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집
박완서 지음, 이철원 그림 / 열림원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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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놀랍고 아름다운 까닭은 목련이 쑥잎을 깔보지 않고, 도토리나무가 밤나무한테 주눅 들지 않고, 오직 타고난 천성을 완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데 있지 않을까.-132쪽

할아버지는 왜 그렇게 나를 애지중지하셨을까. 그 생각만 하면 자신이 소중해진다. 그분이 사랑한 나의 좋은 점이 내 안에 지금도 살아 숨 쉬는 것처럼. 그건 삶이 비루해지려는 고비마다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 되었다. 우리가 여행을 할 때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아마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는 소리일 것이다. 그러면서 자꾸자꾸 사진을 찍어대듯이 사람이 한세상 살고 나서 남길 수 있는 게 사랑밖에 없다면 자꾸자꾸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 -136쪽

기 살리기와 응석받이를 혼동하지 말았으면 한다. 덮어놓고 집을 나가 거리를 떠돈다는 것은 일종의 응석이다. 성인이라면 이 어려운 때 누가 누구에게 기대고 떠맡기는 식의 응석은 부리지 말아야 한다. 기는 소통이 돼야 비로소 살아 있는 기고, 소통이란 일방적인 게 아니라 상호적인 것이다. 가장 힘들 때 그 고통의 현장에 부재不在하려는 남편들의 가출을 너무 동정하지 말았으면 싶다. 동정과 격려를 받아야 할 사람은 졸지에 생활고와 남편의 행방을 몰라 애간장이 마르는 이중고를 겪는 아내들이다.-141쪽

시간, 지는 형체도 마디도 없으면서 우리 몸엔 어김없이 마디를 긋고 지나가는구나.-193쪽

노욕도 가지가지라고 웃어넘겼지만 지지리도 못사는 시절을 겪었던 늙은이들에겐 물질적 풍요가 전적으로 대견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어쩌면 이렇게 잘살게 되었을까, 휘황한 겉보기가 꿈만 같으면서도 아직 돈 벌 나이가 안 된 미성년의 씀씀이나, 도처에서 지천으로 낭비되고 버려지는 음식이나 입성을 보고 있으면 문득 하늘 무서운 생각까지 들 적이 있다. 풍요의 그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통으로 겨우겨우 사는 사람도 잘 상상이 안 되는 극빈지대에 버림받은 청소년, 어린이, 노약자, 장애인이 도움을 호소하는 소리를 매스컴을 통해 듣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다.-205쪽

내가 죽도록 현역작가이고 싶은 것은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노년기 또한 삶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삶의 가장 긴 동안일 수도 있는 노년기, 다만 늙었다는 이유로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고 여긴다면 그건 삶에 대한 모독이다. 아무것도 안 일어나는 삶에서 소설이 나올 수는 없다.-212쪽

사람이 살다 보면 이까짓 세상에 왜 태어났을까 싶게 삶이 비루하고 속악하고 치사하게 느껴질 때가 부지기수로 많다. 이 나이까지 견디어온 그런 고비고비를 생각하면 먹은 나이가 한없이 누추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삶은 누추하기도 하지만 오묘한 것이기도 하여, 살다 보면 아주 하찮은 것에서 큰 기쁨,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 싶은 순간과 만나질 때도 있는 것이다.-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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