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엮다 오늘의 일본문학 11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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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는, 문득 사전을 펼쳐보고 싶어졌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고, 누군가와 서로 통하기 위해서 모든 말이 있는 것이다.'

서점대상을 수상한 미우라 시온 작가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이 <배를 엮다>를 썼다고 한다.

 

가볍고 편리했던 전자사전은 물론이고, 스마트폰이 사전 역할을 하게 된 뒤로, 종이사전을 본 지 참 오래되었다. 실제로, 단어를 찾을 때면 굳이 사전을 들기보다 눈앞의 검색창에 단어를 입력한다. 사전 여러 개의 뜻풀이는 물론이고 - 국어사전부터 백과사전류까지 - 실제로 그 단어를 쓴 문장들이 검색되니, 참 편리했다. 그렇게 내 생활에서 굳이 '사전'을 찾을 이유가 사라지는가 싶었다.

 

"사전은 말의 바다를 건너는 배야."

아라키는 혼을 토로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사람은 사전이라는 배를 타고 어두운 바다 위에 떠오르는 작은 빛을 모으지. 더 어울리는 말로 누군가에게 정확히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만약 사전이 없었다면 우리는 드넓고 망막한 바다를 앞에 두고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을 거야."

"바다를 건너는 데 어울리는 배를 엮다. 그런 생각을 담아 아라키 씨와 내가 이름을 지었죠."

마쓰모토 선생이 조용히 말했다. - p.36

 

어릴 때부터 사전에 흥미를 가진 아라키 고헤이는 정년퇴직을 하게 되면서 사전편집부를 떠나게 된다. 특수한 분야인 사전 편집 작업에서 요구되는, "인내심 강하고, 곰꼼한 작업을 두려워하지 않고, 언어에 탐닉하면서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넓은 시야도 함께 가진" 젊은이를 찾던 아라키는 사전편집부의 니시오카에게 마지메 미쓰야라는 직원을 추천받는다.

 

마지메는 엉뚱하게 보이지만, 그건 너무 성실한 것 뿐이다. 사전편집부에 금세 익숙해진 그는, 하숙집 할머니의 손녀 가구야와 만나 짝사랑하게 된다. 편집자로서 그를 이끄는 아라키, 마지메의 등을 밀어 주는 동료 니시오카, '사전 만들기에 방해가 될지 안 될지를 기준으로' 연애를 이야기하는 마쓰모토 선생님. 마지메의, 마지메다운 성실한(마지메) 고백. 그의 연애편지는 니시오카와 기시베 뿐만 아니라 독자인 나에게도 웃음을 선사했다.

 

마지메가 오고 회사의 결정에 따라 사전편집부를 떠나게 된 니시오카는 스스로를 '어떤 것에도 그리 빠져들지 못하고, 일은 무난히 하고 있지만 바람직한 평가는 얻지 못하고, 늘 타인과 능력을 비교하며 초조해했다(p.143)' 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이것밖에 없다고 작정하고 한 가지 일에만 매달리는(p.152)', 사전에 매료된 마지메나 아라키, 마쓰모토 선생을 보면서 신기해하고 한편으로는 부러워한다. 그리고는 자신은 다른 방향으로- '중요한 것은 좋은 사전을 완성하는 일이다. 모든 것을 걸어 사전을 만들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회사 동료로서 혼신의 힘을 다해 서포트 할 수 있는가, 이다.(p.179)' 마음을 다잡는다. '누군가의 열정에는 열정으로 응할 것.' 니시오카는 그 나름대로 그의 재능을 살린 그의 길을 찾은 것이다.

 

329페이지의 이야기 중에서 187페이지까지는 마지메가 사전편집부에 들어오면서, 그리고 188페이지부터는 세월이 흘러 기시베 미도리라는 뉴페이스가 사전편집부에 들어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괴짜'이며 그야말로 사전을 만들 인재였던 마지메와 달리 '평범한' 기시베.

