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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7
소포클레스 지음, 강대진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평점 :
카잔차키스의 소설 <Zorba the Greek>는 국내 번역본에서 <그리스인 조르바>와 <희랍인 조르바>로혼용되고 있다. 그리스와 희랍이라는 말은 고대 비극 <오이디푸스 왕>을 읽으며 확실히 구별하게 되었다. 고대극의 배경이 되는 국가는 자기 나라를 헬라스라고 불렀고, 이를 비슷한 발음으로 음역한 것이 희랍이다. Greece라는 말은 라틴어(Graecia)에서 유래한 말로, 로마인들이 희랍 땅 가운데 자기들 나라에 가까운 지역을 부르던 이름이라고 한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헬라스라 한 것을 그리스라고 번역하는 것은, 신라의 삼국유사를 코리아의 삼국유사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 책의 번역자를 포함한 최근 원문 번역자들은 그리스 대신에 희랍이이라는 말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르바는 the Greek이므로, 최근 발간된 책에서는 그리스인이 더 많이 사용되는 것 같다.
이 책은 희랍 고전의 세 비극 작가 중 한명인 소포클레스의 비극 네편, <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 <아이아스>, <트라키스 여인들>이 실려 있다. 그 중 <오이디푸스왕>은 우리에게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가 창시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라는 말의 기원이 되는 고전이다. 고전은 내용은 알지만 읽지는 않은 책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북클럽 모임이 아니었으면 언제 읽어볼지 기약 없이 책장에만 꽂혀있었을텐데, 이 기회에 읽어보게 되었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남아가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에 대해서 품는 무의식적인 성적 애착을 말한다. 프로이트가 서양 문학사의 3대 걸작으로 <오이디푸스 왕>, <햄릿>,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꼽았다는데, 모두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것과 관련된 내용들이다. 프로이트는 소년 시절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인간사에서 핵심적인 주제로 모든 신경증의 원인이라고 보았다. 좀 과장된 경향이 있지만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로서 그의 업적은 인정하고 있는 듯 하다.
<오이디푸스 왕>은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다는 신탁을 듣고 집을 나와 떠돌다가 테바이 입구에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테바이의 왕으로 추대된다. 이전 왕 라이오스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아들 둘과 딸 둘을 낳고 십몇년을 살았지만, 테바이에 기근과 전염병이 돌아 나라는 피폐해진다. 이전 왕 라이오스의 살해자를 추방해야만 전염병이 멈춘다는 신탁을 듣고 오이디푸스왕은 살해자를 찾으려고 한다. 살해자가 점차 밝혀져 가는 이 희곡의 구성은 현대 미스터리 못지 않게 탄탄하다. 차츰 드러나는 전모.. 그 살해자가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증거가 하나 둘 나오는데.. 아내는 멈추라고 하고 예언자도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말라는데 오이디푸스왕은 멈출 수가 없다. 나는 누구인가.. 오이디푸스왕은 그 답(자신이 테바이 라이오스왕의 아들로 신탁 때문에 버려졌다는 것, 자신이 친아버지를 죽였다는 것,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것)을 얻은 대가로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는 자살하고 자신은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된다.
하루아침에 파멸의 길에 들어선 오이디푸스.. 고대 희랍어 휘브리스는 오만을 뜻한다. 이 비극은 신의 영역을 넘보는 인간의 휘브리스를 경계하여, 아무리 운명을 피하려고 발버둥쳐봤자 종내에는 신의 운명 대로 흘러갈 수 밖에 없음을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파멸의 길에서 신이 아니라 자신의 뜻에 따라 손수 눈을 찔렀다. 신의 운명의 그늘을 벗어나 자신의 의지대로 자유로워졌다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의 의지와 신의 운명의 대립은 읽는 독자 마다 다르게 읽을 때마다 다르게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
오이디푸스가 집요하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파고들지 않았다면, 마음속 화를 조절하여 아버지를 죽이기까지 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급격하게 몰락하지 않았을수도 있었을까. 아니 신이 정해놓은 운명이기에 어떻게든 벌어질 수 밖에 없었지도 모른다. 이 비극의 마지막 코로스의 대사는 죽음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죽을 때 까지 행복하다고 할 수 없는 인간들의 삶의 위태로움, 허무함, 덧없음을 말해주는 듯 하다.
"오, 조국 테바이의 거주자들이여, 보라, 이 사람이 오이디푸스로다.
그는 그 유명한 수수께끼를 알았고, 가장 강한 자였으니
시민들 중 그의 행운을 부러움으로 바라보지 않은 자 누구였던가?
하지만 보라, 그가 무서운 재난의 얼마나 큰 파도 속으로 쓸려 들어갔는지.
그러니 필멸의 인간은 저 마지막 날을 보려고
기다리는 동안에는 누구도 행복하다 할 수 없도다,
아무 고통도 겪지 않고서 삶의 경계를 넘어서기 전에는."