황태자비는 전혀 존중받지 못한다. 아군이라고는 증순과 기묘한 인연을 맺게 되어 시종무관으로 함께 궁에 들어오게 된 나석중, 힘없는 일개 나인이지만 최선을 다하여 증순을 돕는 나인 성옥염 뿐.

 

"나, 나도 훌륭한 왕이 되고 싶었소. 하, 하지만 그때는 이미 국운이 쇠잔할 대로 쇠잔하였소."

"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욕을 참고 왕실을 보, 보존하는 것 뿐이었소. 일본으로부터, 친일파로부터, 왕실을 잊어 가는 백성들로부터 온갖 모욕을 참으며 나무처럼…… 뿌리를 깊이 내린 채 겨울을 견디는 나무처럼 그렇게……." - p.294

 

사실 읽다 보면 비중 자체는 석중이 더 많지만^^; 마지막 황제로서 옅은 족적을 남긴 황태자 이척도 인상적이다. 순종은 윤덕영에 대한 반감으로 증순을 아내로 받아들이지 않고 싸늘하게 대하였지만, 증순이 생명의 위협에 처하자 발빠른 행동력을 보였다. 겉으로는 냉대했지만, 순종은 증순을 소중하게 여겼다. 그러나 소중한 것을 지키지 못하고 늘 빼앗겨 왔기에, 황후마저 빼앗길까 두려워 마음을 드러내지 못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이윽고 서로에게 차근히 마음을 열어간다. 망국의 왕이란, 얼마나 서글픈 존재인지. 없어진 나라의 그림자 속, 한때는 그 나라 자체였던 사람 역시 말라죽어갔던 것이다. 그럼에도 속에 맺힌 억울함과 분노마저 토해내지 못한 인생, 순종의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내가 보기에 당신은 공화정이란 이름의 새 왕국을 세우려는 것 같군요. 웬만하면 그만두세요. 사욕으로 세워진 왕조가 얼마나 가겠어요?" - p.284

 

단편적으로, 그러나 무시할 수 없는 비중으로 등장하는 이승만. 실제로 대한민국의 첫 번째 대통령이며 왕실과의 관계에서도 뗄래야 뗄 수 없는 그는, 극렬 공화주의자이지만 공화국의 탈을 쓴 자신의 왕국을 꿈꾼다.

석중은 승만을 스승으로 모시고 어버이처럼 따랐으며 그에 의해 승만과 증순 사이에도 교류가 있었지만, 승만과 증순은 결국 결별하게 되고 잊혀진 황후 증순과 달리 화려한 권좌에 오른 승만은 이후 자신의 욕심을 위해 증순의 목숨을 노리기까지 하는 관계가 된다.

 

"사람들이 또 강물이 되어 흐르는구나. 나는 저 도저한 물결을 예전에도 본 적이 있다. 누군가가 총을 쏘고, 누군가가 피를 흘려도 저 푸른 물결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 p.326

 

되새겨보니 그녀야말로 시대의 격동을 겪으며 굴곡어린 인생을 살아왔다. 조선왕조가 종지부를 찍고 치욕의 시간을 지나 이윽고 해방, 그리고 전쟁, 혁명에 이르기까지……. 이름은 화려한 황후였지만 인고의 삶이었다. 눈물어린 세월의 그림자 속, 이러한 사람도 이러한 인생도 있었구나 하고 새삼 되새겨 본다.

 

/131120 읽고 131121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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