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피나드에 가시면 근사한 아가씨가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요? 왕자님이 왕자님이시든 아니시든 개의치 않고 사랑하는 강하고 똑똑한 아가씨가 말이죠." - 전나무와 매/p.350
<전나무와 매> 이후로 나온 아키에이지 연대기 작품 <상속자들>. 단편집의 희미한 기억이 남은 채 집어든 <상속자들> 두 권은, 일찍이 전민희 작가의 아룬드 연대기와 룬의 아이들 속으로 빠져들었듯 아키에이지 연대기 속으로 나를 빠져들게 했다.
도서관을 품은 위대한 도시, 델피나드에 한 자매가 찾아온다. 도서관 출입을 거부당하여 도서관의 비밀통로에 대해 이야기를 듣던 중 그것이 사기라는 것을 알게 되고, 소란 와중 동생 나나가 납치당한다. 언니 로사는 진과 타양, '그림자 매' 두 사람에게 동생을 찾아달라고 의뢰한다.
나나가 납치당해 있던 곳은 전쟁 영웅 니케포루스 장군의 저택이었다. 진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탈출한 나나와 함께 로사는 '그림자 매의 집'에서 식사를 만들어 주러 갔다 머무르며 위조 신분증으로 도서관을 찾아가게 된다. 누군가를 찾는 로사, 장기 연체자를 찾는 진. 한편 나나를 납치했던 이들과 함께하던 니케포루스 장군은 '그림자 매', 과거의 카론과 현재의 진에게 심상찮은 집착을 드러낸다.
"그 정도로는 안 돼. 철저한 굴욕을 줘야지. 잃을 것이 있다는 걸 알려줘야 해. 자신에게 지킬 것이 있음을 깨달으면 약한 자는 강해지지만 강한 자는 오히려 약해지는 거야. 그놈도 지금은 젊고 완전하겠지.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나도 한때는 그랬지만 내 명예는 한순간에 투기장 바닥에 처박혔어. 이제 그놈도 알게 될 거야. 그때의 내 기분을." - 상속자들 하/p.13
급기야 니케포루스 장군이 그림자 매의 집을 공격하여 공성전이 벌어지고, 로사와 진의 부하들이 싸우는 동안, 진은 진짜이자 첫 번째 '그림자 매' 카론 벤디게이트와 자신의 스승에 대해 알게 된다. 나나가 납치당하면서 시작된 로사와 니케포루스 장군 곁에서 암약하는 '싱의 유민'의 대립은, 니케포루스 장군과 한때 그를 패배시켰던 이름을 상속한 진의 대립으로 가시화된다. 축제를 만난 듯 들끓는 도시에서 치러지는 숙명의(?) 일대일 대결.
"솔직히 난 내가 최후의 생존자가 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 우리가 겪는 모든 희비극을 불멸의 언어로 바꿔놓는 것이야말로 시인의 임무가 아닌가. 하지만 남의 머리 뒤에 숨어 살아남은 대가리로 그런 짓을 해낸대서야 창피함을 못 견디고 자살하는 것 말고 다른 미래가 있겠나?" - 상속자들 하/p.235
그리고 유쾌한 입담으로 존재감을 드러낸 루키우스 퀸토. 그가 말하는 '싱의 비밀' 사건에서 싱보다 중요한 무언가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사건은 해결되었지만 앞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그 아래 묻혀 있던 것이 조금씩 드러나, <상속자들>을 읽고 <전나무와 매>를 다시금 읽으며 새롭게 보였던 것처럼 후속작을 읽고 <상속자들>을 읽으면 또 무언가 보이지 않을까, 그 기회가 조금 더 빨리 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 자이니 삼십 년이나 이름을 남기는 거지. 그런 이름이 한번 나타나면 뒤따르는 자들이 서로 가지려고 다투고, 어울리려 애쓰고, 해내지 못한 자는 밀려나고, 수없이 되풀이되어 마침내 진짜 상속자가 나타날 때까지 거르고 걸러진다. 그럴 가치가 있는 이름이니까. 좨주, 너희는 그런 이름을 알고 있나?" - 상속자들 상/p.77
왠지 <상속자들>이라는 제목이 떠오른 구절. 그림자 매를 '상속한' 진, 그리고 란드리 데이어의 혈연으로 그것을 '상속받은' 로사, 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또한 하편의 마지막 장면에서 얼굴을 비춘 멜리사라가 상속받은 선대의 인연까지. <상속자들>과 <전나무와 매>를 읽은 후 아키에이지 연대기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세계관을 슬쩍 훑어봤다. 다른 캐릭터들은 또 어떤 이들일지, 아직도 캐낼 것이 한참 남은 광맥의 산을 보는 기분으로 로사와 진을― 지금껏 란지에며 키릴을 기다려왔듯이 기다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