 

마지메가 사전편집부에서 아라키의 자리를 이어받아 '<대도해>를 계속 만들어나가기 위한 과정에서' 위기를 맞았다면, 기시베는 장장 13년간 꾸준히 준비해 온 '<대도해>를 실제로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위기를 맞이한다. <대도해>에 어울리는 종이를 고르고, 수많은 사람들이 교정지를 확인하고, 오류를 발견한 탓에 전체를 재점검하기 위해 모두가 합숙까지 해가며 매달리고….

 

마지메 씨는 말에 얽힌 불안과 희망을 실감하기 때문에 더욱 말이 가득 채워진 사전을 열심히 만들려고 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나도 사전편집부에서 잘해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도 되도록 불안을 떨치는 방법을 알고 싶다. 가능하다면 마지메 씨와 서로 말도 통하고, 기분 좋게 회사 생활을 하고 싶다.

많은 말을 가능한 한 정확히 모으는 것은 일그러짐이 적은 거울을 손에 넣는 것이다. 일그러짐이 적으면 적을수록 거기에 마음을 비추어 상대에게 내밀 때, 기분이나 생각이 깊고 또렷하게 전해진다. 함께 거울을 들여다보며 웃고 울고 화를 낼 수 있다.

사전을 만든다는 건 의외로 즐겁고 소중한 일일지도 모른다. - p.236

 

사전을 만들면서 말과 진심으로 마주서게 되고서야 나는 조금 달라진 느낌이 든다. 기시베는 그렇게 생각했다. 말이 갖는 힘. 상처 입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지키고 누군가에게 전하고 누군가와 이어지기 위한 힘을 자각하게 된 뒤로, 자신의 마음을 탐색하고 주위 사람의 기분과 생각을 주의 깊게 헤아리려 애쓰게 됐다.

기시베는 《대도해》편찬을 통해 말이라는 새로운 무기를 진실한 의미로 손에 넣으려 하고 있는 참이었다. - p.258

 

니시오카가 사전을 만드는 사람을 만나 변화했듯이, 기시베 역시 사전과 마주하며 변해간다. 사전편집부를 만나 사전을 만들어가면서 "뭔가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말이 필요하다(p.271)" 성장해 가는 그녀의 모습이 눈부시다.

 

말의 바다란 얼마나 넓고 깊은가. 그리고 '사전'이 그 말의 바다 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가. 그 사전을 만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의 말의 바다를 향해 도전하는가. 무심하게 스쳐 지나갔던 사전이 이젠 새로운 눈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사전 한 권을 펴내는데, 그리고 그 사전을 이어 '개정판'으로 내보이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까. 사전을 볼 때마다 <배를 엮다>와 사전편집부 사람들, 그리고 실제로 사전을 만드는 이들을 생각해낼 것 같다.

 

책 한 권이 인생을 바꾼다고 한다. 적어도 이 책은, 나와 사전 사이의 관계는 확실히 바꾸었다.

 

 

 

+ "말은, 말을 낳는 마음은 권위나 권력과는 전혀 무연한 자유로운 것입니다. 또 그래야 합니다. 자유로운 항해를 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엮은 배. 《대도해》가 그런 사전이 되도록 계속해서 마음을 다잡고 마무리해 나갑시다." - p.288

 

+ 영화화되었고, <행복한 사전>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도 개봉되었다. <대도해>와 <대도해>를 만드는 이들을 영상으로 만나볼 수 있다니,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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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영, 이리리 두 작가님의 합작소설 <영원의 미로>.

겉은 여대생이지만 속은 전생하며 겪은 경험 때문에 팔십 먹은 노파 같다는 소리를 듣는 여주, 김은혜. 끝없이 계속되는 생, '영원의 미로' 속을 걷던 그녀는 김진호를 만났다. 모터쇼에서 한 번, 친구들과 한 번, 소개팅 대타로 한 번... 우연 끝에 그들은 교제하게 되지만, 교생실습을 나간 은혜 앞에는 어쩐지 꺼림칙한 남자, 준혁이 나타난다.

