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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꿀벌과 천둥
온다 리쿠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8월
평점 :
나오키상과 서점대상을 동시에 수상한 작품답게 국내 출판 전부터 알고 있던 (표지만 스쳐간 것에 가깝지만) 온다 리쿠의 신작. 믿고 보는 작가에, 피아노라는 소재도 흥미로워서 전자책 발매소식을 듣고 반갑게 구매했습니다.
'천재 소년 피아니스트'의 등장 외에 가능한 한 사전정보를 얻지 않으려 노력하며 클릭한 책은, 그런 결정을 후회하지 않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개인적으로 온다 리쿠의 작품들은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흡입력을 느끼곤 하는데 이 책도 마찬가지여서, '역시 온다 리쿠'라는 감탄사가 나오더군요. 소설을 읽기 시작할 때만 해도 곳곳에서 드문드문 고개를 내미는 곡들을 찾아서 들으면서 읽을까, 라고 생각했지만, 읽다보니 곡을 찾고 들으며 멈춰서는 시간조차 아깝게 느껴져 정신없이 다음 장을 넘기며 활자 속의 음악을 한껏 즐겼습니다.
※스포일러 주의
<벌꿀과 천둥>은 목차만 봐도 짐작할 수 있듯, '요시가에 피아노 콩쿠르'를 예선부터 본선까지 이어갑니다. 콩쿠르의 주역이라고 할 만한 캐릭터는 넷, 현실과 타협했으나 다시금 꿈을 쫓는 한 걸음을 내디딘 가구점 점원 다카시마 아카시, 천재적이면서도 계산적이기까지 한 줄리어드의 유명인 마사루 카를로스 레비 아나톨, 어머니를 잃고 한 번 피아노로부터 멀어졌지만 다시금 무대에 오르게 된 에이덴 아야, 저명한 피아니스트의 제자이지만 제대로 된 경력 없이 오로지 충격적이라는 말로 갈음될 피아노 연주를 내보인 가자마 진.
읽는 것은 분명 글자인데, 이들을 비롯한 참가자들의 연주 장면들에서는 마치 피아노 연주를 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아는 곡은 멜로디를 떠올리며, 모르는 곡은 멜로디를 상상하며 눈과 (마음 속의) 귀가 함께 즐거운 독서 시간이었습니다. 온다 리쿠를 좋아한다면, 피아노를 좋아한다면, 꼭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은 소설입니다.
읽으면서 처음 마음이 간 건 에이덴 아야였습니다. 신동 속의 천재로 승승장구하던 소녀가 딸이자 연주자로서 소중한 지지자이자 비호자이던 어머니를 잃고 무대 밖으로 도망치게 된 것은 안타까웠고, 결국 피아노 앞에 다시 앉게 된 것은 반가웠고, 썩 달갑지 않으면서도 콩쿠르 출장을 결심하자 기대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까맣게 잊고 있던 옛 소꿉친구와의 재회와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게 만드는 천재와의 만남, 그로 인해 무섭도록 진화해 가는 모습은 경이적이었지요. 특이하다고 하면 가자마 진이겠지만, 피아니스트이면서 한 때는 피아니스트가 아니었던, 그럼에도 천재인 에이덴 아야의 개인 서사는 <꿀벌과 천둥> 속에서 제일 짙게 마음을 끌어당겼습니다.
반대로 가자마 진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장면장면이 쌓여 시선을 떼놓을 수 없다고 할까, 갈수록 마음이 갔습니다. 처음 그를 격렬하게 거부하던 심사위원이 끝에는 그를 향한 기대를 감추지 않은 것과 비슷한 심정일까요. 저명한 피아니스트의 제자이지만, 음악계 밖에서 자라난 또 한 명의 천재 피아니스트. 자신의 피아노조차 갖지 못하고 유랑하는 아버지를 따라다니는, 그 어떤 참가자들과도 다른 이질적인 환경이 오히려 빛나게 한 재능은 눈부십니다. 솟구치는 충동에 피아노 곁으로 무작정 돌진하는 모습이나 피아노 대회 중에 꽃꽂이에 열중하는 엉뚱함은 콩쿠르를 기점으로 피아노 연주가로서의 두 번째 발걸음을 내디디게 된 그가 과연 어떤 피아니스트가 될지 기대하게 됩니다. '음악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꿈을 그는 과연 이룰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이루게 될까요? 앞날이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전혀 예상이 되지 않는 가자마 진, 그리고 그와 함께하며 재능을 개화시킨 이들과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현실과 타협하여 악기점 점원이 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를 얻고 다시금 꿈에 도전하게 된 다카시마 아카시의 실력은 평범하지 않지만 한 번 떠났던 꿈에게 돌아간다는 구도는 흔하지만 따뜻한 울림을 느끼게 합니다. 자신의 지나간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말하듯, 비록 끝까지 남진 못해도 작곡가 연주상을 거머쥔 모습이 강렬했습니다. 에이덴 아야나 카자마 진처럼 첫눈에 번쩍이진 않아도, 그는 나름으로 빛나겠지요.
사실 넷 중에 작중 무게로 무시할 수 없지만 신기할 정도로 응원하고픈 생각이 들지 않는 캐릭터도 있었습니다. 에이덴 아야나 가자마 진과 닮은 천재이면서도 철저하게 계산적인, 천재인데도 왠지 지나치게 자유로운 천재 둘과 함께 놓고 보면 수재 타입인가? 싶은 마사루 카를로스 레비 아나톨입니다. 그라고 해서 늘 이기는 인생을 살아온 것은 아닙니다만, 괴로워서 피아노로부터 도망쳤던 에이덴 아야의 좌절, 자유가 곧 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 있는 가자마 진과 달리 지나치게 약점이 보이지 않아서일까요. 그의 연주 장면 역시 멋졌지만, 이미 다른 두 천재에게 마음을 빼앗긴 독자에게 그까지 담을 자리가 없어서일까요.
유튜브에 원제 '蜜蜂と遠雷'로 검색해보니 작중 곡들을 정리한 플레이리스트가 여럿 나와서, 이번에는 상상만이 아닌 실제 음악과 함께 <꿀벌과 천둥>을 곱씹어 보려 합니다. 아마 허겁지겁 읽어내린 지금 이 순간의 감상과 두 번째 읽은 후의 감상은 또 다르지 않을까, 연주 장면들과 곡들이 어찌 다가올까, 기대됩니다.
음악이 달려간다. 이 축복받은 세상 속에서 한 사람의 음악이, 하나의 음악이, 고요한 아침을 가르며 바람처럼 멀어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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