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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을 말해줘
이경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1월
평점 :
p.12. 다른 구역 사람들에게 D구역 사람들의 피부는 깨끗하다 해도 깨끗한 것이 아니었다. 언제라도 바이러스를 옮길 수 있는 숙주와 다르지 않았다.
김유정소설문학상과 <세계의문학>신인상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작가 이경의 새로운 작품 <소원을 말해줘>를 만나보았다. 반짝이는 표지와 애틋한 제목에서 심쿵한 로맨스를 생각하며 이야기의 시작을 맞았다. 첫 문장 그녀는 티셔츠와 브래지어를 한꺼번에 벗었다.(p.007)를 보며 19금인 줄 착각했고 그 착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제목에 표지, 그리고 첫 문장까지 로맨스로 시작했던 이야기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변신하고 그 빠른 흐름을 따라 결말에 이르는 데는 정말 순식간이었다.
p.153. "이 도시에서 공포는 거짓을 진실로 뒤바꾸는 알리바이입니다. 공포가 실제하니까 거짓은 없다는 논리입니다.
소설의 독특한 시작만큼이나 주인공의 직업 또한 평범하지 않다. 파충류 사육사. 하지만 그녀는 산사태로 동물원이 사라지면서 실직하고 만다. 그리고는 공원에서 노숙하면서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는 커다란 뱀을 찾아다닌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심각한 피부병이 있다. 온몸으로 '허물'이 조금씩 퍼져가는 티셀 바이러스 감염된 것이다. 이제 소설은 본격적으로 재난 소설로 들어선다. 그런데 '롱롱'이라는 전설 속 뱀이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판타지 영역으로도 살짝 들어간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공포 소설인듯했다. 물리적인 공포가 아닌 심리적인 공포가 너무나 섬세하게 표현된 두려운 소설이었다. 공 박사라는 인물이 지닌 삐뚤어진 과학적인 신념이 마치 몇십 년 전 우리나라 한 지역에 불어닥친 잘못된 정치적인 이념을 보는듯해서 너무나 흥미로웠다.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허물'이 엄청난 불행을 초래했다는 점이 소설과 사건을 오버랩하게 만들었다. 참혹한 사건을 저지르고도 아직도 반성하지 않는 그때 그 위정자들과 공 박사는 다를까? 도덕적인 책임을, 인간으로서의 책임을 다할까?
p.277. 공포가 이념이 되고, 이념이 공포를 강화시켰다. 그 불행한 순환 속에 유일하게 실재하는 건 허물뿐이었다. 공 박사는 시민이 아니라, 시민들의 허물이 불행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이 만들어낸 환상적인 이야기가 너무나 촘촘하게 이어져서 단 한순간도 책에서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허물'이라는 인간의 욕망을 탈피하려는 주인공과 함께하는 방역센터 입소 동기들의 사연이 이야기의 깊이를 더해주는듯하다. 그런데 그들이 이름이 또 독특하다.후리, 김, 뾰쪽수염 그리고 척. 처음부터 끝까지 환상적이고 독특한 색다른 이야기가 펼쳐진 재미난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