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면도날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평점 :
<인간의 굴레에서>. <달과 6펜스>와 함께 서머셋 모옴의 3대 장편 소설인 <면도날>.. 모옴은 천상 이야기꾼이라 그런지 이 소설도 책장이 술술 잘 넘어갈 정도로 재미있게 읽었다. 모옴의 세 작품들은 모두 현재의 삶에 안착하지 못하고 자신의 실존적인 문제에 대해 생각이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 같다. 영혼을 중요시하는 주인공과 이에 대비되는 세속적인 인물들이 등장하여 인간의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지곤 한다. <면도날>의 주인공 래리는 다른 두 소설의 주인공 보다 더 한걸음 나아간다. 인도에 가서 수양하고 돌아올 정도로..
이 책의 제문은 힌두교 베단타 학파의 경전 카타 우파니샤드에서 인용했다.
『면도칼의 날카로운 칼날을 넘어서기는 어렵나니, 그러므로 현자가 이르노니, 구원으로 가는 길 역시 어려우니라』
깨달음의 과정으로 올라서는 것이 면도날을 넘어설 정도로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래도 회원들은 이 책에서 면도날의 날카로움이 느껴질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아마도 이 책이 출간되었을 당시 서양인의 눈에는 동양 인도 철학의 윤회사상이 면도날만큼이나 날카롭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그들에게 이 소설의 제목은 적절하지 않았을까 얘기나누었다.
<면도날>에는 작가 모옴이 직접 화자로 출연하여 래리와 그 주변 인물들의 얘기를 회상 형식으로 풀어낸다. 첫머리부터 래리의 독특한 강인함과 장점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의 비범했던 삶을 얘기해주겠다면서 이 얘기가 사실인듯 흥미진진하게 만든다.
주인공 래리는 당시 1차 세계 대전에 미국인으로 참전했다가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는다. 자신을 구하려다 죽은 동료의 시체를 보면서 신과 악, 죽음에 대해 생각이 많아진다. 래리는 책을 읽어도 유럽 여러 나라를 방랑해보아도 그 근본적인 해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래리의 약혼녀 이사벨은 세속적인 여인, 우리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여인상으로 래리와 대비를 이룬다. 안락한 생활에서 멀어지려고만 하는 래리와 결혼은 할 수 없다. 바로 자신의 상류층 생활을 만족시켜줄 그레이와 결혼한다. 그리고 또 중요 인물 한명은 이사벨의 외삼촌, 유럽에서 미국계 사교를 이끄는 엘리엇이다. 엘리엇은 사교계에서 신분과 돈 위주로 사람을 차별하는 속물이지만 남에게 잘 베풀어주는 아량있는 사람으로 미워할 수 없다.
10년이 지나고 인물들은 많이 변했다. 래리는 인도에서의 수행 결과 자신 안에 신이 있음을, 자신의 영혼에서 위안과 용기를 찾아야 함을, 그리고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들도 오직 악이 있는 세상에서 더욱 빛이 난다는 것을 깨닫고, 살던 세상, 파리로 되돌아온다. 이사벨과 그레이는 대공황으로 파산하여 엘리엇의 파리 집에 머물게 된다. 그레이는 파산으로 인한 불안감과 자신감 상실로 머리카락마저 빠져서 열살은 더 나이들어보인다. 래리는 충만한 내면을 가져서인지 소년처럼 괘활하면서 침착한 분위기로 열살은 젊어보였다. 두 남자는 또래인데 정말 20살 차이 나보였을까. 인도의 햇빛을 받으며 떠돌아다니는 생활은 더 겉늙어보이게 하지 않나 의아해했지만 작가의 대조를 위한 묘사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인물들은 끝까지 자신만의 가치를 고집한다. 이사벨은 부유한 남편이 망했어도 그를 원망하기는 커녕 부유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래리를 버리고 한 결혼을 후회한다는 속마음을 숨기기 위한 반작용은 아니었을까. 엘리엇의 유산을 물려받고 미국으로 돌아가 재기를 꿈꾸는 그녀의 모습은 역시 세속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보여주고 있다. 엘리엇은 죽어가면서도 파티 초대장에 연연해 하는 모습에 추하기도 안쓰럽기도 했다. 래리는 깨달음을 얻은 이후엔 그런 자신의 존재 이유에 맞게 공부와 육체노동으로 방랑의 세월을 보내기로 한다. 사람은 끝내 변하기는 힘든가보다. 뭔가 결정적인 사건으로 마음을 고쳐먹는 권선징악적인 플롯도 많다지만 이 소설의 인물들은 모두 자신만의 가치 추구로 원하는 바를 얻으며 각자의 성공담으로 마무리되었다. 작가 모옴은 이 모든 인물들의 갈등과 오해를 풀어주는 만능 해결꾼으로, 늙지도 않는 멋진 신사로 나오는게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면서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