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소설집 '저녁의 해후'에 실린 '사람의 일기'(1985)로부터 옮긴다. 아래 글 속 정미는 친구의 딸로서 운동권이다.

Friendship, 1907 - Mikalojus Konstantinas Ciurlionis - WikiArt.org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해볼수록 핍박받는 사람들에 대한 정미의 사랑과 책임감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나의 가냘픈 작가정신도 그런 것이 줄기를 이루고 있다고 자부해왔건만 정미의 투박한 진실성 앞에선 어딘지 간사스럽고 가짜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이론적으로도 정미한테 끌렸다.
나는 겨우 날카롭고 강한 걸 이길 수 있는 것은 더 날카롭고 더 강한 힘이 아니라 유하고 부드러운 것이라는 노자(老子)의 아류쯤 됨직한 방법론으로 체면을 세우곤 했다. 그럴 때 정미는 노자가 생전에 웃었음직한 더할 수 없이 질박한 미소로써 대답을 대신하곤 했었다.
친구가 외로움을 덜고 갔는지 더 큰 외로움을 안고 갔는지 헤아릴 겨를도 없었다. 행여 영향을 끼칠 말이나 책임질 말을 했을까봐 돌이켜보면서 문득 자신에 대해 매우 비위가 상했다. - 사람의 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