 

왜 그렇게 울었을까? 왜 그렇게 당장이라도 숨이 멎을 것처럼 답답했더라? 무엇 때문에 미친 사람처럼 전생을 찾아봤었지?

지금 그녀가 딛고 있는 현실은 김은혜로서의 현실, 이건데.

- 여보세요?

"듣고 있어요."

그녀는 김은혜다. - 2권/p.20

 

전생을 기억하지만, 그 전생의 누군가가 아닌 현실의 자신으로 살고자 하는 여주.

그리고, 그녀를 김은혜라는 현실로 고정시켜주는 남자, 진호.

 

"은혜 씨와 달리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전생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거든요. 내가 사랑했고, 그래서 생명을 바쳐서라도 구하려던 여자와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함께 태어나 만나고, 알아보고, 또 그 전생까지 기억해낸 게 정말 우연일 수 있을까요?" - 2권/p.42

 

한편, 전생의 인연으로 그녀에게 집착하는 남자, 준혁.

 

 

전생의 인연, 그리고 현생의 인연. 전생 요소가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어디까지나 주인공들은 현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못박는 듯한 엔딩이었다. 전생을 다루지만, 전생에는 빠져들지 않는다고 할까... 책장을 넘기는 동안, 그 절묘함에 감탄했다.

신해영 작가님께서 집착남 준혁의 한을 풀어줄 '영원의 사슬'을 준비중이시라고 하니 그 이야기도 기대된다. 잘난 남주다운 반전은...사실 조금 응? 하기도 했지만.^^; 현실적인 해결책 같기도 하고... 결국 저런 수단에 대항할 수 있는 건 같은 수단 뿐인건가. 하고 아쉽기도 했다.

어쨌든,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게 되어 기쁘다. 두 작가님 모두 아직 <영원의 미로> 이후 신작은 없으신 것 같은데, 이 두 분의 다른 이야기도 읽어보고 싶다.

 

 

+ 전생 하면 떠오르는 정지원 작가님의 <인연>. 결말은 사뭇 다르고 분위기도 달라서 <영원의 미로>와 <인연>을 함께 말하는 것은 전생이라는 소재가 같다는 점 뿐이다. 어쨌든 둘 다, 좋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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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포도 2014-03-19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영혼의 과학적 증명에 대한 관심이 강하게 생기는것 같습니다. 영혼의 과학적 증명을 검색해 보십시오.
 

 

 

 

 

 

 

 

 

 

 

 

 

 

 

 

 

 

 

 

 

 

 

 

 

 

 

 

역관과 퇴기의 딸로 빚에 시달려 청나라 사람에게 팔려갈 위기에 놓이기까지 한 소녀 해인. 1902년, 열여섯 소녀는 홍기준과 성주호를 만난다. 우연이 겹쳐, 해인은 친일파 성기엽 대감의 둘째아들 주호와 그 집사 기준이 만들고 있는 '비차'를 보고, 그들과 운명을 함께하게 된다.

 

임진왜란 때 정평구는 왜인에 맞서 싸운 진주성 안에서 '하늘을 나는 수레'를 만들었다.

러일전쟁이 일어날 즈음에, 홍기준과 성주호는 '비차'를 만들었다.

 

국권침탈기와 해방 사이의 그 시대를 보면 언제나 느끼듯이, 아픈 시대라 책장을 넘기면서 마음 한 켠은 언제나 불편하다. 책장이 넘어가는 속도가 유달리 느린 두 권이었다.

