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형 소설집 '러브 레플리카'(2016) 해설로부터 옮긴다.


cf. '러브 레플리카' 독후감 [이곳에 살기 위한 상상] https://v.daum.net/v/20160130012821053 (신형철)


우리가 ‘삶’이란 표현을 부여할 수 있는 시기는 언제부터인가. ‘내’가 ‘내’ 곁에 있는 이를 향해 ‘당신’이라고 칭할 때부터, 어떤 존재가 어떤 존재들 사이에 머물러 있음이 확인될 때부터다. 그리고 이쯤에서, 우리는 ‘인간에게 생명(삶)이란, 사람들 사이에 머문다는 것을 의미하며, 죽음은 사람들 사이에 머물기를 중단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던 한나 아렌트의 말을 떠올려볼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희망’은 의지가 허락되지 않은 채 출발한 인간의 삶이 ‘인간다운’ ‘삶다운’ 정의를 얻기 위해 필요한 의지를 표현하기 위한 다른 말이다.

윤이형은 이 말을 ‘살 만큼 살아본’ 이의 입에서가 아닌, 앞으로 ‘살아갈 만큼 살아야 할’ 이의 입에서 꺼내게 한다. "희망은 좋은 것일까"를 묻고,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답하게 한다. 그이가 앞으로 감당해야 할 막막함이 너무나 뻔한데, 그럼에도 그이로 하여금 끝내, 물음과 답을 지속하게 만드는 것이다. 중요한 건 그 사이에 놓인 말이다. 순진하기 짝이 없고 허약하기만 한 ‘희망’이라는 말을 앞에 두고 "아주 천천히 숨을 쉬어"보는 이가 자신의 태도를 고르며 "당신에게 집중하기로 한다"고 할 때 우리는 ‘나’의 이야기와 ‘당신’의 이야기가 함께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 해설 | 양경언(문학평론가) 가망 없는 세계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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