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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의 비극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아영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6월
평점 :
다카노 가즈아키의 2003년 작이다. 2013년 한국에 번역 출판되었으나, 실제로는 십 년 전 소설이다.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그렇잖으면 사전에 책 정보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탓이었을까. <13계단>으로 좋은 인상을 받았던 다카노 가즈아키의 책임에도 불구하고 책장을 덮는 순간의 감상은 만족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눈 오는 날, 신사에서 고양이의 출산 장면을 함께 지켜보는 소녀들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리고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소녀 중 한 명 가나미는 나쓰키 슈헤이의 아내가 되어 있다. 작가로서 성공을 거둔 슈헤이는 낡은 아파트에서 새 맨션으로 이사를 가려는 참이다. 화려한 연회를 치른 날 밤, 나쓰미는 슈헤이의 아이를 잉태한다.
젊은 부부에게 찾아온 어린 생명은, 그러나 환영받지 못한다. 슈헤이의 성공은 단발적인 것일 뿐, 맨션 대출금 상환 등 당장 생활비를 걱정해야 할 이들 부부에게 '아이를 키우는 것'은 사치였기 때문에. '생활을 위해', 슈헤이는 중절 수술을 결정했고 가나미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정작 중절을 위해 오른 수술대 위에서 가나미는 기절하고, 그녀는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하는데……. 슈헤이는 가나미의 빙의 현상을 오컬트적으로 받아들이고, 담당 의사 이소가이는 정신병리학적으로 환자 가나미의 증상을 분석하며 치유하려 노력한다.
한 마디로, 추리소설을 생각하며 집어들었는데 공포소설이었다. <KN의 비극>을 펼쳐든 시간이 저녁인 것도 더해 그저 오싹해하며 끝을 궁금해했다. 결말까지 보고 나니 무서움도 덜해졌고, KN이라는 두 사람과 주제에 얽힌 메시지들도 눈에 들어왔지만…… 그럼에도 부족하다. 아쉽다.
※스포일러 주의
약물로 인해 상태가 바뀌어 버리는 인간의 마음이란 대체 무언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신경 세포라는 단백질과 그 사이를 흐르는 전기 신호와 화학 물질 간의 관계밖에 안 되는 걸까? 현대 정신 의학이 내린 답은 '예'였다. 뇌라는 물질이 사라지면 인간의 정신도 소멸한다. 사후에 잔존한다는 영혼 따위가 존재할 여지는 없다. 정신 활동은 전부 물질의 상호 작용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소가이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도다 마이코 때문에 번민하고 있는 것도, 나쓰키 가나미를 구하려 하는 것도, 아기를 낳으려다 죽어 버린 나카무라 구미에 동정을 느끼는 것도 전부 물리·화학 반응이 만들어 낸 환영에 지나지 않았다. 결코 바깥 세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자신의 마음속에서만 일렁이는 물결이었다. - p.249
"한 여성을 계속 좋아한다는 건 붕 뜬 감정뿐만이 아니라 때로는 의지력도 필요하더군요. 그걸 뼈저리게 알게 됐어요."
(……) 그때 슈헤이는 자신의 정신에 깔린 심연을 깨달았을 터였다. 이성을 향한 사랑이 정반대의 감정과 표리일체라는 사실을. 그것도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그게 너무나도 쉽게 뒤집힐 수 있다는 사실을. 이소가이는 슈헤이와 가나미를 번갈아 보며 이 젊은 부부는 죽는 날까지 함께 하겠거니 생각했다. 자기 자신의 그림자에서 눈을 돌리는 사람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었다. - p.3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