활자 사이로 하늘을, 비차를 상상했다. 그 막막하던 시대, 눈물이 흐르는 땅에서 눈물나도록 새파란 하늘을 꿈꾼 자들. 그리고 그 하늘로 가는 비차를 만드는 두 남자의, 복잡미묘한 관계와 그 사이에 뛰어든 소녀 해인, 하늘로 날아오르지만 결국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있기에 슬픈 그들. 드라마로 나온다는데, 드물게 소설을 읽고 영상으로 보고 싶어진 작품이다. /14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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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의 꿈 푸른숲 역사 동화 5
배유안 지음, 허구 그림, 전국초등사회교과 모임 감수 / 푸른숲주니어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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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의 꿈>. 푸른숲 역사동화 시리즈이기에 집어든 책이다. 제목에서 반쯤 짐작하였듯, 신라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통일신라시대가 되기 전, 삼국시대 말엽, 신라가 가장 치열하던 시절. 선덕여왕과 김유신과 김춘추, 봄의 영광을 꿈꾸며 겨울의 참혹함을 견뎌내야 했던, 전쟁이 끝없이 이어지는 그 시간.

전쟁이 벌어진다 하여 모든 이들이 전쟁터에 나가 싸우지는 않지만, 모든 이들의 삶 속에 전쟁이 끼어들기는 한다. 전쟁으로 전사하여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과 상처입고 돌아오는 사람들, 더러는 공을 세워 이름을 드날리는 사람, 징발되는 물자와 사람들, 그리고 그 가족들…….

 

주인공 부소는 모전 공방에서 일하고 있는 말 없는 떠돌이 소년이다. 군사들을 보고 긴장하고, 춘추공을 보고 도망가는 그에게는 대체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부소는 김유신의 낭도인 아버지가 전사한 뒤 여덟 살 나이로 춘추공의 집에서 법민과 고타소를 돌보게 된다. 여덟 살 고타소, 여섯 살 법민과 친하게 지내고 춘추공의 집안일을 도우면서 자란 부소는 전쟁에 나가고 싶지 않아한다. 춘추공 댁 집사의 일을 돕거나 어머니가 하고 있는 모전(양털 따위의 털로 두툼하게 짠 양탄자) 공방 일을 흥미로워한다. '적군에게 아버지를 살해당한다'고 해서 모든 아들이 아버지의 원수에 불타올라 손에 검을 들고 적군을 향해 달려가는 선택을 하지는 않는 것이다.

 

"전쟁에서 어떻게 전사자나 부상자가 없기를 바라겠어?"

법민이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그러다 다시 결연한 모습이 되었다.

"어느 한쪽이 무너져야 끝날 싸움이야. 그게 신라여서는 안 되잖아. 그렇다면 이기는 수밖에 없어." - p.63

 

일장공성 만골고一將功成萬骨枯라는 말이 떠올랐다. 장수의 공명은 결국 병사의 희생이라는 것이다. 역사책에서 나열되는 것은 공을 세운 장수나 나라를 위해 개인을 바친 화랑 같은 이의 이름이지만, 그들 아래에도 분명 그들과 똑같이 생명을 지닌, 오히려 선택권조차 없었던 병사들이 있었다.

삼국통일은 신라에게 허망한 꿈이라기보다 생존을 위해 반드시 이뤄야 하는 목표였다. 춘추공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고, 그것은 우리의 위대한 역사다. 하지만 부소에게는 그 목표보다도 주변인의 목숨이 더 무겁고, 소중했다. 이것 또한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모두가 나라를 위해 기치를 내걸고 전장을 가로지르던 그 시대에도, 이런 삶의 방법 또한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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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신부 세트 - 전2권 그림자 신부
류다현 지음 / 파란(파란미디어)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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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아버지 위보형은 경요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네가 어떤 상단이나 상점과 거래를 하려 할 때 꼭 살펴야 할 일이 있다. 첫째는 아랫사람들이 우두머리가 공정하다고 여기는 가, 둘째는 자기 자신과 피붙이에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가, 마지막은 아랫사람에게 주어야 할 새경을 제날짜에 제대로 주고 있는가이다. 이중 가장 중요한 건 마지막이다."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찌 앞의 두 가지보다 마지막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윗사람이 공정하지 않아도 상단은 돌아간다. 또 윗사람이 자신과 피붙이에게 엄격하지 않아도 상단은 돌아간다. 그러나 아랫사람에게 주어야 할 새경을 제날짜에 주지 않는다면 그 상단은 절대로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그 힘든 일을 한다고 생각하느냐? 돈이다. 윗사람이야 그 돈이 없어도 호의호식하겠으나, 아랫사람에겐 자기의 목숨뿐만 아니라 가족의 목숨을 위해 꼭 필요한 돈이다. 주어야 할 새경을 제대로 주지 않으면서 어찌 공정함과 엄격함을 논할 수 있단 말이냐. 또한 앞의 두 가지는 판단하기 쉽지 않으나 마지막 것은 쉽게 알아볼 수 있지 않느냐."-1권 80쪽

"제 소원은 그림자 신부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
"한 사람만 희생하면 양국이 평안하다. 그것이 모든 이들의 생각입니다. 지금껏 그래 왔고요. 그럼 그 한 사람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저는 그런 화친 따윈 원하지 않습니다."
(……)
"아까 폐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인人은 인仁이라고요.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게 인仁이며, 아무리 하찮은 사람이라도 세상 전체와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다 믿고 사람을 대하는 게 인仁이라 배웠습니다. 그림자 신부라 부른다 하여 한 여인이 그림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인은 살아 있고 무언가를 바라는 인간입니다. 한 사람의 희생을 당연히 여기는데, 더 많은 사람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그것이 두렵고 싫습니다.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없는 존재로 만들고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것 말입니다. 폐하께서는 성군이십니다. 그런데 왜 폐하의 은택이 배우인 황후에게는 내리지 않는단 말입니까."-1권 192쪽

문득 준은 경요만 한 황후감을 과연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생각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어머니 단사황태후가 바라는 그런 황후감 아닌가. 강하고, 현명하고, 자신과 정사를 동등한 눈높이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식견과 경륜을 갖추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은애하는 여인이지. 이 황궁에서 원하는 오직 한 사람의 여인이지.'
하지만 그는 경요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1권 292쪽

"하나 단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겁니다. 힘의 균형이 연 쪽으로 넘어가 중원이 연의 차지가 된다 해도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그들은 농사짓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땅에 뿌리내리고, 집을 짓고, 농토를 가꾸며 사는 것을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땅에 대한 집착을 끝내 배우지 못할 겁니다. 그건 동물의 본성을 바꾸는 것만큼 힘든 일이지요. 청랑족들의 피에 사냥과 이동에 대한 본능이 숨어 있는 것처럼 단의 백성들의 피 속엔 땅에 대한 집착이 숨어 있습니다. 그들은 무언가를 키우지 못합니다. 풀들이 자라는 곳을 따라 초원을 이동하며 살지 그 풀을 키울 생각은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연의 군대는 중원에 폭풍처럼 불어닥치겠지요. 하나 한 계절 이상 부는 폭풍도 없으니……, 전투에서 지더라도 전쟁에서는 이기면 되는 겁니다."-2권 224쪽

"단은 지고 있는 해다. 하나 연은 떠오르는 태양이지. 언젠가 여능ㄴ 중원을 지배하게 된다. 그대는 떠오르는 해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야. 단처럼 늙어 가고 있는, 빛나는 옛 영광만을 붙잡고 사는 머리 굳은 이들이 그대 같은 여인을 품을 수 있을까?"
재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경요는 알았다.
경요는 대답했다.
"석양도 아름답습니다."
경요는 마음속으로 덧붙였다. 준과 함께 보는 석양이라면.
예상했던 거절이었다.
경요는 준과 함꼐 석양을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 석양을 가장 아름답게 불태우리라. 천천히 어둠이 내리게 하리라. 그게 그녀가 선택한 운명이었다.-2권 3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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